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 나도. 액션 영화의 악당이 주인공을 사로잡아 놓고 모든 진실을 토로하는 것 말이야. 아주 비열한 목소리로 약을 올리듯이 얘기하지. 그런 영화를 보면 감독이 관객을 정말 우습게 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었어. 사실 그 장면이야말로 그 영화의 줄거리나 다름없잖아. 그러고 보니 너는 지금쯤 영화의 바로 그 장면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 프라다 안경을 낀 녀석과 열심히 속살거리며 말야.
너를 만나기 전에 나는 누나가 한번 매 봤으면 하고 노래를 불렀던 프라다가 뒤로 매는 가방의 한 종류라고 알고 있었어. 핸드백, 숄더백 하듯이 말야. 그 자식의 낮은 코에 얹을 수도 있는 프라다가 있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지. 지하상가의안경원에 진열된 사각의 뿔테를 보면서 나도 저거 쓰고 싶다, 했을 때 나는 사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너는 안경원에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아 끌고 나가면서 거리에서 파는 머리핀을 사 달라 했지. 너는 속눈썹이 너무 길어 안경을 쓸 수가 없다며. 나중에 그 안경테가 프라다라는 것과 그 가격이 라식 수술비와 맞먹는 다는걸 알고 나서 나는 혀를 끌끌 찼던가, 아니면 나를 끌고 나와 준 너에게 고마워했던가. 아니야. 어쩜 나는 불길한 미래를 만났을지도 몰라. 그래. 기분이 더러웠어. 네가 꼭 그 견고한 뿔테 속에 갇혀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네가 갇힌 그 안경 값을 이렇게 치뤄. 그 불란서 안경원 아저씨가 달가워할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늦진 않았겠지. 그 자식이 낀 안경은 뿔테가 아니라 은테였어. 아직 네가 그 안경테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겠지. 넌 그렇게 쉬운 애가 아니니까. 그래. 쉬운 애가 아니야.
네가 쉽게 내게 넘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모텔 노블의 동그란 침대에 누운 네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솔직히 우스웠어. 널 비웃으면서 널 안았지. 너를 향한 내 진심을 제발 알아 달라고 말이야. 제기랄, 나에게 진심이란 공룡알 화석 같은 것이야. 존재 여부도 모르는, 게다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데다가 벌써 몇 십억 년이 지나서 형체조차 불분명한 그런 것 말이야. 나도 화석처럼 너에게 남을까? 다만 존재했었다는 것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화석처럼? 모르겠어. 아아. 모르겠어.

*

당신은 오늘도 씻지 않은 채로 있다. 사타구니에 누런 얼룩을 만들고. 당신 몸 안의 어떤 호르몬이 아직도 당신의 수염을 자라게 하는지. 창백한 피부에 번져 있는 반점들과 가느다란 오라기만 남아 있는 흰 머리카락들, 침이 말라붙은 입술을 보자 구역질이 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꾹 참는다. 참아 내기 위해 다른 곳을 본다. 하필 그 곳엔 방금 전 배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참지 않는 대신 꽉 잡힌 팔에 힘을 주어 당신을 일으킨다. 에메랄드 색 핏줄이 불거진 손등만은 하얗고 보들하고 깨끗하다.
당신은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본다. 아침 드라마를 보고 홈쇼핑 채널을 본다. 홈쇼핑에선 갈비 세트를 팔지만 당신은 콩나물국에 찬밥 만 것을 우걱우걱 씹을 뿐이다. 욕심과 부러움과 좌절과 포기도 모른 채. 소변 줄을 통해 누런 액체를 흘리는 것만이 당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이다. 어쩌면 당신은 찻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소변통에 액체를 그득 채울 때마다 수확한 농부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거울 앞에 앉는다. 여느 때 같으면 톡톡 두드려서 흡수시켰을 파운데이션을 살살 펴 바른다. 당신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두 다리가 굳어 버린 뒤, 예민해진 청각은 스치는 듯한 소리에도 반응한다. 마치 세렝게티의 초식동물처럼 쫑긋한 귀모양. 당신의 귀가 밝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나는 방에 혼자 앉아서 맥주를 딸 때에도 조심스러웠다. 당신은 내 이름을 모르지만 당신의 우물거리는 듯한 소리만 들으면 나는 당신에게 달려가야 할 의무감을 느껴야 했다.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은 아닐 것이다. 세입자로서의 겉치레 예의일 뿐이다.
