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母胎說(모태설)을 中心으로

本 論文(논문)은 辛(신)교수가 日本(일본)의 言語學(언어학) 專門誌(전문지) ‘言語(언어)’에 要約發表(요약발표)하고 國際大(국제대) 인문과학 I집(1982·6)에 日本語(일본어)로 발표하여 日本學界(일본학계)에 주목을 끈 바 있는 내용을 간추려 한국어로 譯(역)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註>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모태)에 관해서는 이미 東西(동서)의 여러 學者(학자)들의 뛰어난 論文(논문)에 발표된 바 있는데, 紙面(지면)관계로 詳論(상론)은 略(약)하고 本  論旨(논지)와 직접 관련되는 몇 가지 母胎說(모태설)만 소개하면서 小見(소견)을 論述(논술)하고자 한다.


I.韓國(한국) 漢字音(한자음)의 諸母胎說(제모태설)의 紹介(소개)

  1. Henri Maspero의 南方音(남방음) (吳音(오음))說

  프랑스의 東洋歷史學者(동양역사학자) Henri Maspero는 中國南方音(중국남방음)(吳音)이라고 주장했는데 1)그 내용은, ①百濟(백제)·新羅(신라)는 南方音(남방음)이 傳來(전래)되었고, ②高句麗(고구려)는 처음엔 北方系音(북방계음)이 傳來(전래)되었으나 멸망 후에는 唐代字音(당대자음)이 傳來(전래)되어 퍼져나갔다. ③高麗時代(고려시대)엔 北方(북방)·南方兩系統(남방양계통)의 字音(자음)이 사용되었으나 近世朝鮮朝(근대조선조)(李朝(이조))에는 南方系(남방계) 字音(자음)이 支配(지배)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Maspero의 이 南方音說(남방음설)의 主旨(주지)는 韓國(한국) 漢字音(한자음)은 三國時代初(삼국시대초)에 中國揚子江下流(중국양자강하류)인 上海(상해)·楊州(양주)·滿州一帶(만주일대)의 中國豫言(중국예언)이 傳來(전래)되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 地方(지방)의 字音(자음)은 中國歷史事情(중국역사사정)을 더듬어보면 東晋(동진)이 中原(중원)에 위치하다가 魏(위)에 쫓겨서 南下(남하)하였기 때문에 北方中原音 (북방중원음)이 混交(혼교)된 音이라 할 수 있다.


  2. 日本의 有名(유명)한 音韻學者(음운학자), 有坂秀世博士(유판수세박사)는 10世紀 開封音(개봉음)이라 主張(주장)하고, 2)그 根據(근거)로, ①止攝(지섭)의 諸韻類(제운류)가 一般的(일반적)으로 ‘이’【i】인데도, 齒音四等字(치음사등자)만은 規則的(규칙적)으로 ‘’【a】音으로 表音(표음)되고 있는데, 例(예)로 思(사), 此次(차차), 子와 같은 字音이 ‘이’【i】가 아니고 ‘’【a】로 되어 思(), 此(), 次() 子()인 점은 現代官話音(현대관화음)과 有關(유관)한 듯하다.
  ②入聲韻尾(입성운미) -p, -t, -k가 唐後半期(당후반기)의 西北方言(서북방언)에서는 弱化(약화)되어 -b,-r,-g로 나타나는데, 韓國(한국) 字音에서 -t가 -l로 나타나는 (例(예):發(발) 達(달) 등) 사실은 西北方言(서북방언)의 영향이 아닌가.
  ③韓國 字音의 魚韻(어운)은 일반적으로 ‘여’【jɘ】‘어’【ɘ】이지만, 齒音(치음) 二等字(이등자)은 模韻(모운)과 같아 ‘오’【o】로 나타난다. 이 現象(현상)은 洪武正韻(홍무정운)과 共通(공통)되는 現色(현색)이니까 이것은 명백히 近代的(근대적) 中國字音(중국자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3. 日本의 韓國語學者(한국어학자) 河野六郞博士(하야육랑박사)는 그의 學位論文(학위논문)인 ‘朝鮮漢字音硏究(조선한자음연구)’에서 韓國(한국) 漢字音(한자음)의 母胎(모태)는, 唐代長安音(당대장안음)이 主(주)된 基層(기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近世音的層(근세음적층)이 여러 곳에 덮여있다고 하고, 有坂說(유판설)도 有力(유력)한 要因(요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 主張(주장)의 論據(논거)로,
  ①韓國(한국) 漢字音(한자음)의 聲母(성모)에서 神母(신모)와 禪母(선모)의 混同(혼동)은 唐代長安音(당대장안음)의 性格(성격)과 같다.
  ②唐以前(당이전)의 音(음) 즉 切韻音系(절운음계)는 一等(일등) 또는 二等(이등)의 重韻(중운)이 각각 分韻(분운)되어 있지만 唐長安系統(당장안계통)의 音은 모두 合韻(합운)되어 있다.
  ③切韻音(절운음)의 四等韻(사등운)이 唐長安音(당장안음)에서는 三等韻甲(삼등운갑)에 合流(합류)되어 있는데 韓國字音(한국자음)도 이 現象(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④切韻音(절운음)에서는 많은 韻(운)이 分韻(분운)되어 있는데 이들 分韻(분운)이 唐長安音(당장안음)에서는 모두 合流(합류)되고 있는데, 韓國字音(한국자음)이 바로 이 現象(현상)을 나타낸다.
  ⑤唐長安音(당장안음)에서는 三等韻(삼등운)의 甲乙(갑을)의 對立(대립)이 明白(명백)한데, 韓國字音(한국자음)이 이와 같은 現象(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①에서 ⑤까지는 唐長安音系(당장안음계)를 代表(대표)하는 ‘慧琳一切經音義(혜경일체경음의)’의 音韻狀況(음운상황)인데 이 音韻(음운)과 韓國字音(한국자음)이 나타낸 音韻(음운)과 거의 一致(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河野博士(하야박사)는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모태)를 唐中葉(당중엽)(AD8~9C) 長安音(장안음)에서 求하였다.


