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發展(정치발전)’은 民主化(민주화)의 變革(변혁)을 의미

‘脫政治化(탈정치화)’시대는 끝나는가?

  지금 우리는 장래를 樂觀(낙관)만 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轉機(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새로운 轉機(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政治發展(정치발전)’이다. 政治學者(정치학자)들이 말하는 政治發展(정치발전)의 개념과 우리가 흔히 듣고 하는 말로써 政治發展(정치발전)의 의미가 얼마나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느냐, 또는 학자들이 말하는 政治發展(정치발전)이란 의미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당연히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현재 우리는 과거의 體制(체제)에 대한 일단의 비판으로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政治發展(정치발전)이란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民主化(민주화)란 점에서 정치발전을 말하고, 한편으로는 그간의 經濟發展(경제발전)과의 대응관계에서 政治發展(정치발전)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常識的(상식적)인 政治發展論(정치발전론)의 구상과 그 志向(지향)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權力(권력)의 人格化(인격화)>란 말로 그 성격이 美化(미화)되었던 과거의 <維新體制(유신체제)>는 일반국민에게는 <脫政治化(탈정치화)>로 나타났고, 70년대의 수출경제의 발전은 일부 사회계층에겐 풍요 속에서 <日(일)요일만의 自由(자유)>와 <消費(소비)·향락의 自由(자유)>를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밑으로부터 국민 참여의 결여와 權力(권력)에 대한 內的(내적) 및 外的(외적) 統制(통제)장치의 마비는 결국 정치의 동면을 가져오고 정치의 동면 속에서 <非政治的(비정치적)>인 막후흥정 속에서 부정부패의 타락을 낳고 특히 一部(일부) 知識人(지식인)의 出世主義(출세주의)는 비열한 현실추종의 추태를 자아내게 했다. 한편 일반 국민의 입장에선 정당한 不滿(불만)의 배출통로가 차단된 채 經濟成長(경제성장)이란 果實(과실) 속에서도 소외당하여 우선 물질적인 생활안정에서나마 자기의 생활의 지표를 찾아볼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어떤 정치제제이고 그것이 굳건한 것이 되자면 국민 개개인의 생활이 안정되어 긍지를 지니고 公共(공공)사항에 관심을 갖고 참여함으로써 통합된 一體(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이 지나쳐 버렸었다고 할까? 이러한 점에서 國民(국민)의 脫政治化(탈정치화)는 국가위기에 일어선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사회에서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정치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選擇(선택)의 決斷(결단)과 責任倫理(책임윤리)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얻어터지게 마련인 시대상황에선 知識人(지식인)이란 사람의 처지는 가장 어려운 것이 된다. 解放前(해방전)이나 그 後(후)의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하나의 知識人(지식인)의 受難(수난)과 항거의 발자취를 보고 또 거기서 그들의 좌절과 타협의 침몰을 실감해 볼 수 있다.
  누구나 사회인으로서 마찬가지의 입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批判意識(비판의식)을 자기 생명으로 하는 지식인에겐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의 결단은 피할 수가 없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또한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이 宿命(숙명)인 것이다. 이러한 숙명으로부터 편리한 도피구로 찾는 자기변명의 生活處世(생활처세)로써 흔히 보아온 것은 방관자나 스스로 局外者(국외자)로서 현실적인 선택의 결단을 외면상으로 유예·연기시키는 생활방식이 있다. 결국 방관이 방조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자기 한 몸의 안일과 안전을 보존하는 데는 가장 편리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한 몸의 안일과 안전의 추구는 언제이고 機會主義的(기회주의적)이 되고 出世主義(출세주의)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우리는 무수한 植民地(식민지) 官僚型(관료형) 지식인에게서 봐오고 있다. 미련하고 고집 센 바보가 되어 고생하기 보다는 좋은 자리에서 편안하게 적당히 살자는 것으로 자기의 양심을 가려버린 사람은 많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 자신이 될 수도 없는 殉敎者(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회에서 책임을 지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 책임윤리만은 고수하려고 애써야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얼마전 敎授(교수) 한분이 ‘이런 난국에선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으니, 몸조심이나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충고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한 분이 바로 大學(대학)의 강단보다 官街(관가)의 안락의자를 더 바랐던 사람이란 것을 모르지 않지만, 환멸을 느끼는 심정은 씻어 버릴 수 없었다. 지식인이 아무런 批判意識(비판의식)이 없이 그저 내 잘살겠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지식인이 아니고, 그러한 것이 만일 지식인이라고 해도 존경을 받을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무엇인가 바른 것을 생각해 보고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려는 뜻이 없이 평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도 成功作(성공작)은 못된다. 특히 대학에서 그러한 타성 속에 안일을 구가하려고 한다면 대학은 무엇이 될까?