검정 마스카라를 짙게 바른다. 속눈썹이 긴 나는 언제나 속눈썹 화장에 공을 들인다. 그에게서 제일 먼저 들은 얘기도 속눈썹에 관한 것이다. 똑똑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럴 것이다. 그도 알고 있을까. 내가 캔을 쥔 그 손가락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그의 칭찬을 의식한 속눈썹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그와 내가 가까이 앉은 공원의 벤치에서였을 것이다. 첫 데이트의 기억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공원의 벤치처럼 남아 있다. 그와 내가 함께, 혹은 따로따로 걷다가 지루해 질쯤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기억에 머물러 쉬곤 했다. 처음 만난 우리들이 복잡한 거리에서 살짝살짝 어깨를 스치고 걷던 것이나, 차가운 커피를 한 캔 사서 나눠 마시던 것을 떠올리면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고는 했다. 그런 기억들 때문일 것이다. 아직 우리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은 청각뿐만 아니라 공기의 흐름에도 민감하다. 욕실과 내 방을 바쁘게 오가거나, 잰 손놀림으로 당신의 소변 줄을 갈아주고 있노라면 내 손을 보고 있는 당신의 무신경한 눈빛에도 어떤 초조함이 나타났다. 신속한 외출 준비를 마치고 여러 개의 열쇠가 달려 있는 열쇠고리를 딸랑거릴 때면 당신은 당신이 혼자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맞았다는 허탈감으로 사지를 쭉 늘어뜨리곤 했다. 코트를 걸치고 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당신을 두고 떠나는 게 나는 즐겁다. 일부러 문을 천천히 닫는다. 문을 반쯤 닫았을 때까지도 당신은 나를 보고 있다. 그 시선은 어디에 닿아 있는가. 검정 스타킹을 신은 다리, 불룩한 젖가슴, 어떤 곳이라도 상관은 없다. 당신의 호르몬은 이미 그 흐름을 멈춘 뒤일 테니까.
지하철을 타고 그의 병원으로 간다. 그는 개업의도 아닌 건만 나는 늘 그곳을 그의 병원이라고 한다. 화양리라는, 서울 시내의 지명치고는 다소 야한 그 곳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어디냐는 물음에도 늘 그 사람 병원이야, 라고 답한다. 정확히 2초 동안의 침묵에서 나는 그 애들의 부러움과 경멸을 한꺼번에 읽어 냈다.
화양리가 천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화냥과 비슷한 어감 때문이다. 화냥년이라는 말을 10년 전쯤에 한 번 들은 기억이 있다. 외가가 있는 부산에 가면 늘 엄마는 우리 남매를 이모 집에 맡겨 놓고 옛 친구들을 만나러 밤 외출을 하곤 했다. 그 날도 이모부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 우리를 밀어 넣고 택시를 잡으러 돌아서는 엄마에게 이모는 “화냥년”이라는 말로 이모부에 대한 민망함을 대신했다. 미처 이모의 그 말을 해석해 볼 시간도 없이 나와 내 동생은 손목을 아프게 잡힌 채 차에서 끌어내려졌고, 우리는 그날 밤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잠을 잤다.
화냥년이라는 말을 몰랐을 뿐더러 그날 밤의 호사에 취해 궁금해 할 여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도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의 죄책감과는 달리 나는 그 일로 아무런 상처도 아픈 기억도 가지지 않았지만 ‘화냥년’이라는 말만은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화양리에 그가 다니는 병원이 있다. 그 곳에 있는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부속병원의 전문의로 있는 그는 늘 화양리가 시끄럽고 번잡하다고 짜증을 내었다. 진하게 화장을 한 고등학생들과 담배를 피우며 어슬렁거리는 중년의 남자들과 섞이는 것이 싫다고. 대학 생활 6년을 포함해서 15년을 그 곳에서 지낸 그는 이 거리에서 반추할 더 이상의 추억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날 때에 늘 그 곳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시끄럽고 번잡한 곳만큼 존재를 숨기기에 적당한 곳도 없는 법이다. 그는 그 거리에 있을 때가 가장 자유로웠다.
