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我機能(자아기능)은 인식과 자기초원의 과정

  인간은 自我(자아)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인간을 포용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의식은 현재의 주어진 상황이외에 더욱 긍정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全存在(전존재)를 성숙시키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날마다 포착하며, 인간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는지 해석하고 있다. 이에 본고는 現代(현대)의 자신망각 탈피를 지적함과 동시에 定形(정형)속에 포함될 수 없는 궁극적인 眞理(진리)를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註>


Ⅰ. 實存哲學(실존철학)의 입장
  서양철학에 있어서 自我探究(자아탐구)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결실은 無(Nicht)에 관한 개념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外的(외적)이고 육체적인 여러 상황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의 內的(내적)인 영혼을 깨달으려 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경향은 플라톤에 의하여 <죽음의 연습>이라고 표현되며 [파이돈(Phaidon)]속에 남아 있다.
 自我(자아)란 존재 (Sein)와 당위(Sollen)를 설명하는 서양 철학적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자아의 기능은 그 자신을 향한 직접인식이며 자기초원의 과정이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뿌리>를 통하여 객관대상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탐구에 숙련될 때 우리의 의식은 이경험적 세계에 좀 더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표현을 바꾸면 自我論(자아론)은 고양된 의식의 훈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같은 의식의 고양에 따라 우리는 일상적 경지에서 근원적 예지에로, 순간에서 초월로, 그리고 返照(반조)의 영역에서 太古(태고)의 상태를 회복해 갈 수 있다. 경험적 자아에서 근원적 無(무)에 이르는 접근방법은 반드시 초월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논리적면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하이데거(Heidegger)나 카알야스퍼스(Kal Jaspers) 샤르트르(Sartre)등의 이 자아를 세밀히 분석하여 그것이 결국은 초월적 세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논증함으로서 드디어는 존재론적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형이상학이 되며 그 자아의 깊이 속에 존재와 無(무)는 교류를 하게 된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의 존재하체가 無(무)안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그들이 본질적으로 구명하려 했던 점은 <궁극적 의지>였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들 일상적 인식위에 떠오르며 또 이것을 해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밀도있게 現前化(현전화)시키느냐하는 점으로 귀결되고있다.
 실존철학의 근본입장은 인간을 그 내면적 炯眼(형안)의 빛으로 파악하려는 점에 있다. 우리의 실존은 이 세계에 <버려져>있다. 따라서 그것은 無(무)앞에 <열려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계에 피안을 향하여 끝없이 <팔리려고>한다. 물론 우리는 시간과 공간·객관과 우연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을 왜소화 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未知(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줄달음쳐 가고 있다. 이 죽음에 이르는 실존은 모든 존재에 공통된 운명이다. 인간존재의 有限性(유한성)과 孤獨(고독)에 대한 자각은 결국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불안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 심각한 경험은 키에르케고르(Kierkegoard)는 [죽음에 이르는 病(병) (Sickness unto death)]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생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공포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와 일상에서 야기되는 그릇된 편견이며, 감상적 자극에 의한 불안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 실존철학자들이 보는 인간의 실존은 궁극적으로 無(무)안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無(무)의 실연에 직면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안에 몰입하느냐 않느냐하는 가능성을 자신의 선택으로 갖고 있다. 이와같은 가능성의 실존이야말로 이들 실존철학자들의 안목에 의하여 관조된 인간의 숙명이며, 동시에 인생이 허무하지만은 않다는 反證(반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Ⅱ. 空(공)의 변증법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찾는 작업은 동양철학에 있어서도 중심의 테마가 되어 왔다. 특히 인도철학의 主流(주류)는 내면적 관조를 주제로 발달하여 왔다. 불교를 비롯하여 쟈이니즘(Jainism 支那敎(지나교) ) 상키야 (Samkhya ?謠(수요) ) 요가(Yoga) 베다안타 (Vedanta) 등 중요한 인도철학의 諸派(제파)는 이 자아탐구의 길을 통하여 해탈을 얻으려고 시도하였다. 우리는 동양철학에서 자아탐구를 가장 밀도 있게 논증한 예를 空(공)의 교의를 중심으로 하는 中觀(중관)학파에서 찾을 수 있다. 中觀(중관)학파를 창시한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는 모든 사물의 본질 가운데서 움직일 수 없는 本源(본원)을 空(공) (Sunyata)이라고 파악하였다. 空(공)은 물론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바처럼 有(유)나 無(무)라고 하는 극단적 대립을 초월한 中道(중도)로서의 空(공)이다. 따라서 空(공)의 참다운 모습은 피상적 인식에 의하여 파악될 수는 없다.
 그러나 존재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지만 지적인 기준에 의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知的(지적)수단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존재의 이름(Nama)이나 모습(Iaksana)이다. 혹은 어떤 사인(Sign)이나 言說(언설)에 의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의 명칭이나 모습은 모두 思考(사고)구조의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어떤 존재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개념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개념화된 우상을 통하여 존재의 특성을 분류하고 있으며, 그 방법 이외에는 어떤 이성적 기준으로도 존재를 특징지을 도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불완전한 知的(지적)기준으로 <어떤 존재>라고 규정지을 따름이다. 이 한정된 지식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無知(무지)의 바운데리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적 진리는 결국 이와같은 일상적 개념화외 피안에 있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성에 의하여 분류되고 분석된 존재는 여러 가지의 실재로서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식은 평범한 感官(감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더구나 주관적 편의에 따라 존재는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관과 객관세계에 있어서 우리들의 한정된 지식은 늘 주관적 경향을 띄운다. 따라서 주관적 인식은 멋대로 객관을 변형시켜 버린다. 이 헛된 주관적 편견은 늘 일정한 카테고리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原因(원인),條件(조건),時間(시간),空間(공간), 始初(시초),終末(종말)등과 같은 경험적 인식은 이와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사고하고, 유추하며, 판단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오직 주어진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이와같은 경험적 사실들을 초경험적인 예지로서 판별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眞諦(진체)는 言說(언설)을 떠나지만 世信諦(세신체)는 언설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용수는 이와같이 그릇되게 조작되는 지식의 根底(근저)를 無明(무명)이라고 본다. 無明(무명)은 결국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생의 모든 방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인간은 無始以來(무시이래)로 이 카테고리에 의하여 이성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그 無明(무명)에 의하여 空(공)의 초월적 인식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상적 의식이 초월을 통하여 근원적 般若(반약)로 체득되는 일이 그의 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불교인들은 인생을 이 무지에 의한 輪廻(윤회)로서 파악하며, 그 극복의 길을 반야로서 제시한다. 용수(龍樹)는 이렇게 말한다. ‘世俗(세속)과 眞現(진현),緣起(연기)와 公(공), 그리고 영원과 순간의 실상을 똑똑히 인식해야한다’ 이 양자의 차별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는 <지혜의 완성>(바라밀다지피안)이라는 길이 열려지게 된다.
  存在(존재)의 실상은 경험적 지식에서 찾으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근원적 무지의 초극에서 얻으려했다는 점에서 용수의 철학은 데카르트(Descartes)의 現象學(현상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용수는 우리의 경험적 지식과 내부로 향하는 인간의식의 本質(본질)을 회의한 哲人(철인)이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인간을 <생각하는 實石(실석)>으로 파악하였다. 훗서얼은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 있는 <순수한 의식의 영역>혹은 <초월적 자아>에 이르지 못하는 어떠한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띄운다. 용수는 그 근원적 예지를 경험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감각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본다. 즉 空(공)의 변증법이란 허망한 객관적 카테고리나 그 객관적 현상을 초월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현대의 어떠한 철학적 입장에 선다고 하더라도 용수를 形而上學(형이상학)의 완성자라고 부를 수 있게되는것이다.