Ⅱ. 諸學說(제학설)의 批判(비판)과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論(모태론)

  1. Maspero說의 南方吳音說(남방오음설)

  Maspero의 南方吳音說(남방오음설)은 歷史家(역사가)의 見地(견지)에서 보는 대체적인 推定(추정)인데, 당연한 결론이라 생각된다. 百濟(백제)가 처음에 南朝(남조)와 交涉(교섭)하여 中國(중국)의 江東(강동)·江南地方(강남지방)의 漢字音(한자음)이 傳來(전래)된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 후 이 字音(자음)이 新羅(신라)에 전래되었고, 新羅(신라)도 南朝(남조)와의 交涉(교섭)에 있어서, 百濟(백제)·新羅(신라)는 主로 南方系字音(남방계자음)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 능히 推測(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新羅(신라)가 半島(반도)를 統一(통일)함으로써 南方系字音(남방계자음)이 半島全體(반도전체)를 支配(지배)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歷史的背景(역사적배경) 등을 참작할 때 수긍할만한 說이다.


  2. 有坂(유판)의 宗代開封音說(종대개봉음설)

  먼저 韓國漢字音韻尾(한국한자음운미) ―l(ㄹ)음이 唐朝末期 西北方言(당조말기 서북방언)의 영향을 입었다고 하나, 이 ―l(ㄹ)은 韓國語(한국어)의 音韻論的 特性(음운론적 특성)으로서 이미 三國史記地理志(삼국사기지리지) 地名(지명)에도 나타나 있다.
  高句麗地名(고구려지명), ‘荒壤縣(황양현) 本高句麗(본고구려)骨衣縣(골의현)’에서, 荒(황)=骨衣(골의)의 對應(대응)을 볼 수 있는데, ‘荒(황)’은 韓國語(한국어)로, ‘거출’이다. ‘骨衣(골의)’의 上古音(상고음) 【kuɘt-jɘr】이니까 이 地名(지명)에서는 入聲韻尾(입성운미)-t는 -l로 流音化(유음화)하지 않았다.
  한편 新羅地名(신라지명) ‘密城郡(밀성군) 本推火郡(본추화군)’과 같은 地名(지명)에서는 ‘密(밀)’과 ‘推(추)’의 對應(대응)에서 현저히 알 수 있는 것은 ‘密(밀)’은 上古音(상고음) (Miet)의 韻尾(운미)-t가 -l化(화)하였다.
  이와 함께 地理的(지리적)으로 中國西北方(중국서북방)이 가까운 고구려 地名(지명)에서는 韻尾(운미)-t가 보존되어 있는데, 南方(남방)인 新羅地名(신라지명)에서 流音化(유음화)된 -l(ㄹ)이 보인다는 것과 時代的(시대적)으로 宋代 開封音(송대 개봉음)은 AD 10C경의 中國開封地方音(중국개봉지방음)인데, 三國地名(삼국지명)에 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전혀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韓國語(한국어)의 音韻的(음운적) 특징에서의 영향이라고 斷言(단언)할 수 있다.
  이 流音化現象(유음화현상)이 만일 韓國語(한국어)의 音韻的(음운적)특성에 同化(동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宋代(송대) 開封音(개봉음)의 영향이라기보다도, 時期的(시기적)으로 보면 六朝期(육조기)(AD 600年 以前)의 中國北方音(중국북방음)의 영향이라고 해야 이치에 맞는다. 六朝時代(육조시대)의 ‘孔雀明王呪經(공작명왕주경)’의 轉寫音(전사음)을 보면 ‘末(말)’(Muat)이 (Mar)로 ‘達(달)’(Dat)이 (Dhar) 등으로 나타나서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入聲韻尾(입성운미)와 동일한 現象(현상)이다.
  다음, 齒音四等字(치음사등자)가 ‘i’가 아닌 ‘a'로 나타나는 문제인데, 이는 近代官話音(근대관화음)의 영향이 아니라, 오히려 上古漢字音(상고한자음)의 영향이 분명하다.
  上古音(상고음)에서, 齒音四等字(치음사등자)는 대개 之部(지부)에 속하는데, 이 之部(지부)의 中心母音(중심모음)은 ‘ɘ’이며 또한 이 之部(지부)는 歌部(가부), ‘a’와의 相通例(상통예)가 현저한 예를 보면,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a'는 이 上古漢字音(상고한자음)의 영향이 확실하다. 또한 日本 上古漢字音(상고한자음)에도 ’其(기)‘ ’ko', ‘碁(기)’ ‘go' '止(지)’ ‘to’ ‘ㄹ’ ‘ko’ ‘寺(사)’ ‘so’ ‘意(의)’ ‘ㅇ’으로 나타나, ‘i’가 아닌 점도 역시 上古音(상고음)의 잔재이다.
  끝으로, 魚韻齒音二等字(어운치음이등자)가 橫韻(횡운)에 轉入(전입)된 현상도 六朝時代(육조시대)에 소급할 문제이다. 본래, 魚韻(어운)과 橫韻(횡운)은 遇攝(우섭)에 속하는데, 이 遇攝(우섭)의 諸韻(제운)은 漢代(한대)로부터 六朝時代(육조시대)에 이르기까지 詩人(시인)들의 通押例(통압예)라든가, 音義家(음의가)의 相通例(상통예)가 현저한 것을 볼 때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魚·橫韻(횡운) 相通例(상통예)는 漢代(한대)나 六朝時代音韻(육조시대음운)의 영향이라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3. 河野博士(하야박사)의 唐代長安音說(당대장안음설)