그 거리에 있는 다섯 개의 모텔을 돌아가면서 들르다 보면 꼭 한 달이었다. 모텔‘정’으로 부터 시작해서 모텔 ‘노블’까지.
모텔 ‘노블’은 우리가 처음으로 몸을 섞은 곳이었다. ‘노블’은 최신식의 시설은 아니었지만 조용했고, 모텔로서는 가장 좋은 입지인 구석진 곳에 있었다. 우리는 사실 최신식의 시설이 필요치 않았다. 이만 오천 원의 대실 요금을 치르고 들어간 방에는 침대와 욕실만 있으면 되었다. 그가 오프인 날은 가끔 노블의 가장 조용한 방을 빌려 함께 잠을 잤다. 그런 날은 집에 두고 온 노인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그와 섹스를 할 때에는 되도록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노인을 생각하면 그를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구두 끝을 보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멀미가 날 것 같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어느 새 한강 다리다. 햇빛이 들어오는 전철 안에 앉아 있으니 졸음이 온다.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펴본다. 그의 손길과 입술에 지워질 화장이지만 허술하게 할 수 없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나올 그를 마주보며 자신 있게 웃어 주고 싶다. 그를 만난 지 1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거울을 자주 보게 되었다. 들 뜬 화장과 지저분해진 속눈썹 화장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그의 병원에 있는 눈이 작은 그 간호사가 생각났다. 그 병원의 규율대로 진한 화장을 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삶은 달걀을 까놓은 것처럼 희고 깨끗했다.
거울을 넣고 시계를 본다. 그 병원에서 가장 환자를 적게 보는 소아과의 전문의인 그는 지금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목젖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진료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가 꺼려하기도 했을 뿐더러, 나 역시 병원에 출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건 말건 그 방의 노인은 내게 병원 출입의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었다.
그를 처음 본 것도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였다.

*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젠지 넌 기억 못 할 거야. 넌 항상 날짜나 시간 같은 숫자는 어려워했으니까. 오죽했으면 내가 우리만의 달력을 만들어 기록했겠어. 우리가 만난 날을 적고 우리가 먹었던 음식, 내가 너에게 사주었던 귀걸이의 가격까지. 넌 치사하게 그런 곳에다 가계부까지 쓴 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너도 알다시피 모든 것을 확실히 기록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잖아. 그렇게 꼼꼼하면서 왜 그렇게 자주 지갑을 흘리고 다니냐고? 이 말을 하려고 그랬지? 나도 모르겠어. 너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정신이 없더라고.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 좋은 뜻은 아니니까. 너는 도화 살이 낀 게 분명해. 화냥기라고 하지 왜. 너는 예쁜 얼굴이 아닌데도 인기가 많았어. 여자애들은 너를 싫어했지. 눈초리를 파르르 떨면서 웃는 게 꼭 한련꽃처럼 예뻤어. 어떻게 생겼는지는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너의 눈웃음이 그 거만한 자식을 녹였겠지, 그렇지? 아니면 너의 그 나긋나긋한 몸으로? 씨발, 왜 자꾸 얘기가 다른 데로 새는 거야. 난 마지막으로 너와의 추억을 아름답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너를 만나면 난 지갑을 흘리고 안경갑을 잃어버리고 했지만 난 하나도 화가 나지 않았어. 네가 칠칠치 못하다고 혼내는 것도 난 좋았거든.
