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정(영문4) 作

정해정(영문4)
라캉의 실재계 논의를 통해 바라본 탈구조주의적 주체형성에 대한 소론

-실재계의 가능성에 대하여 

서론

정신분석학의 임상외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가장 큰 기여는, 인간정신의 구성요소 중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찾아냈다는데 있다.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한 좀 더 설득력 있는 분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최초의 연구자는 프로이드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최초의 발견자가 언제나 겪을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존재했다. 자크 라캉은 프로이드의 부족한 연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초한 사람이며, 우리가 정신분석학을 연구할 때 그를 참조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며, 아마도 가장 정확한 방법이 될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드가 발견한 ‘무의식’을 언어와 결합시킴으로써 보다 선명히 우리의 눈에 보여지도록 도식화하였다. 더불어 프로이드의 한계로 여겨지는 부분들을 수정하여 정신분석학을 완전한 학문의 한 분야로 정초하였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은 너무나도 구조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 안에서의 예외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 역시 그의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그들의 무의식 역시 언어에 의해 지배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적 이론을 비판할 수 있는 길-유일한 것처럼 보이는-은 다른 구조주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생활세계 속에서 찾아진다. 즉, 그의 이론과 어긋나는 현상이 발견될 즉시 이론 자체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라캉의 주체 분석 속에서는 어떤 부족함이 느껴진다.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 구조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반드시 선천적이길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과 같은 그런 것이라는 말에는 절대 수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라캉에 의해서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너의 환상이다. 너는 그림 퍼즐에 한 조각일 뿐이다. 너를 움직이는 것은 상징적 질서라는 빈 칸이다. 너의 그런 아름다운 환상조차 구조가 만들어 준 것이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조의 왜곡 혹은 공백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위에서 설명한 라캉의 구조 중 한 부분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한 부분은 아마도 정신분석학내에서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논의가 전무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거의 전적으로 개별인간에 대한 탐구에만 착목한다. 인간에게 있어 사회적 관계가 단지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정신분석학 내에서도 그 부분은 발견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라캉의 주체를 설명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계’ 중 실재계에 대하여 탐구해보고자 한다. 특히, 실재계가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 안에서 정신분석학에서의 탈구조주의적 주체형성에 대한 모델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라캉의 새장에 갇혀버린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해주고 한다. 그 새장의 열쇠는 라캉에게서 찾아진다.

 

1.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은 자신의 3자 구조의 변환이 인간의 모든 계층, 모든 사회 및 문화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를 기대했다. 더욱이 때로는 이들 3계가 인간의 정박지를 넘어서서 아주 거대한 우주론적 비유 속에서 서로 싸우는 원칙이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라캉의 오만한 기획은 성공 하였다. 최소한 아직까진 실패했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인간 세계의 모든 주체와 대상들은 이 3자 구조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대답이 아닐 것이다. 이 3자 구조를 알아보는 것은 라캉에게 있어 주체는 어떤 것인지를 전적으로 아는 길이 될 것이다.

상상계

라캉은 상상계를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에 비유한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물론 비유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주위의 모든 것들을 보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이상적 자아를 형성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인간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관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일성을 갖지 못해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러한 아이의 가정은 오인에 의한 것이며, 상상계 속에서 주체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상상계 속에서의 이상적 자아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바뀌고 이 때, 우리의 구조주의적 주체는 형성된다.

상징계

상징계로 들어서면서부터 인간은 주체화 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게 되는 계기는 아이가 상징적 질서에 억압되면서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본격적으로 주체화의 길로 들어선다. 주체는 그 형성과정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상징적 질서에 의해 주체화되는 과정이며, 결코 스스로의 의지는 작용할 수 없다. 아버지의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주체가 스스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기, 상징적 아버지의 관계의 삼각형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함에 기인한다.

라캉에 의하면 이러한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억압 또는 배제되는 과정은 전적으로 무의식의 영역이다. 즉,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의식의 영역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라캉은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욕망이 ‘언어와 같은 형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자신의 의도 그대로를 기표로 전달할 수 없듯이, 우리의 욕망 역시 그 모습 그대로 타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 여기서 두 번째 의미가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가 언어라는 ‘대상’을 통해 구조화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을 채우려함 있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왜곡될 수밖에 된다.

실재계

정신분석학 연구에 있어 가장 미진한 부분은 실재계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특히나 라캉의 연구가들은 주체의 형성과 실재계의 역할의 연관성에 대해 간과하는 경향이 많다.

본연의 자연-인간과는 무관한-이 실재계이다. 인간에게 실재계는 두려움의 대상이며, 정복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대부분의 실재계를 상징계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인간이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함에 따라,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함에 따라 언어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은 실재계가 남아있게 되었다.