  한스·P·부로이엘은 19세기 독일帝國(제국)시대의 독일의 대학교수의 타락을 쓴 글에서 독일의 市民階級(시민계급)과 마찬가지로 대학교수들도 政治的(정치적) 無關心(무관심)과 未成熟(미성숙)상태에 빠져서 정치적 思考能力(사고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나타난 결과를 말하고 있다. 빌헬름體制下(체제하)의 대학교수는 하나의 理想(이상)을 상실한 채 단지 공허한 常套語(상투어)와 無原則(무원칙)한 便宜主義(편의주의), 그리고 정치적 無原則主義(무원칙주의)라고 하는 俗物根性(속물근성)에 사로잡혀 公的(공적) 責務(책무)를 저버린 점을 꾸짖고 있다. 思考(사고)와 批判(비판), 이상의 추구와 책임의식이 없는 대학이나 脫政治化(탈정치화) 속에 동면하는 지식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 하는 것은 새삼 외국의 사례를 들어서 말할 것도 못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大學社會(대학사회)를 되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반성의 계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大學(대학)의 변모와 오늘의 問題(문제)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이 量的(양적)으로나 質的(질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것은 60年代(년대)이다. 60年代(년대)의 시작은 政治的(정치적)으로 <國父(국부)>시대의 종말에서 비롯된다.
  한편 大學(대학)도 解放後(해방후) 國內外(국내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성장하여 大學(대학)강단에 서게 되는 시기이며, 또 大學(대학)의 규모가 확대되어 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歐美(구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新進(신진)엘리트가 새로운 學風(학풍)을 몰고 오는 시험적인 진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4·19로 고조된 政治意識(정치의식)이 大學人(대학인)의 社會參與(사회참여) 또는 政治批判(정치비판)을 고조시키는 시기였다.
  특히 5·16후의 軍事政府(군사정부) 아래서 韓日國交(한일국교)의 문제는 大學人(대학인)의 정치적 발언과 행동의 절정을 이룬 爭點(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의 시련기 뒤에 大學(대학)은 정치적·행정적 統制下(통제하)에서 <批判的(비판적) 知識人(지식인)>이 침묵 내지 배제와 <참여지향>의 <機能的(기능적) 知識人(지식인)>과 <傍觀者的(방관자적) 知識人(지식인)>의 시대로 점차 돌입되게 되었다. 특히 60年代(년대)후반에서 70년대에 이르는 輸出主導型(수출주도형)의 경제성장 속에서 産學協(산학협)의 연구비의 배정이나 大學人(대학인)에 대한 産業社會的(산업사회적)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대학인은 연구비에 현실적 매력을 느껴서 物量的(물량적) 實積(실적)위주의 연구가 빛을 보게 되고, 産業(산업)이나 行政(행정)에 참여하는 교수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의 발전, 특히 양적 발전이나 대학교수의 일부 연구활동을 지원해주고, 행정에 참여한 교수들에게는 사회참여에의 의욕을 충족시켜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간의 사정을 일단 평가하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大學(대학)의 行政的(행정적) 規制(규제)가 오랫동안 깊숙하게 大學(대학)의 운영에 손을 뻗어옴으로써 일어난 문제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원래 敎育行政(교육행정)의 本來(본래)의 姿勢(자세)는 명령·지시와 통제이기보다는 권장과 재정적 지원이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大學(대학)의 운영이 자체모순도 있겠으나, 大學(대학)이 一方的(일방적)으로 官(관)에 끌려만 간다는 타성은 길게 봐선 大學(대학)의 본래의 특성과 기능을 위축시키고, 또 한편으로 일부 國立大學(국립대학)만을 지나치게 비대화시켜서 大學(대학)사이의 격차를 制度化(제도화)시키게 된다는 것은 帝國(제국)시대의 日本(일본)의 예를 들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大學(대학)구성원이 自治(자치)훈련을 가장 잘 받아야 할 텐데, 그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大學(대학)자체나 이 社會(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이 못된다. 