그래도 그 날은 많이 힘들었지? 작년 크리스마스 날 말이야. 모텔을 찾아가던 중이었지. 너를 집에 바래다주어야 했는데 그러기가 싫었어. 굉장히 피곤하다며 운을 띄웠지. 그래서? 후후. 너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인적이 없는 플랫폼에서 내게 키스했어. 그럼 우리 자고 갈까?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화양리로 갔어. 화양리엔 우리가 한 번 가본 모텔이 있었지. 너는 그 모텔의 욕실을 마음에 들어 했어. 바디 샴푸를 풀고 버튼을 누르면 거품이 만들어지는 욕조가 있었지. 거품을 가지고 고양이 새끼처럼 장난을 치는 모습, 굉장히 귀여웠는데.
그 날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욕조에 함께 들어가 거품 목욕을 할 수 있었을 거야.
567번 버스에 지갑을 놓고 내리지만 않았어도. 나는 손을 흔들며 버스를 쫓아갔지만 버스는 이미 속력을 낸 뒤였어. 너는 그 버스의 번호판을 다 외우고 있었지. 똑똑한 것.
난 빨리 지갑을 찾아야 했어. 모든 데이트 비용을 다 부담하는 내가 지갑이 없으면 너와 잘 수가 없잖아.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 노선을 앞질러 가자고 했지. 기사는 다행히 그 버스의 노선을 꿰고 있더라. 화양리에서 청담동을 거쳐 사당까지 가는 길을. 오 제발 청담동 즈음에서 버스를 잡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미터기를 보고 너는 앞을 보고 있었지. 기사도 그런 추격전이 흥미로운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어. 너도 불안하지만 재미있는 표정이었어. 그 버스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난 마침내 너와 그 짓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어 다녔지. 너도 한 밤의 추격전을 벌여 지갑을 찾은 게 뿌듯했는지 히히, 웃고 있었고. 차비를 아끼느라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탄 내게 서운한 기색도 없어 보였어.
우리가 내린 버스 정류장은 청담초등학교였지만 사방 어디에도 초등학교는 보이지 않았어.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부유한 느낌이 드는 옷가게들만이 즐비했지. 옷가게라고 하면 또 네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옷을 파는 곳을 옷가게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너는 곧 유리벽에 매달린 채로 불이 꺼진 쇼윈도의 옷이며, 구두를 보았지. 어두워서 빨간색인지 검은 색인지 구분도 할 수 없었지만 그 것들은 제마다 거만한 표정을 짓고 널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그것들을 보면서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리를 걸으면 뭐든지 구경하기 좋아하는 너 때문에 가는 길이 더뎠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너의 표정을 구경하는 게 난 더 재밌었어. 저거 예쁘다. 내가 입으면 더 예쁠 텐데. 저 코트는 보기엔 근사한데 여러 군데 받쳐 입긴 좀 그럴 거야, 그렇지? 올해는 레이어드 룩이 유행이라 더니 정말 그렇네. 하지만 나처럼 가슴이 큰 애가 저렇게 입으면 무지 뚱뚱해 보일 거야. 저 여자 좀 봐. 꼭 호텔 청소부 같은 옷을 입고 있네. 머릿수건만 하면 딱 이겠는걸. 딱, 이라고 말할 때 너는 손가락까지 퉁겼지. 너는 조금 우울해 보였지만 새의 부리 같은 네 입술은 명랑하게 지저귀었어.
하지만 그 날 불 꺼진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는 너는 아무 말이 없었지. 그 땐 춥고 지쳐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때 너는 조금 서글펐겠지. 어두운 가운데서도 마치 달빛을 받고 있는 듯 차가운 기품이 흐르는 그 것들을 너는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네가 매달려 있는 유리벽은 너를 밀어내려고만 하니 말이야.
나도 그때의 너처럼 슬플 때가 있었어. 너를 처음으로 안았을 때 느꼈던 후회는 사정의 쾌락보다 강해서 난 어쩔 줄을 몰랐어.
