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2008).(출처: 와인스틴컴퍼니, 미라지엔터프라이즈)

 사랑과 부끄러움은 하나의 동일한 감정이 될 수 있을까. 혹은 한 인간이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존엄성은 무엇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1958년 서독 노이슈타트, 열다섯 소년 마이클 베르크는 성홍열에 걸려 하굣길 거리에서 구토를 하던 도중 우연히 낯선 여인 한나 슈미츠를 만나도움을 받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소년은 여자의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되고, 둘의 관계는 일종의 금지된 사랑, 비밀스럽고도 격정적인 관능으로 발전한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이들의 사랑 사이에 ‘책 읽기’라는 행위가 끼어든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 다음에 둘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교환가치가 된다. 하지만 둘의 불안한 사랑은 예정된 수순인 것처럼, 한나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이클을 떠나 사라진다. 소년은 이유 모를 배신과 실연에 아파하지만,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다. 그리고 학교 세미나 수업의 일부로 참관하게 된 법정에서 한나 슈미츠와 우연히 다시 마주한다. 그녀는 나치정권의 친위대 교도관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을 했던 부역죄로 재판에 선 상태였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무거운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문제와 ‘독일의 죄의식’이라고 불리는 전후 세대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적인 딜레마를 사랑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다룬다. 겉으론 아름다운 여인였던 한나 슈미츠는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책임과 결과에 무지했던 수동적인 독일의 전쟁세대를 나타낸다. 자신이 수용소의 친위대 감시원으로서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목숨이 좌지우지됐던 것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사실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였던 것이 결정적으로 책임적 사고능력의 결여를 가져왔다. 마치 ‘한나슈미츠’라는 이름이 유명한 독일의 정치 철학가 한나 아렌트와 그녀가 지적했던 ‘악의 평범성 이론’을 떠오르게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스스로 사고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깊게 고찰하지 못했던 능력의 결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이전에 독일을 몇 주가량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특히 뮌헨에 있었던 나치 기록박물관이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기념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었다. 그것은 일종의 복합적인 감정이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어떠한 것이 ‘악’이고 ‘선’인지 구분을 지을 수 있게 됐다고 자신하며, 전범들은 시대적인 윤리라는 미명하에 정의의 집 앞에서 자신들의 종말을 마주했다. 하지만 과연 나라고 해서 크게 달랐을까 하는 근원적 의문이 들었다. 만약 나 역시 격정적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순종적인 시민 중 하나에 불과했다면, 혹은 몇몇 전범들처럼 죽기 전까지 반성하지 않았다면 하고 상상을 해 보니 몸이 얼어붙는 것과 같은 서늘한 기분이 들곤 했다. 비슷한 예로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징병된 군인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부대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서 포로를 처형하고는 했다며 아픈 기억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기 아버지 세대의 잘못에 대한 죄의식 때문인지 그의 많은 소설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바른 역사’를 전하고,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도록 말이다.

 분명 이 세상에 양면성을 가지지 않은 확고한 진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 역시 없다. 영화 속 로맨스와 독일의 역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뛰어넘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혹시 부끄러움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양심, 그리고 포기를 모르는 치유적 사랑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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