  河野博士(하야박사)의 力作(역작) ‘朝鮮漢字音硏究(조선한자음연구)’는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을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그 결과로 나타난 字音(자음)의 성격을 中國音韻史(중국음운사)에 투영해 본 결과 唐後半(당후반)의 長安(장안)(지금의 西安(서안))계통의 字音(자음)이라 斷定(단정)하였다.
  河野博士(하야박사)는 朝鮮朝(조선조)의 諸韻書(제운서)와 각종 資料(자료)를 분석하여, 그 중 가장 대표적인 基層(기층)을 이루는 것을 b層(층)으로 잡고, 보다 古層(고층)인 것을 a보다 新層(신층)인 것을 c 近代的(근대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d層(층)으로 하여 배치한 결과, 대부분이 b層이며 이 b層의 字音(자음)의 성격이 唐(당)長安音(장안음)과 거의 일치된다고 하여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모태)로 唐(당)長安音(장안음)으로 斷定(단정)하였다.
  그런데 筆者(필자)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河野博士(하야박사)가 이 長安音說(장안음설)을 導出(도출)하는 過程(과정)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고찰을 빠뜨린 것 같다.
  그 하나는 分析(분석)한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을 六朝時代字音(육조시대자음)의 音韻狀況(음운상황)에 投影(투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로, 切韻音(절운음)과 현저하게 차이가 있는 唐(당)長安音(장안음)의 代表的(대표적) 音韻(음운)인 慧琳音(혜경음)이 中國音韻史上(중국음운사상)의 一大變化(일대변화)로 보는 見解(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이 또한 六朝時代(육조시대)의 音韻(음운)을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인 것이다.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모태)에 관한 硏究(연구)를 지금까지 大部分(대부분) 外國人學者(외국인학자)에 의하여 硏究(연구)되어 왔고, 特(특)히나 有坂博士(유판박사)의 宋代開封音說(송대개봉음설) (AD 10C경)과 河野博士(하야박사)의 唐代長安音說(당대장안음설)(AD 8~9C경)은 韓半島(한반도)의 漢文化受容(한문화수용)의 歷史的 事實(역사적 사실)과 견주어 보았을 때, 年代的(연대적)으로 너무나 相馳(상치)한 느낌마저 준다.
  筆者(필자)는 이 문제를 考察(고찰)함에 있어서 먼저 中國語音韻史(중국어음운사)를 整理(정리)하고 여기에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을 投影(투영)하고 河野說(하야설)의 오류를 바로 잡으면서,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모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結論(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詳論(상론)은 拙論(졸론)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の母胎(모태)に關(관)るす考察(고찰)”을 參考(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河野博士(하야박사)가 AD 618년에 편찬한 切韻音(절운음)과 AD 8세기 후반에 편찬한 慧琳一切經音義(혜림일체경음의)에 나타나는 音韻(음운)을 서로 비교해보니 복잡한 切韻音(절운음)이 大擧合流(대거합류)하여 간략화한 慧琳音(혜림음)은 中國語音韻史上(중국어음운사상) 가장 큰 변화라고 보는 見解(견해)가 잘못인 것이다. 