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의 귀향이었다.
밤을 세워 차를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3년을 에돌아 달려가는 귀향길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만난다는, 자라온 세월이 묻어있는 고향집에 간다는 설레임이 지나쳐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두려움도 있었다. 3년의 세월이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세월의 흐름을 부모님 모습에서 봐야만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우리 진완이 맞나?”며 버선발로 달려나오시는 어머님을 껴안으며 고향집에서의 한가위 명절은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그리움으로 더 크게 다가왔던 부모님과의 만남이 감격스러웠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진리 속에 서 있음에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지난 7년간의 싸움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사상 초유의 마녀사냥으로 시작된 한총련 이적규정.

그것은 학생운동을 볼모로 분단 조국의 현실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테러였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우리 대학의 학문을 뿌리부터 억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는 부모, 자식간의 천륜도 보장될 수 없었고 개인의 꿈은 물론 목숨마저 안전할 수 없었다.

하기에 사회가 발전할수록, 민주주의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높아질수록 한총련 합법화는 그 잣대, 최우선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선배들이 종이 한 장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싸워온 덕분에, 반드시 진실은 가려지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싸워온 덕분에 오늘의 수배해제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쪽짜리 감격이었다. 마냥 헤헤 취해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도 쫓기고 있는 동료들이 많이 있고 갇힌 동료들도 있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국가보안법이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등·하교 하는 정상적인 일상을 찾아가는 나의 삶.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해야 할 몫이 더 많아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는 내 삶은 더욱 치열해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관심과 무관심을 떠나 동악학우라는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큰 버팀목이 되어온 동악 학우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진완 (사범대 국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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