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경제심리 자극하는 시기상조

화폐단위 변경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지금 쓰는 화폐를 다른 돈으로 대체하자는 것인데 주안점은 지금 단위가 높기 때문에 0을 한 세 개 쯤 떨어버린 새로운 단위를 쓰자는 것이다. 새 돈의 단위를 환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천원짜리 물건 값은 변경 후 1환이 된다. 일부에서는 유로화로 화폐를 변경한 유럽의 예를 들면서 화폐단위 변경이 선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가 될 것 없는 기술적인 일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

유로화로의 변경은 경제통합이라는 거대한 목표달성을 위해 이루어진 일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화폐단위 변경이 아니라 자국통화를 포기하고 새로운 공통통화를 채택한 통화통합이었다. 역사적으로 화폐단위를 크게 낮추는 경우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은 나라에서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물가안정이라는 매우 일반적이고 중요한 거시정책의 목표달성에 실패한 나라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근대사에서 통화단위 변경의 원조는 1 차 대전 후 독일이다. 당시 패전 이후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이를 완화하려는 의도로 화폐발행이 급증했다. 당연히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화폐발행과 물가상승의 악순환이 거듭되며 소위 극도의 물가상승 (hyper-inflation)이 발생했다. 일주일 사이의 물가상승률이 300%에 이르는 적도 있었다. 기존 화폐의 가치가 급락한다. 가치가 떨어진 화폐가 부엌에서 불쏘시개로 쓰였고 또는 아이들이 돈 다발을 레고 블록처럼 쌓으며 노는 그 당시의 사진들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안정화 조치의 일환으로 화폐단위 절하가 시행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화폐단위 절하가 여기저기에서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는데 물가안정에 실패하여 높은 인플레이션을 주기적으로 겪어온 중남미국가들이 단골 고객이었다. 물론 근래 우리의 물가사정은 상당히 안정된 편이지만 길게 보면 물가가 크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1973년을 기준으로 보자. 경제규모는 물가상승효과를 제외한 실질 국내총생산은 약 35배 커졌다. 물가는 소비자물가기준으로는 약 11배, GDP디플레이터 기준으로는 약 1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미국과 일본의 물가 상승률이 각각 약 3 ~4 배, 2 ~ 3배에 그친 것을 비교하면 상당한 물가상승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가상승에 이런 차이가 있으니 상대적 화폐가치, 즉 원화의 교환비율이 예전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최근 추정에 따르면 화폐단위 변경은 2조원 이상의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고 한다. 더구나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관련 논의는 오해와 불안감을 키울 우려도 많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1962년의 화폐개혁은 그 목적이 장롱에 감추어진 돈을 강제로 끌어내어 산업화 자금으로 쓰겠다는 취지로 행해졌다. 철저히 비밀리 추진되었고,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일어났더니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엄청나게 충격이 큰 깜짝쇼였다.

요즈음 단위변경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고 교환에 따른 제약이 없을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그 과정이 정치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해괴한 일이 벌어질는 지 장담할 수 없다.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벌써 일부에서는 금괴, 외화 사재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심리로 경제가 어려운 때 이런 논의는 불씨에 기름 붇는 격이다. 급한 일이 아니며 특히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면서까지 당장 밀어붙여야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허 찬 국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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