切韻書(절운서)는 中國語(중국어)의 최초의 韻書(운서)인데 切韻音(절운음)이 복잡하게 分韻(분운)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九人(구인)의 편찬자 중에서 主導(주도)역할을 한 陸法言(육법언)의 切韻書 序文(절운서 서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以古今聲調(이고금성조), 旣自有別(기자유별), 諸家取捨亦復不同(제가취사역복불동), 吳楚則傷輕淺(오초즉상경천), 燕趙則多涉重濁秦隴則去聲爲入(연조즉다섭탁진롱즉거성위입), 梁益則平聲似去(양익즉평성사거)…中略 因論南北是非(인론남북시비), 古今通塞(고금통새)…
  이 序文(서문)의 주요 내용을 보면 各處(각처)의 字音(자음)은 각양각색이고 旣存(기존)의 여러 書類(서류)의 分韻(분운)은 不同(부동)이었다. 그래서 切韻書(절운서)는 당시의 標準音(표준음)을 정하기 위해서 古今(고금)의 音韻(음운)을 참고하고 南北(남북)의 方音(방음)을 절충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切韻書(절운서)는 中國音韻史的(중국음운사적)으로 볼 때 자연적 흐름이 아니라 출신지가 各各(각각) 다른 九人(구인)의 學者(학자)의 發音(발음)을 참고하였고, 古今(고금)의 書類(서류)의 韻音(운음)도 충분히 참고하였기 때문에 그 復雜性(복잡성)은 피할 수 없다.
  결국 筆者(필자)의 考究(고구)에 의하면 切韻音(절운음) 이전의 六朝時代音韻狀況(육조시대음운상황)과 唐中葉(당중엽)의 慧琳音(혜림음)의 音韻狀況(음운상황)과 일치점이 많다는 점을 찾아내어서, 漢魏晋南北朝(한위진남북조)를 거쳐 唐末(당말)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音韻(음운)이 變還(변환)되어 慧琳音(혜림음)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切韻音(절운음)은 인위적 작용으로 복잡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切韻音(절운음)의 分韻(분운)이 唐中葉(당중엽)의 慧琳音(혜림음)에서 대거 합류했다는 河野博士(하야박사)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작용이 큰 切韻音(절운음)을 基準(기준)으로 비교하였기 때문에 착오가 생긴 것 같다. 결국 慧琳音(혜림음)은 六朝時代(육조시대)의 音韻狀況(음운상황)과 비슷한 점을 볼 때, 中國語音韻史的(중국어음운사적)으로 볼 때 자연스런 흐름이며 切韻音(절운음)은 실용적인 면에서 좀 동떨어진 韻書(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는 慧琳音(혜림음)이 切韻(절운)에 비해 各韻(각운)이 대거 합류했다는 점은, 이미 六朝時代(육조시대) 또는 漢代(한대)의 音韻狀況(음운상황)이라는 事實(사실)이 筆者(필자)의 考察(고찰)에서 確認(확인)되었다. 따라서 各韻(각운)의 合流(합류)라기보다 切韻音(절운음)의 세밀한 分韻(분운)이 人爲的(인위적)이었다는 事實(사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4.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論(모태론)