숙박료를 카드로 계산하고 명세서에 뭐라고 나올 것인가를 잠깐 생각하고 있을 때, 넌 벌써 아저씨가 주는 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지. 처음이라는 말과 달리 전혀 어색해 하지 않았어. 이 모텔 참 좋다, 그지? 웃기까지 하는 너를 보면서 나는 곧 너의 알몸을 안을 생각에 마주 보며 웃었어. 내 아랫도리는 점점 무거워졌고. 네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어. 티브이에서 본 것처럼 와인과 과일 바구니가 있으면 좋겠는데. 모텔에서 제공한 일회용 가운 을 입은 밑으로는 두 다리가 미끈했어. 하얀 몸에 내 손자국을 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 이렇게 아름다운 너를 두고 내 동정을 쑤셔 박은 내 첫 여자도 잠깐 생각났어. 맹세하건대 널 마지막 여자로 만들 생각이었어. 긴 속눈썹과 통통한 귓불, 토끼처럼 커다란 앞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섹스를 하는 동안 네 볼의 띤 홍조와는 달리 너는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어. 영화에서 봤는지 어쨌는지 소리도 낼 줄 알고. 아니 그건 연기 같지가 않았어. 씨발. 난 즐길 수가 없었어. 너를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내 사라졌고 나는 계속 할 수가 없었지. 알아? 그때 너의 표정이 어땠는지? 가뜩이나 풀이 죽은 내 뒷모습을 보고도 너는 날 격려해 줄 생각도 않고 일어나 욕실로 가 버렸지.
그쯤에서 그만 뒀어야 했는데. 네가 날 떠난 이유가 섹스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 말이야.
*

그의 섹스 취향은 특이한 편이 아니었다. 리드를 잘했고 적절한 배려도 알았다. 그의 취향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그만큼 신중했기 때문이었다. 내 몸은 다행히도 남자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몸이었고 그도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다. 그를 처음 받아들일 때에 나는 어렸지만 내 젊음을 무기로 삼을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어리다고 생각할까.
“난 어리지 않아요.”
“너 남자 친구도 있다면서?”
“헤어지면 되죠. 질투심 유발하려고 말했을 뿐이지, 심각한 사이는 아니에요.”
“난 네 어린 애인이랑 경쟁할 생각이 없어. 네 나이 땐 그 나이에 맞는 교제를 해야 한다고 본다. 좀 별난 데가 있구나. 나 같은 아저씨가 뭐가 볼 게 있다고.”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웃었다. 쉽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그의 웃음에는 날 귀엽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으므로 떼를 쓰고 싶어졌다.
“교제? 치, 웃겨. 선생님은 매일 애들만 대하다 보니 나도 꼬맹이로 보여요? 띠동갑 부부들도 잘만 산다던데. 오해는 마세요. 결혼하자는 게 아니니까. 난 겨우 선생님보다 11살 어리니까 잘 생각해 보라는 뜻이에요. 요샌 23살도 영계 축에나 들는지 모르지만요.”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잘 안다. 근데 나 네 생각만큼 그렇게 부자 아니야. 차도 처가에서 사준 거고 집도 공동 명의야. 것도 아까워서 장모님은 와이프 명의로 바꾸자고 야단이지만.”
“그래요? 그럼 선생님도 별 볼일 없이 의대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부잣집에 팔려 간 데릴사위구나. 그럼, 정말 내 생각만큼 부자도 아니고 우려먹을 것도 없겠네. 나, 가요”
“그런데 너 속눈썹이 정말 길구나”
눈길도 주지 않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다정해 보였다. 프라다 은테 안에 감춰진 쳐진 눈초리가 조금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제 그를 잡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아내와의 잠자리에 만족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난 처음인 양 그의 남성성을 부추겼다. 그 날 밤 들어갔던 모텔은 가장 구석에 있던 노블이었다. 난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남자 친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남자 친구보다 집에 있는 노인 생각이 더 났다. 그가 들어오려 할 때에 그 노인의 시든 성기가 떠올랐고 몸이 굳어지며 그를 거부했다. 그는 내 등을 오래오래 쓸어 주었다.