라캉은 위의 세 가지 ‘계’가 상이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작용된다고 말한다. 이 3자 구조에서, 주체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철학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상상계에서의 주체는 철저히 주관적이라는 면에서 근대의 관념론철학에서의 주체와 많이 닮아있다. 또한 상징계 속에서의 주체는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주체화과정을 통한 주체와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주의가 현대철학의 흐름에서 중심에 위치함에 따라 라캉이 말한 이 세 가지 계 중 ‘상징계’에서의 주체가 강조된다는 것이다. 물론 구조주의가 현대 철학에 중심에 자리 잡게 된 데에는 라캉의 주체에 대한 이론이 한 중추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우리는 라캉에게 막연히 물을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은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결국 당신의 이론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는 주체로서의 개인들은 ‘바라보는 주체’가 아닌 ‘보여 지는 주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 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2.주체의 위치 변동

라캉은 보여 지는 주체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의 실천적 측면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이 이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체는 자유로울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는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보여 지는 주체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여 지는 주체’에 대한 그의 이론은 계몽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라캉의 이론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주체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은 이제 실재계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라캉의 이론을 새롭게 바라본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예보 지젝(Slavoj Žižek)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지젝은 기존의 라캉주의자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지젝은 라캉을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오히려 라캉을 독일의 근대 철학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더불어 데리다 등의 해체주의 철학자와 구조주의자들이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들을 곡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라캉에 대해 오해’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

실재계는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우리는 위에서 잠시 언급된 실재계에 관하여 지젝의 말을 통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주체가 어떻게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지를 설명할 근거를 얻게 될 것이다.

지젝은 기존의 라캉주의자들과는 달리 주체의 위치를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둔다. 즉, 인간이 같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 다르게 활동하는 이유는 상징계 속으로 때때로 침입하는 실재계 때문이다.

실재계는 변증법의 활동무대이다. 변증법적 무대로서의 실재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몇 가지 예를 통해 확인된다.

“스미스는 유령의 존재를 믿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들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중략>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걸 갖췄다. 그 한 가지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신이 실재계이다. 실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들 주위의 상징들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적인 효과를 지닌다. 이는 상징계에서는 절대 일치할 수 없는 대립하는 두 항이 실재계 안에서는 일치함을 통해 드러난다.

지젝은 변증법을 정(正)과 반(反)의 조화를 통해 나타나는 합(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부정의 부정’은 절대로 적대를 폐지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正)’의 완전한 동일시를 이룰 수 없는 내재적 한계를 반(反)을 통해 최소한의 일관성을 취하려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합(合)이 된다. 북한의 불온 선전물은 남한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상 그것은 남한 국민들의 동일성을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상징계 속에서의 ‘남근’과 실재계에서의 ‘실재’는 정확히 일치한다. 라캉은 남근이 ‘부재의 장소’라고 말한다. 그것 자체는 결핍되어 있지만, 그것에 의해 상징계는 질서 지워지는 효과를 지닌다. 상징계를 질서 짓는 남근이 실재계에 속한다면, 상징계와 실재계는 단순히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즉, 상징계는 스스로를 가능케 해주는 도구인 ‘언어’의 한계에 의해 실재계를 완전히 뒤덮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여분의 실재계를 남겨둘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주체와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개인의 주체화 과정은 상징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숙지하고 있다. 그리고 주체는 상징적 질서라는 대타자에 따라서 행동한다. 이 대타자는 때로는 실체적 모습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단지 대리표상일 뿐, 재현이 아닌 대타자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남근’은 실재계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인간을 주체화하는 상징계의 한 가운데에는 실재계가 존재하고, 주체화의 과정의 중요한 역할을 실재계가 담당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주체는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상징계와 실재계의 중간지점에 존재하는 주체

지젝은 근대적 시민주체의 형성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적 회의의 방법을 빌려온다. 즉, 자연에 의해 속박된 인간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으로의 전화 사이에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존재한다. 그 매개자는 데카르트의 방법에서 찾아지는데, 지젝의 코기토를 바라보는 방식은 기존의 입장과는 다르다. 지젝은 코기토를 통해 나타난 결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철회해가며, 결국에는 코기토만을 남긴 데카르트의 방법을 주목한다. 코기토는 모든 것의 부정의 공간이다. 이 부정의 공간을 거쳐 인간은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게 된다. 즉,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감각적인 모든 것을 지움으로써 자연에 대해 부정한다. 이제 코기토 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이 문화의 모태가 되지만, 자신의 본래의 형식을 부정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사라지게 된다. 이 ‘사라지는 매개자’는 텅 빈 공간이다. 이제 코기토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

지젝은 이 사라진 부분에 주체가 위치한다고 본다. “주체는 공백이다.”

3.실제계의 가능성

실재계에 대한 지젝의 연구는 탁월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정신분석가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만을 바라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개별자는 사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의 개별자가 사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와 비교 될 수 있는 다른 개별자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주관적 실재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도처에는 실재계가 존재한다. 실재계를 좀 더 면밀히 고찰해보면, 두 종류의 구분이 가능하다. 하나는 지금까지 알아본 일반적 형식의 ‘실재계’이다. 즉, 인간 일반에게 적용되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 침범할 경우, 상징계속으로 들어오고 마는 그러한 실재계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의 주체에게는 실재계가 아니지만, 다른 주체에게는 실재계인 그러한 상호-관계적 실재계이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실재계를 주관적 실재계라 부르겠다.