大學(대학)이 할 일과 또 해야 할 일은 大學(대학)의 自律(자율)에 맡기도록 해야 하고 大學(대학)도 종래의 의존적 타성이나 大學(대학) 자체의 잘못된 점은 스스로 대담하게 고쳐나감으로써 우리가 앞으로의 大學(대학)의 바른 모습을 되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大學人(대학인)의 國家(국가)정책의 수립이나 行政(행정)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大學(대학)에서 政街(정가)로 직행하거나, 大學人(대학인)으로서 전문지식의 정당한 활용의 한도를 넘은 들러리식의 참여는 엄중하게 自制(자제)되고 그간의 행적에 대한 反省(반성)이 필요할 줄 안다. 學文(학문)하는 것과 政治(정치)나 行政(행정)은 그 자체가 무관계는 아니지만, 학문으로서 할 수 있는 正道(정도)는 지키고, 個人(개인)에 따라 能力(능력)과 所信(소신)이 있으면 몰라도 官街(관가)를 기웃거리는 풍조는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한편 政治人(정치인)이나 행정관리의 입장에서도 大學人(대학인)을 편리한대로 <들러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도 고쳐야 할 것이다.
  셋째로, 70年代(년대)는 大學(대학)과 産業(산업)의 밀월시대를 방불케하고, 大學人(대학인)이나 각종 연구기관의 연구원에 의한 物量的(물량적)으로 큰 규모의 연구가 성행된 황금시기를 맞은 것과도 같았다. 여기서 물론 그것 자체가 그릇된 것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집어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우선 産業界(산업계)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능공수준의 人材(인재)에만 탐을 내거나 당장 돈이 되는 연구에만 연구비를 내려고만 하지 말아야겠다. 길게 써먹을 수 있고 創業(창업)을 발휘할 기초과학에 든든한 지식을 쌓은 인재를 아껴주고, 또 基礎科學(기초과학)·理論科學(이론과학) 분야의 연구에도 배려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겠다. 이 점은 文敎當局(문교당국)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할 문제다.
  大學人(대학인)의 입장에서도 物量的(물량적) 實積(실적)위주나 기초과학 경시의 풍조는 시정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점을 분명히 재인식하여야 하겠다.

<政治發展(정치발전)> 시대의 大學(대학)의 地位(지위)

  政治發展(정치발전)이란 새로운 轉機(전기)가 주는 충격은 大學(대학)에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되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대학에서 他意(타의)로 배제되었던 학생과 교수가 다시 대학에 돌아온다. 이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정치발전을 주변에서 피부로 실감하게 된다.
  돌아온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여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동안의 시련을 위로해야 하겠고, 돌아온 이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그동안 잃었던 것을 찾고 大學(대학)이 활기를 띠게 서로가 협조하는 분위기를 이루어야 하겠다. 물론 여기서 감상적 분위기만으로 일은 돼 나갈 수 없다. 한스·P·부로이엘이 독일帝國(제국)시대의 大學人(대학인)의 상태를 걱정하였듯이 政治的(정치적) 無關心(무관심)이나 政治的(정치적) 未成熟(미성숙)에 쳐져서도 안 되고 동시에 바른 政治(정치)에의 秩序(질서)감각이 약해서도 안 되겠다. 우리는 지금부터 더욱 막중한 과정을 견디고 전진해야 할 출발점에서 서있다고 본다.