그가 나온다. 고동색 캐시미어 재킷과 청색 니트 조끼의 색상이 묘하게 어울린다. 그의 아내는 부유하게 자란 만큼의 패션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낮잠을 잤는지 뒷머리가 눌려 있어 납작한 뒤통수가 더 납작해 보인다. 늘 그랬듯이 그의 머리를 무릎에 누이고 매만져 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모텔의 침대에 몸을 부리기 전까지는 내 손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너털웃음을 웃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의사답게 예민했고 어린 애인에게는 권위적이었다.
“밥은 먹었니?”
“아니요. 일어나서 물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왜? 나랑 같이 먹으려고? 먼저 먹으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 화장실 시중을 드느라. 도무지 식욕이 안 났어요.”
“의사랑 간호사들은 너보다 더한 것 많이 보는 데도 다들 점심시간만 되면 밥 잘 먹는다. 나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잔인해. 아무리 끔찍한 기억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더라. 인턴 시절 응급실에 있을 때 쌍둥이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날 마침 치프가 오프라서 응급실엔 나밖에 없었어. 산부인과 수간호사를 호출해서 둘이 애를 받는데 몇 시간을 싸움을 했는지 모를 거야. 가운은 양수와 피 범벅이고. 그 뒤론 의사 못할 것 같더라고. 밥도 못 먹을 거 같고.”
그에게는 끔찍했던 기억이 산모와 산모 가족들에게는 환희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구에나 고통스러운 상황이란 게 있을까. 어느 한 명이 고통스러우면 다른 한 명은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무슨 생각하니?”
그는 함께 있을 때 그에게 집중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대체로 그런 그에게 맞춰 주는 편이지만 나를 덮쳐 오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다. 나도 그런 생각이 반갑지는 않다.
그의 집요함에 피로를 느끼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나처럼 어린 애인은 언제나 발랄하고 청량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더욱 피로해진다.
가장 최근에 만났던 남자친구는 나를 더욱 명랑해지게 했었다. 유치하고 어렸지만 내 쪽에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후미진 곳에 있던 모텔 ‘노블’을 찾아낸 것도 그 애였다. 그 애의 생각을 좀 더 하고 싶다. 오늘은 노블에 갈 차례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나를 그를 그 곳으로 유도하기로 한다. 그 곳에 가면 그 애가 좀 더 또렷하게 기억 날 것 만 같다.
방금 전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참 잔인하다. 게다가 무신경하며 뻔뻔하기까지 하다.

방을 들어서며 눅지근한 냄새를 맡는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니 이 방에도 몇 십 분전에 손님이 들었을 것이다. 상관없다. 그와 나는 모텔 방의 공기가 낯설지 않다. 노블의 동그란 침대며 화장대도 이젠 친근하기까지 하다. 그를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취향의 가구를 놓고 깨끗하게 세탁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싸구려 로션도, 다른 여자의 머리칼이 엉켜있는 머리빗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 만큼의 부담도 주지 않는 무게가 없는 존재였고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샤워도 하지 않고 누우려는 그를 본다. 나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의식해서이다. 그의 탄탄한 엉덩이를 보자 집에 있는 노인의 앙상하게 마른 몸이 떠오른다. 반점들이 번져 있는 엉덩이. 버티지도 디디지도 못하고 그저 달려 있기만 한 두 다리.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다리뿐만이 아니다. 호스를 달고 있는 다리 사이의 조그만 살덩이는 기저귀를 갈 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그 것이 정말 그의 것처럼 힘차게 일어나던 때가 있기는 있었는지. 아직 아이였던 어린 손녀의 몸을 더듬을 때도 당신의 그것은 발기해 있었는지. 확인해 볼 순 없었지만 당신은 어느 때보다 흥분해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나가려는 나를 붙잡아 비단 보료 위에 다시 눕히는 당신의 손아귀 힘은 너무나 억세어서 인자한 할아버지의 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내 몸을 파고든다. 이미 많은 기억을 떠올린 나는 그의 몸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 어깨를 잡고 다시 눕히려는 그의 손짓이 그 때 그 손만큼이나 급하고 절박하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언제부터였을까. 집을 나오기 위해 사귀었던 남자들과의 습관적이고 감흥 없었던 행위를 정말 즐겨 보자고 결심했다. 그 즈음 만나고 있던 남자는 너무 어렸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남자와 헤어진 이유는 형편없는 테크닉 때문만은 아니었다.