이 주관적실재계는 상상계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상상계의 경우, 오인의 원리가 작동하는 반면, 주관적 실재계는 그 대상에 대한 완벽한 무지에서 출현한다. 여기에서 어떠한 가정이나 오인도 작동하지 않는다. 주관적 실재계는 주체가 이미 상상계에서 상징계를 거친 후이기에 가능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모르면 잠자코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트겐슈타인이 “모르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실재계’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언어로 쓰여 있는 편지의 경우, 그 편지는 우리에게 실재계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경우 상징계를 거친 개인에게 적용된다. 즉, 스스로가 보여짐을 인지하고 있는 주체를 말한다- 속한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편지는 이미 상징계에 들어와 있는 대상이다. 물론,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도 그것이 편지라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갖고 있는 상징 중 분명히 하나의 상징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주관적 실재계’는 어떠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이는 권력의 문제와 연관되어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있어 자본가에게는 ‘상징계’에 속하는 회사 자본의 흐름이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주관적 실재계’에 해당된다. 즉, 이 ‘주관적 실재계’는 집단과 집단간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에 역학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다른 집단에서는 결코 취할 수 없는 ‘상징’을 갖는데 기인한다. 이들의 분리는 사회적 관계에 기인한다. 즉,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적, 정신적 대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상징’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집단이 한 대상에 대해 상징을 가질 때, 이 때 그들이 갖게 되는 상징은 차연에 의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두 집단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상징을 가짐으로써 분쟁이 발생한다. 이 상징이 양립할 수 없을 경우, 두 집단 간에는 적대가 발생한다.

‘주관적 실재계’는 인간들 사이에 상징을 취함에 있어 시간적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

주관적 상징계

‘주관적 실재계’ 속에서 우리는 원하는 대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집단 간의 관계를 말할 뿐, 개별인간이 어떻게 타자와는 독립된 주체로서 존재하는지에 대한 해명이 되지는 못한다.

‘주관적 실재계’를 바라봄에 있어 우리는 논리적으로 또 하나의 개념을 추측할 수 있고, 요청하게 된다. 우리가 얻고자 했던 대답은 이제 최소한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실재계와 구별되는 ‘주관적 실재계’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주관적 실재계가 집단과 집단 간의 영역이라면, 다른 형태의 관계, 즉, 집단과 개인의 문제도 고찰해 볼 수 있음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한 모두에게 상징계인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라캉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정신병자(psychosis) 그 예이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상징적 질서에서 배제됨으로써 현실적 세계(상징계)는 그에게는 실재계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이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의 개인을 제외한 모두에게 실재계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를 ‘주관적 상징계’라 부르겠다.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상징은 모든 개인에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 합쳐진 것이건, 아니면, 전적으로 그 개인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건 우리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 독특한 상징을 갖는다. 물론, 두 사람의 취향이 동일한 순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상징을 갖게 되는 데에는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두 명의 서로 다른 개인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 같은 이유일 수 없다. 그들의 행동의 의미는 그들이 살아온 환경,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그들을 지배하는 특정한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모델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대답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결정하는 것은 타자들이 갖지 못하는 개인만의 상징에 의한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우리가 다룬 것들을 정리해 보면, 먼저 우리는 주체철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체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한 정신분석학에서 주체를 설명하는 주요 개념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에서의 구조적 주체를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위치시키려는 지젝의 연구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에서의 한계 -주체의 문제를 개인에게서만 보려는-를 벗어나 정신분석학의 실재계와 사회적 관계들의 연관 속에서 자유로이 사고하고 활동하는 주체는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글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주관적 실재계’, ‘주관적 상징계’는 정신분석학자들이 보내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전혀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아니라고 비판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살은 정확히 그들에게 돌아간다. 정신분석학자들 자신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면서도 다른 분야에서 그 문제를 다루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태생적 독단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임상의 문제에만 관계되어있으므로, 주체의 역사적 추이 및 주체들이 서로 연관 맺는 방식에 대해서는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정신 분석학과 별개로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다른 움직임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구조주의적 주체가 한계에 부딪히고, 주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립이 필요한 시점에도 정신분석학은 자기 안에 완성된 체계 내에서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글에서 이루어졌던 것과 같은 시도들은 그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예리하지 못할 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특히나, 정신분석학의 한계로 여겨지는 개별 인간들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대한 고찰은 가장 긴급히 요청되는 문제이다. 이미 다른 분야에서는 정신분석학과의 접목이 오래전부터 시도되어왔다. 이제 정신분석학 역시 그들의 요청에 응답해야한다. 지금이야 말로 역사적 정신분석학, 사회적 정신분석학과 같은 영역이 생겨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