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매체의 가로쓰기

  한글전용이냐 國漢文(국한문) 혼용이냐! 1945년 해방과 함께 논란의 대상으로 되어왔던 이 문제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새로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세로체제로 만들던 전통적 일간지들도 차츰 가로체제로 바뀌고 있으며 몇몇 잡지는 한글전용화를 하고 있어 80년대는 한글전용이냐 국한문혼용이냐 하는 문제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 것 우리가 쓰자는 측과 우리의 文化(문화)의 형성과정을 생각하며 지나치게 고집하지 말자는 측이 팽팽히 맞선 이 시점에서 本紙(본지)에서는 가로쓰기 문제와 함께 이 문제를 論(논)하고자한다.
<편집자 註(주)> 


  <전통에는 계승과 혁신이라는 것이 있다. 계승이란 어느 한 계통의 역사적 배경과 규범적 의의를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전제로 하며 혁신이란 그러한 해석하고 개혁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과거의 가치를 소중히 하고 후자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이 둘은 언제나 서로를 멀리하고 견제하며 성질이 전혀 다른 양극단을 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훌륭한 전통에는 계승과 혁신이 함께 있어온 것처럼 이 양자의 지혜로운 조화는 반드시 훌륭한 전통과 높은 가치를 창조할 것으로 믿는다.>
  이것은 ‘現代文學(현대문학)’ 誌(지)가 지난 82년 12월 창간 28주년을 한 달 앞두고 종전의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혁신하면서 그 편집후기에 담은 글 중의 일부이다. 날로 늘어나는 한글세대와 우리글의 특성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의 한 표현으로 나타난 가로쓰기는 그러면 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었을까?


Ⅰ. 가로쓰기 필연성

  한자문화권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언어의 전담매체는 가로쓰기로 되어있다. 이것은 인간 공학적인 면에서 세로쓰기보다는 가로쓰기가 더 과학적이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눈의 운동 구조를 보자. 우리 인간의 눈은 상하로 움직이는 것보다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쉽고 물체의 식별 또는 독서를 할 때 가로로 거듭 움직여 보면 근육의 피로도를 쉽게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세로쓰기보다 가로쓰기가 더 과학적인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다음으로 시각적인 면에서 한 번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가로로는 1백80도까지 물체를 식별할 수 잇는데 반해 상하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의 눈은 본능적으로 세로 배열보다 가로 배열에 안정감을 더 얻게 되고 적응도가 빠르며 이런 면에서 글도 가로쓰기가 적합하다고 하겠다.
  다음은 실용적인 면에서 보자. 기계문명의 고도한 발달과 문학의 발전 및 경제성장에 따라 각종 산업기기가 널리 보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로쓰기 체제로 된 것들이다. 텔레타이프라든가 컴퓨터 같은 것은 물론 우리가 일상편리하게 쓰고 있는 타자기 조차도 가로쓰기로 되어있는 것이다. 이런 산업기기를 의식해서 굳이 나라말의 서법까지 바꾸어야 할 이유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던 당시에 우리나라가 만일 한자문화권에 있지 않은 영어문화권에 있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세로쓰기를 했을까하는 질문과 함께 한글의 가로쓰기가 왜 절실했던가 하는 데 대해서는 국민 모두의 깊은 사려가 부족하지 않았던가 싶다.


Ⅱ. 가로쓰기 실정

  독립협회에서 1896년에 제창한 바 있는 <민족문화론>에서도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했으며 이후로도 국문학계의 여러 모임에서 한글의 가로쓰기를 강조해왔으나 이의 실현은 해방이후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고교 및 대학의 교과서에만 이루어졌을 뿐 일반 출판물에서는 거의 외면하다시피 해 왔다. 그러나 해방이후의 한글전용세대들은 학교의 교육과정에서는 가로쓰기를 익히고 신문이나 일반 독서물에서는 세로쓰기를 익혀야 했다. 신문이나 일반 독서물을 대하는 시간보다는 교과서를 대하는 시간이 더 많은 학생들은 여기서부터 독서의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로쓰기에 익숙해진 눈으로 세로쓰기 독서를 하자니 적응이 잘 안되고 왠지 낯설기만 한 나머지 세로쓰기 독서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보이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자각과 반성의 하나로 문화 각계에서 다시 한글 가로쓰기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일반 출판계에서도 단행본의 가로쓰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출판계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의 각 일간지를 비롯한 주간지 및 일부 출판물에서는 세로쓰기를 하고 있으며 일간지의 경우 문화면 정도에서만 가로쓰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문에서 아직 세로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독자의 많은 비중이 한문체 (漢文體)에 익숙한 해방이전의 세대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언젠가 한번은 달라져야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면 이의 조속한 시정도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Ⅲ. ‘現代文學(현대문학) 誌(지)의 가로쓰기 체험담’