Ⅲ.人間(인간), 그 永遠(영원)한 수수께끼
  實存哲學(실존철학)의 큰 흐름은 有神的(유신적)경향과 無神論的(무신론적)입장으로 대변될 수 있다. 유신론적 실존철학에 있어서의 人間探求(인간탐구)는 철저히 神(신)에게로 귀착된다. 인간의 고독한 실존에 대한 자각을 그들은 초월적 결핍(Transcendental Absence)이라고 부르며, 그 절대적 종말을 神(신)앞에 선 외로운 實存(실존)으로 파악한다. 반면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있어서는 神(신)의 존재를 거부하는데서 오는 허무를 결코 최종의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인간은 새롭게 소생할 수 있으며, 無(무)의 신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나 샤르트르는 이 존재의 초월적 度漢(도한)함을<텅 빔> (void)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의 텅 빔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감방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하는 현상적 세계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存在論的(존재론적) 실존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고 만나는 대상은 이미 그 자체로서 언제나 허무(Nihilation)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 현상의 궁극은 결국 無(무)라는 기원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運命的(운명적)경험이며, 신비이며, 묘사될 수 없는 <그무엇>이다. 禪宗(선종)에서 말하는 ‘父母(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의 내 存在(존재)’도 마찬가지의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특징적인 眞實(진실)로 부각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無常(무상), 즉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自我(자아)에 의하여 貫通(관통)되며 움직여지는 존재이다. 인간은 이 세계를 정류장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인간을 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지금 현재에 주어진 이 상황이외에 무엇인가 더욱 긍정적인 것이 있지 않게는 가하고 끊임없이 찾아 헤매이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우리는 날마다 포착하고 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全存在(전존재)를 성숙시켜 가고 있다.
 이런 입장에 서면 人類(인류)의 역사란 인간이 어떻게 주어진 현실을 인식했느냐하는 것과, 비록 이 세계가 반드시 바람직스러운 것은 아니라 초지라도 어떻게 하면서 초월적 경지로 향상되느냐하는 두 가지의 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세계는 결코 우리들에게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그 자체로서 긍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며,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우리의 경험이란 언제나 그 점은 우리의 경험이란 언제나 그 實存(실존)의 인식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헤겔의 명쾌한 지적처럼 <이미 인간의식 자체에 모순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存在(존재)가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實存哲學(실존철학)이나 中觀哲學(중관철학)에서 찾는 自我(자아)의 槪念(개념)은 결국 理性
(이성) 이전의 이성, 知的(지적)인 定形(정형)속에 포함될 수 없는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하려는 努力(노력)의 토대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귀결은 이 휴한한 인간존재가 어떻게 하여 그 자신을 불안과 고통과 슬픔과 참담함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자신의 근원을 회복하느냐 하는 점으로 일치시키고 있다. 현대의 인간은 이제 찾아야할 자신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無(무)와 空 (공)의 존재론은 이 인간근원에 대한 모색이며 동시에 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진실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수수께끼는 아직도 우리의 뇌리를 맴도는 과제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카라 (Samkara)는 이런 말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에 관계되지 않는 물음은 가치가 없다.’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물음이다. 비록 그 해답이 허상의 그림자에 불과할지라도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인간은 <그 다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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