  大學人(대학인)으로서 政治(정치)를 외면하지 말고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참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19세기 독일大學(대학)이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에 야코브 그림이 大學敎授(대학교수)에게 한 遺言(유언)이 생각난다. 그는 말하길 ‘티 없는 청소년의 公平(공평)한 감각은 실로 다음의 일을 바라고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도 또한 온갖 기회에 생활과 國家(국가)에 관한 중요문제들을 보다 순수하고 보다 道德的(도덕적)인 형태로 되살려 성의를 가지고 답변해야 한다고’라고 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대학인이 사명감을 지니고 성실 성의로 임하여 서로가 신뢰를 갖고 대화를 해야만 우리는 장래를 기약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大學(대학)이 아무리 그 규모가 확대되어 ‘멀티버시티’로 되어서 그 구성원 사이에 對話(대화)가 어렵다고 해도 최선을 다하면서 대학 본래의 모습을 되살리려고 해야 한다고 본다. 자유로운 知的(지적)인 探究(탐구)가 대학의 生命(생명)이라고 한다면 討論(토론)·論爭(논쟁)·對話(대화)는 상대방의 學說(학설)이나 意見(의견)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진실 앞에서 솔직하고 진실 앞에서 겸허하지 않고는 오늘의 대학이 처한 난국을 타개할 뾰족한 묘책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政治發展(정치발전)이란 民主化(민주화)의 變革(변혁)은 大學(대학) 전반에 여러 가지 변동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變動(변동)이 大學(대학)밖의 他律的(타율적)인 것에만 의존해서 끌려만 가서도 안 되고, 大學(대학) 스스로가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가는 大學(대학)의 自主的(자주적)인 자기변혁의 저력이 있어야 한다. 이 저력이 大學(대학)에는 있어야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大學人(대학인)의 긍지와 자존심이 없이 밖으로부터 또는 밖의 힘에 의해서만 大學(대학)이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운 것이다.
  政治發展(정치발전)이란 현재 우리의 志向(지향)이 결코 손쉽게 이루어 질수 있는 것은 아니다. 旣成利害(기성이해)와 갈등을 거치고 分裂(분열)과 對立(대립)의 시련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調和(조화)와 統合(통합)이 모색되면서 국민의 밑으로부터의 의사가 政治制度(정치제도)라는 필터를 통해서 나라의 질서와 안정이 기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온 국민의 관심과 참여의 사항이다. 따라서 大學人(대학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大學人(대학인)으로서 知性(지성)과 責任(책임)을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大學(대학)자체는 學文(학문)하는 곳이지만 知識人(지식인)으로서 이 사회 속에서 大學人(대학인)이 지녀야할 良識(양식)과 良心(양심)이 있다.
  大學敎授(대학교수)나 學生(학생)이 정치적 의견 때문에 직접적인 행동을 하여 大學(대학)자체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는 것은 大學(대학)의 不幸(불행)이다. 우리는 60年代(년대) 韓日國交(한일국교)란 중대한 쟁점 때문에 大學街(대학가)가 술렁대고 그 후 계속해서 學生(학생)이 거리에 나서게 되어 희생된 기억을 갖고 있다. 아니 이번에 학원에 돌아온 緊急措置(긴급조치) 9號(호)에 해당해서 시련을 당한 당사자들을 봐도 이 점은 잘 알고 있는 뼈저린 체험이다. 여기서 各界(각계)의 旣成指導層(기성지도층) 人士(인사)들의 책무가 막중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학생이 다시 희생되는 일이 없어야겠다. 여기서 나는 中國(중국)의 5·4學生運動(학생운동)을 평해서 한 胡適(호적)박사의 말을 인용해서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싶다. 그는 말하길, ‘5·4運動(운동)은 하나의 사실상의 표현을 가지고 歷史上(역사상)의 一大原則(일대원칙)을 증명하였다. 이를 歷史上(역사상)의 公式(공식)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다. 무슨 공식인가 하면, <무릇 변태적 사회, 국가에서 정치가 너무 부패하고, 民意代表(민의대표)기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政治參與(정치참여)의 責任(책임)은 반드시 학생에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韓國大學(한국대학)의 새 方向(방향)모색을 위해

  흔히 말하길 大學人(대학인)은 가장 선진적이고 대담한 말을 하지만, 大學(대학)처럼 완고하고 보수적인데도 없다는 말을 듣는다. 깊이 반성해 보고 때때로 생각해 보는 일이다.
  사실 어떤 면에선 위의 말이 솔직하게 수긍된다. 지금 大學(대학)에 다른 곳에도 마찬가지이겠으나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知的(지적)·功利的(공리적)·計算的(계산적)·合理的(합리적)으로 그 나름의 思考類型(사고유형)을 가지는 몇 개의 世代(세대)가 共存(공존)한다. 老年期(노년기)의 완숙한 人生(인생)을 살아가는 世代(세대)는 植民地(식민지) 敎育(교육)으로 키워나고 儒敎的(유교적) 傳統(전통) 속에서 잔뼈가 굵어서 주는 것 받아야 할 것도 사양하며 받으며 그 뒷면에는 序列的(서열적) 權威意識(권위의식)이 있다. 中年期(중년기) 世代(세대)라고 해도 약간 사양하며 자기의 위치를 찾는 면이 있으며 그 뒷면에는 역시 自己(자기) 스스로를 내세우지 못하거나 스스로 자제하는 準權威主義(준권위주의)의 思考類型(사고유형)의 인간이었다.
