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김상일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신라 경덕왕 때 진주의 불교 신도 수십 인이 극락에 가고자 하는 뜻으로 진주 경내에 미타사를 새로 짓고 1만 일의 염불 기도를 맹세하였다.

그때 귀진(貴珍)의 계집종 욱면(郁面)도 귀진을 따라가 절 마당 한복판에서 스님을 따라 염불을 했다. 귀진은 욱면이 제 직분을 모르는 것을 미워하여 매일 곡식 2섬씩을 주고 하룻저녁에 다 찧으라고 했다. 

욱면은 초저녁에 이를 다 찧어버리고 밤낮 쉬지 않고 염불을 했다. 그는 절 마당 좌우에 말뚝을 세우고 노끈으로 두 손바닥을 꿰어 말뚝과 연결하고 이를 좌우에서 흔들게 하여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몸을 다잡으며 정진을 한다. 

이때 하늘에서 “욱면 낭자는 불당 안으로 들어와 염불하라”하였다. 절의 대중들이 이 말을 듣고 욱면을 불당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정해진 예에 따라 기도에 정진하도록 했다. 얼마 뒤 하늘의 음악이 서쪽에서 들려오고 욱면은 집 천장을 뚫고 솟아나서 서쪽 교외로 나가 본래의 몸을 버리고 부처님 몸으로 변해 연화대에 앉아 대광명을 내뿜으며 떠나가니 음악 소리가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귀진은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짓고, 전토와 작인을 바쳤다고 한다. 이 설화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감통(感通)’ 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설화적 문맥을 좀 더 풀어보면, 신라 시대 종의 계급에 위치해 있던 욱면이 성불해서 극락에 가는 일은 일반인에 비하면 이중 삼중의 장애가 있었다. 그는 종이란 신분적 한계 때문에 불당 안에 들어가 염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인의 정도에 지나친 요구에도 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극락을 향한 욱면의 서원은 이런 부담과 장애 앞에서도 몸을 버리면서까지 스스로를 격려하며 한데인 마당 한 가운데서 염불 수행을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뜻을 알아들은 대중들은 이러한 욱면의 단단한 신앙심과 정진을 이해하고 불당의 문턱을 넘도록 한다. 그리고 욱면은 정진을 계속해 결국 집 천장을 뚫고 성불하여 극락에 오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지성이면 감천이란 성어에 가두어 이해하는 데 그쳐야 할까!

이제 우리나라는 1인당 연 소득이 3만 달러가 넘고 유엔(UN)이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문득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자립해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의 적지 않은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는 과연 선진 문명사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지금의 우리 사회를 태곳적 신라 사회와 비교할 수 있느냐고 허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나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짝을 맺어 자손을 기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과연 이러한 삶의 일반적인 궤도를 따라가는 데 공평하고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문명사회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 욱면을 부처님 세계로 안내하고 그들 정도의 수준으로 오르도록 도왔던 것과 같은 진정한 스승과 동료들은 있는가? 상위 기득권자로서 늦게나마 자신의 불합리한 처사를 근본적으로 참회하고 삶의 양식을 혁신한 귀진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아 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이 과연 욱면처럼 불리한 처지를 스스로 개선하고 자립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기는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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