  ‘현대문학’이 1955년 1월에 창간된 문예지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지난 28년간 세로쓰기를 고수해온 편집체제를 막상 가로쓰기로 하는데 에는 여간 망설여지던 것이 아니었다.
  편집자의 한사람으로서 10여 년을 이 문학지에서 근무한 나 또한 한글세대이지만 ‘현대문학’지가 쌓아온 28년이란 연륜과 우리 문단의 원로를 위시한 해방 이전의 선배문학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현대문학’지가 그간의 세로쓰기 편집을 가로쓰기로 바꿈으로써 감수해야 될 낯설음이라든가 격세지감 같은 것이 없을 수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편집진들은 회의를 거듭 여는 가운데 문단 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난 82년 9월의 일이다.
  여기에 조언을 해주신 분들은 우리 문단의 원로에서부터 신인에 이르기까지 약 백여 명으로 해방이전과 해방이후, 즉 구어체(口語體) 세대와 한글전용 세대를 반반하여 자문을 받았다.
  그 결과 한글전용세대들은 전적으로 가로쓰기에 찬동하는데 반해 해방이전의 문인들은 약 50%가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우려를 표명하는 분들 중에는 ‘현대문학’지의 오랜 연륜을 통한 그간의 고유한 인상을 고수하자면 당분간 가로쓰기를 보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하는 입장과 가로쓰기는 읽기가 거북하다는 입장 등으로 이분들의 태도는 우리 편집진의 결정을 무척 망설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분들과 같은 태도를 표명하면서도 가로쓰기를 환영하는 黃順元(황순원)선생의 조언에 힘입어 우리는 마침내 ‘현대문학’지의 가로쓰기 편집을 확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가로쓰기에 따른 편집체재의 개편도 서둘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의 모든 문예지들이 세로쓰기를 하고 잇는데다가 가로쓰기 편집에 필요한 자료가 없었던 탓으로 우리 편집진들은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거듭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1982년 12월호였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우리 편집진들은 전전긍긍했다. 과거의 체제를 혁신하는 입장에서 단순히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만 했을 뿐 부수적으로 뒤따라야 할 편집미 같은 것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감을 했기 때문이다.
  인쇄소에서 막 제작을 끝낸 이 책을 받아든 순간 우리는 그지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편집상의 기교보다는 작품게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문예지인 만큼 편집미에는 다소 등한할 수도 있고 또 이것은 홋수를 거듭하는 동안 향상될 여지가 많은 것이라 하더라도 가로쓰기에 있어서의 行間(행간)과 行(행)의 字數(자수)계산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우리글의 활자로 세로쓰기에 알맞게 되어 있으므로 활자의 子母(자모)를 변경하지 않는 처지에서는 여기에 대한 연구가 더 있어야 했던 것이다.

 
Ⅳ. 가로쓰기에 따른 활자의 모양

  가로쓰기의 글자체는 한글의 경우 長體(장체)보다 平體(평체)가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한다. 과거의 세로쓰기에 사용했던 활자를 가로쓰기에 사용한 결과 글자의 불안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불안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일부 신문에서 개발한 平體(평체)자모가 세로쓰기 쪽에서보다 가로쓰기를 하고 있는 쪽에 더 어울리는 것을 보았을 줄 믿는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듯이 이것은 우리 인간의 눈이 세로 배열보다 가로배열에, 그리고 가로쓰기의 경우에는 그 배열의 모습과 닮은 평체 쪽이 더 안정감을 주는 점에서 착안된 것이다.
  따라서 인쇄소의 여건상 지금 당장 활자의 자모를 바꿀 수는 없는 실정이지만 이의 전반적인 개선도 시급하다고 하겠다.

 
Ⅴ. 가로쓰기에 대한 여론과 효과

  ‘현대문학’지가 가로쓰기로 쇄신하여 시중에 나가자 많은 여론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바 도하 각신문의 긍정적인 보도와 아울러 독자들의 호응은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가로쓰기의 실행여부를 자문하는 과정에서 반대를 하고 나섰던 문인들도 막상 가로쓰기를 대한 뒤에는 동조와 수긍의 말을 전해왔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다른 문예지에서도 앞으로 가로쓰기를 할 의사를 비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같은 문학지인 ‘현대문학’이 가로쓰기를 하니까 따라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소명이 자독서생활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 같은 시간 내에 같은 내용의 글을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로 하여 읽혀본 결과 가로쓰기의 내용을 빨리 읽고 이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비율이 엄청난데서 온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글세대들 중에서 임의로 선택된 1백 명을 대상으로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읽혀본 결과 이 세대들에서는 98퍼어센트가 가로쓰기를 더 빨리 읽고 이해했으며, 구어체 세대를 대상으로 조사해 본 바로는 75퍼어센트 정도가 가로쓰기를 더 빨리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생활 속독교육연구원>의 김용진 원장은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의 편리도를 다음과 같이 조사 분석하고 있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의 편리도 조사표 대상인원 11,887명 조사항목 가로쓰기 10,936명 92% 세로쓰기 951명 8%>
  이는 가로쓰기가 우리 실생활에 적응되는 것이 훨씬 두뇌의 활용면이나 이해력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또 1분간을 통하여 같은 글자를 읽힌 결과 가로쓰기인 경우 1분간 평균독서 글자 수가 5백82자, 세로쓰기인 경우 1분간의 평균 독서글자수가 4백49자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석 이외에도 김용진 원장은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한분으로 여기 보조를 같이하여 한글의 活字體(활자체)에 대한 연구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