  40代(대) 30代(대)는 받아도 당연한 것이고 받아야 한다는 수혜감에 부담이 없으며 해방 후의 새 물결에 깃든 思考(사고)유형의 인간들이다. 20代(대)는 자기주장 나름으로 줄 것을 주지 않으면 따져보고 實利(실리)에 밝은 생각에 살고, 경쟁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다져진 세대이다. 이러한 世代(세대)의 共存(공존) 속에 있는 것이 大學(대학)이다. 다른 官廳(관청)이나 企業(기업)과 달라서 學文(학문)의 계승과 발전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世代(세대)사이의 공존과 조화를 모색하면서 시간과 노력의 경주와 각 개인의 개성 있는 創意(창의)를 육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의 차이는 시대의 변천과 그에 대한 적응성을 요구할 때에는 갈등을 낳고 不信(불신)에 흐르기 쉽다. 여기서 우리는 전환기에 있어서 학문적 분위기나 대학의 체질상의 한계를 냉철하게 인식해서 우리가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學說(학설)의 對立(대립)보다 學閥(학벌)의 분열이 더 크고, 學問(학문)의 자세와 방향의 문제보다 각자의 價値基準(가치기준)과 生活樣式(생활양식)의 차이가 더 큰 간격이 되고 있다. 大學(대학)의 虛像(허상)을 솔직히 말하면 그 점진성과 기성권위에의 守舊性(수구성)에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닥치는 문제는 그 밖에도 심각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많다.
  여기서 우선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함께 융화될 수 있는 겸허하고 솔직한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점을 재삼 스스로 따져보고 있다. 하나는 學問(학문)의 분위기를 보다 개방적인 마음가짐으로 찾아봐야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1957년의 美國聯邦最高裁判所(미국연방최고재판소)의 어느 대학관계사건의 判決(판결)에서 제시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띤다.
  즉 ‘학문은 시기와 불신의 분위기에선 번영할 수 없다. 교사와 학생은 언제나 자유롭게 탐구하고 연구하고 평가하며, 새로운 성숙과 이해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문명은 침체되고 사멸할 것이다’
  위의 말은 어떻게 해석하든 한 번쯤 생각해 볼 것이라고 본다.
  다음에 나는 이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 없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몇 번이고 쓰다가는 주저하고 쓴 것을 찢어버리면서 나 스스로를 깊이 반성하며 여러모로 부끄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너는 도대체 뭣을 제대로 했느냐?’하고 물어도 별로 똑똑하게 할 말도 없으려니와, 또 꼬집어서 ‘왜 구체적으로 할 소리를 제대로 못하고 일반적인 얘기만 늘어놓느냐?’해도 나로선 변명이 궁색해진다.
  단지 변명이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겠고, 그래도 지식인이라는 최소한의 책임을 벗어버리고 도망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질을 쳐야 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하고 싶다. 자기의 소신껏 떳떳하게 생애를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무수한 지식인이 좌절되고 역사의 물결 속에 휩쓸려서 침몰된 것이 아닌가?
  140여년전 야코브 그림은 敎授(교수)들을 머릿속에 두고 다음과 같이 뼈아픈 얘기를 뱉어놨다. 즉 ‘이 세상에선 正義(정의)를 생각하고 正義(정의)를 말하지만, 스스로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될 때에는 중도에서 의심하고 두려운 나머지 결국은 뒷걸음질 쳐 버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이 말은 결코 자기변명이나 위안을 위한 말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점에서 스스로 경각성을 높이어 서로 격려하고 미래를 두고 무엇인가를 해보자는 뜻에서 인용해 본 것이다. 앞으로의 우리의 자세는 理性(이성)을 소중히 하고 眞理(진리)앞에 겸허하고 歷史(역사)의 審判(심판)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감히 한마디 하고 싶은 나의 심정임을 다시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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