*

그 날 청담동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너는 어디로 갔니? 집으로 가지 않았다는 건 알아. 그 밤에 청담동에서 너희 집까지는 택시 요금이 엄청 나올 테니까. 그 시간엔 차도 잡히지 않았고 말이야. 나는 우리의 화양리행을 위해서 택시를 잡고 있었지. 강남 저 쪽에서부터 술에 취해 실려 오는 승객들 때문에 좀처럼 빈 차가 없더군. 모처럼 합승을 하려고 차를 세워도 목적지를 안 차들은 그냥 떠나 버렸어. 다리만 건너면 도착하는 화양리로 가는 손님은 그리 끌리지 않았을 거야. 그날따라 너는 콜택시를 부를 생각도, 따블을 외칠 생각도 못하는 나의 주변머리를 못마땅해 하지 않고 쇼윈도만 들여다보고 있었지. 2차선 도로의 중앙선까지 나가 택시를 잡고 있는 내게 주의도 주지 않고. 추워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 날은 꽤 추웠고 너는 짧은치마를 입고 있었으니까.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난 네가 긴 다리를 드러낸 모습을 보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곤 했어. 육교 위를 올라가는 네 모습을 밑에서 보면서 침을 삼킨 적도 있어. 네 다리는 네 몸의 가장 연약하면서도 우아한 부분이야. 그래도 넌 나를 만나면 걷기만 했지. 택시를 타자고 조르지도 않았어.
가까스로 면목동까지 간다는 아저씨와 합승을 하려 했을 땐 넌 사라져 버리고 없었어. 네가 화장실을 갔나 하고 그 거리를 뒤졌지만 그 거리에 있는 건물들 중 너에게 화장실을 허락하는 곳은 없었어.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찾을 수가 없었지. 파출소에 가서 졸고 있던 경찰 아저씨를 깨웠지. 순찰차를 타고 그 거리를 왕복할 즈음엔 이미 날이 밝아 오고 있었어.
“여자 친구와 싸우지는 않았어요? 보다시피 이 쪽 지역에 무인 카메라가 골목마다 설치 된 후에는 납치 사건이고 뭐고 없었어요. 요즘엔 범죄를 저지르려도 이, 정보가 빨라야 하거든. 제 발로 가지 않았다면야 사고가 났다면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데 아, 이 동네가 얼마나 조용해요? 그러지 말고 여자 친구네 집에 가서 한번 두드려 봐요. 집에서 얌전히 자고 있을 테니.”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러길 바라고 있었지.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걸어 나올 때 네가 들여다보던 쇼윈도를 나도 들여다보았어. 꼭 네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았거든. 유리 안은 잠잠했고 구두며 가방은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있었어.
지금은 너 그 유리 안에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니? 네가 프라다 매장 안이 아니라 그 자식의 안경테 안에 들어가 있을 것만 같아. 그 자식의 안경알도 꼭 그 것과 같았어. 차갑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그랬지.
너는 거기에 갇히면 안돼. 내가 꺼내 줄게. 나 지금 너에게로 가고 있어. 1년이 지났지만 그 모텔은 아직 거기에 있을 테고 너도 그 자식의 안경테에 갇힌 채로 그 곳에 있겠지. 아직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


그가 치른 요금은 대실 요금이었지만 난 좀 더 여기에 있기로 한다. 할아버지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시신은 화장하기로 한다. 당신의 뼈와 살이 재가 되어야만 난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소리 내어 말해 본다. 어쩌면 그를 만나고 사랑하면서부터 잊었을 지도 모른다. 그와 한 몸이 되고 예전과 다른 희열을 알게 되면서부터. 어떤 상처는 가끔, 자고 일어나 보면 아물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흉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때도 있다. 내가 남긴 상처를 헤집고 있을 그 남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엘리베이터의 종소리가 울렸다. 발자국은 남자의 것 하나 이지만. 모텔에는 가끔 혼자 오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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