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원 다르마칼리지 교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독서의 소멸 시대를 살고 있다.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 중 상당수는 독서에 대한 고통을 호소한다. 책을 읽고 싶지 않고,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토로 못지않게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한쪽에서는 독서가 고통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의미 있는 교양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아파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생의 모든 시간을 다 쏟아도 인류의 창작 아카이브가 담긴 거대한 도서관의 한 코너도 제대로 익히기 어려운 까닭이며, 사람들이 가진 취향이 제각기 다르고 다양하며 이 다채로움이 인생의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상상해보라. 힙합과 B급 소설에 대한 컬트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농업 기술 아카이브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이며,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의 연속이 될 것이다.
 

 이 난처한 질문을 접할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리스트를 가질 것’! 인류의 문화라는 것이 주고받음의 의미 있는 연속이기에 먼저 읽고 본 사람들이 작성한 리스트의 도움을 받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곤란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빈 장바구니를 들고 재래시장을 걸어가는 사람이 느끼는 난감함처럼 이쪽으로 오라고 나를 부르는 리스트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영화 100선, 꼭 읽어야 할 철학 서적 108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가봐야 할 로맨틱한 장소 50곳 등과 같은 심플한 리스트를 비롯해 죽기 전에 꼭 읽고 듣고 보아야 할 명작과 음반, 영화 1001편을 소개하고 있는 각목처럼 두터운 리스트까지.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헤라자데에게 1001일 동안 빈둥거리며 일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샤리아 왕과 같은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리스트를 선별하는 좋은 방법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시간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다. 다양한 리스트 중에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는 목록이 어느 정도는 담겨 있는 리스트가 첫 시작으로는 무난하다.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의 취향이 나의 경험과 어느 정도는 겹치고 그것이 신뢰할 만 하다고 판단이 들면 그 다음 작업을 시작하면 된다.

 리스트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 것!’ 리스트는 단순한 목록일 뿐 반드시 경험해야 할 인생의 과정이 아니다. 작성자의 취향을 참조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아니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동반자정도로 여기는 편이 좋다. 그는 먼저 이 길을 가본 가이드이자 동료일 뿐이지 내 경험의 주인공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성과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을 비교하며, 때론 대결하며, 리스트에 점수를 매기고, 의미 없는 것을 지워가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새로운 목록을 삽입한다. 더 좋은 것은 자신만의 언어로 리뷰를 적어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리스트에는 창작물을 선별한 이유나 의미 등이 적혀 있기 마련이다. 다른 이유와 취향을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질 수 있다면 그 리스트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100편의 영화 목록이 담긴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자기만의 리스트로 만들어 내면 이 목록을 100편보다 줄어들 수도 있고, 이것보다 늘어날 수도 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의 결과, 자기만의 리스트가 만들어 진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것은 하나의 리스트가 아니라 타인의 취향과 즐겁게 대화하고 흥미롭게 경쟁할 수 있는 나의 교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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