  ①역사적, 문화사적배경에서 본 母胎論(모태론)은 衛滿朝鮮(위만조선)의 BC 190年경부터 또는 BC 108년 漢四郡設置以來(한사군설치이래) 한문화는 한반도전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漢文化(한문화)의 흡수를 하는데 그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漢文字(한문자)이다. 그리고 AD 668年에 新羅(신라)가 반도를 통일할 당시는 이미 한자음의 정착기로 간주하여도 결코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유력한 증거로 洛東江(낙동강)하류의 貝塚(패총)에서 出土(출토)된 金屬器(금속기) 등이 있고, 漢代(한대)의 유물의 一群(일군)이 濟州道(제주도) 山地港(산지항)부근에서 대량출토된 것으로도 능히 뒷받침 해 주고 있다.
  ②漢字音(한자음)의 內部的構造(내부적구조)에서 본 母胎論(모태론)에 먼저 切韻(절운)의 聲類(성류)와 唐長安音聲類(당장안음성류)와의 差異(차이)에 관해서,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과 관계가 있는 점만을 들면 다음과 같다.
  ○泥母(니모):切韻音(절운음)에서는 (n)인데, 長安音(장안음)에서는 (d)가 된다. 韓國音(한국음)(n)
  ○明母(명모):切韻音(절운음)에서는 (m)인데, 長安音(장안음)에서는 (b) 韓國音(한국음) (m)
  ○日母(일모):切韻音(절운음)에서는 (nz)인데, 長安音(장안음)에서는 (z), 韓國音(한국음)  (nz)가 완전히 脫落(탈락)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娘母(낭모):切韻音(절운음)에서는 (nj)인데, 長安音(장안음)에서는 (nj), 韓國音(한국음) (nj) (오늘날은 탈락됨)
  위의 事實(사실)에서도 韓國音(한국음)은 오히려 切韻音(절운음)과 거의 一致(일치)하고 있어 長安音(장안음)의 영향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음 韻類(운류)의 狀態(상태)를 보면,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이 唐長安音(당장안음)과 닮아서 切韻音(절운음)의 分韻(분운)이 나타나지 않고 大擧相通(대거상통)내지는 合流(합류)되어서, 이와 같은 性格(성격)은 慧琳音(혜림음)(唐 中葉(당 중엽)의 長安系統(장안계통)의 音(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河野博士(하야박사)는 主張(주장)하지만, 이 合流現象(합류현상)은 六朝時代全般(육조시대전반)에 걸쳐 있었던 당시의 音韻的狀態(음운적상태)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特性(특성)은 慧琳音(혜림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六朝時代(육조시대)로 앞당겨야 (앞의 聲類(성류)의 現象(현상)과 더불어) 事理(사리)에 맞는다. 또한 六朝時代(육조시대)에 梁(양)의 顧野王(고야왕)이 편찬한 “玉篇(옥편)”의 音韻狀況(음운상황)과도 극히 一致(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결국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은 六朝時代(육조시대)의 音韻狀況(음운상황)과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筆者(필자)는 결국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母胎(모태)를 論(논)함에 있어서 어느 時代(시대) 어느 地方音(지방음)이라고 認定(인정)하여 斷定(단정)한다는 것 自體(자체)가 여러 가지 問題(문제)가 部分的(부분적)으로 생길 것으로 능히 예상되나, 中國語音韻史(중국어음운사)와의 비교에서 볼 때, 가장 강력한 基層(기층)은 六朝期(육조기)의 江南(강남) 江東地方(강동지방)의 字音(자음)이며 그 이전의 漢代字音(한대자음)이라든지 唐 以後(당 이후)의 宗代音(종대음)도 끊임없이 이 基層(기층) 위에 덮어서 多少(다소) 複合的(복합적) 要素(요소)가 混在(혼재)될 바도 없지 않으나, 역시 有力(유력)한 母胎(모태)가 될 수 있는 것은 六朝期(육조기) 江東音(강동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江東音(강동음)도 東晋(동진)의 南下(남하)로 中原音(중원음)이 많이 加味(가미)된 字音(자음)이기 때문에 北方中原音(북방중원음)과 混交(혼교)된 江東音(강동음)이 韓國漢字音(한국한자음)의 有力(유력)한 母胎(모태)가 될 것으로 結論(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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