봄비, 그것은 겨울의 끝에서 오는 봄의 사절단


1.

  어디에로부터 오는 것일까.
  속옷까지 모두 벗어내어 던진 헐벗은 땅 가슴 위에로 수줍은 듯 수줍은 듯 소리 없이 내리 앉으며 겨울의 건널목 건너오는 비의 잔잔한 행렬―.
  이것들은 저 머언 겨울의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것들일까. 꽃샘바람을 傳令(전령)으로 하고 점차 봄의 문턱으로 다다르는 말없이 이어지는 줄기, 빗줄기, 그래, 우리는 그것을 겨울의 끝에서부터 계속해서 오고 있었던 봄의 사절단이라고 불러주자. 그리고 그들을 맞이할 조촐한 파티라도 준비하는 거다. 그들을 초대받은 손님들로 따스하게 맞아들이는 거다. 그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밝고 찬란한 계절을 약속해주었기에 충분히 대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겨울의 끝에서부터 봄의 개선문까지 다다른 봄비의 촉촉한 감촉을 마음껏 몸으로 받아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2.

  왜 내리는 것일까.
  겨울의 사랑을 모른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가난한 마음의 행복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봄비는 왜 내리는 것일까.
  아우성처럼 내리던 지난겨울의 어지러웠던 눈밭 속에서 봄비는 물줄기로 이어지기 전에 항상 얼어붙어야만 했을 것이다.
  얼어붙은 도시, 얼어붙은 裸木(나목), 얼어붙은 가로등 얼어붙은 마음들에게로 봄비는 자신의 마음만큼 눈물로 떨어지지 못함에 무던히도 안타까워했을 것이리라.
  지난겨울. 어렸을 적 엄마의 회초리만큼이나 매몰찼던 그 추위 속의 안타까움을 기억하는 사람들끼리라면 봄비가 왜 내리는 것인가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봄비는 이렇게 무작정 우리들 머리 위에로 나비처럼 내리 앉고 있는데―.


3.

  봄비가 내리는 곳은 온 세상이다.
  빈 거리에 東岳(동악)의 캠퍼스에, 달리는 차들의 車窓(차창)에, 열려진 窓(창)에, 까딱까딱 졸고 있는 버스 안내양의 피로한 어깨 위에 늦은 저녁 빛을 내기 시작하는 수은등 주위에 바람맞은 어느 애인의 옆구리에 낀 詩集(시집) 위에로 봄비는 무조건 내리고 또 내리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봄비는 우리의 몸을 적시며 영혼으로 스며든다. 맞는 것 같지도 않다가 점차 피부 속으로 깊이 젖어오는 야릇함, 갑자기 어느 詩人(시인)의 詩(시) 구절이 생각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휴지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잉크가 점점 그 침식의 범위를 넓히어가듯 우리의 영혼 어느 한 구석으로 흘러들어온 봄비는 소리 없이,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 숙인 채 동굴 같은 깊숙함으로 가슴을 파고든다.
  그리고 봄비를 맞은 자는 지난겨울의 시렸던 그의 영혼을 꽃샘바람에 태우는 것이다. 그리곤 지난날의  傷痕(상흔)위에 또 다시 젖어오는 아픔을 이젠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그렇다. 봄비가 가져다주는 것은 지난겨울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치한처럼 들이닥쳤던 비수 같은 바람의 기억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육교 위를 지키는 헐벗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추위 속에 얼어버린 것 같았던 오후 5시의 도시인들. 그때는 애국가가 울렸었지―이다. 어지럽게 어지럽게 하늘의 눈(雪)들이 벌였던 아우성의 축제이다. 그리고 또….
  봄비는 기억만을 싣고 오질 않는다.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의 기대를 ‘잔인한 달’의 카타르시스되는 공포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하염없는 연민을 지난겨울의 기억과 더불어 가져오는 것이다.
  개나리, 진달래, 모란, 철쭉…아아, 봄비는 이들의 머리 위에로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예고하며 침묵 속으로, 言語(언어)가 필요치 않는 고요함 속으로, 쉬임없이 흐르는 것이리라.


5.

  봄비가 가는 곳은 아직 완공되지 않는 어느 지하철 공사장이다. 東岳(동악)의 마루 저 너머다. 북쪽이다. 어느 고적한 섬을 날고 있는 갈매기의 어깨 위다. 다다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그런 곳이다. 꼬마들에겐 E.T가 살고 잇는 곳이고, 조금 철이든 소녀들에겐 어린 왕자가 물을 찾는 사막 한복판이고, 다 큰 아이들에겐 그들의 애인이 살고 있는 집 지붕과 창문가이고 어른들에겐 어릴 적 자라난 고향의 동구 밖 흙길이다. 우리의 꿈이 풍선껌처럼 겁 없이 부풀어나는 꽃들이 화알짝 웃고 있는, 그래서 그 향기가 나비의 깃털에 설탕처럼 묻어있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지금 봄비는 서울의 지붕아래에로 캠퍼스를 적시며, 도서관자리 못 잡아 밖에서 발 구르는 프레쉬맨을 어우르며 고아원과 구로공단의 점심시간을 재촉하며, 부끄러운 기사가 특호활자로 박힌 일간신문을 적시며 안타깝게 안타까웁게 이리도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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