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校(개교)49周年(주년)을 앞두고-

11月(월)5日(일)은 본교가 開校(개교)한지 四十九周年(사십구주년)을 맞는 날이다. 一九一五年(일구일오년)專門學校程度(전문학교정도)의 中央學林(중앙학림)으로 出發(출발)을 한 본교는 韓國佛敎宗團(한국불교종단)에서 佛敎的(불교적)인 敎育理念(교육이념)을 具顯(구현)코저 創設(창설)했던 것이다. 자랑스런 이 門(문)을 연지 半世紀(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順坦(순탄)치 않았던 大學史(대학사)-. 그 자취를 돌아보는 우리의 가슴 속엔 前進(전진)을 위해서 야무진 決意(결의)가 있어야 되겠다. 오늘의 저 캠퍼스에 躍動(약동)하는 젊은 脈搏(맥박)과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우리의 期待(기대)는 부풀고, 老少敎授(노소교수)의 무거운 발거름에서 半世紀(반세기)의 늠늠한 姿勢(자세)를 본다.

日帝(일제)의 數次(수차)에 걸친 閉校令(폐교령)과 六·二五(육·이오)의 아픈 傷處(상처)에도 불구하고 大(대)‘東國(동국)’은 아카데미즘의 總本山(총본산)으로써 그 使命(사명)을 다하려 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자리 與(여)건 가운데는 아직도 어려운 일들이 많다. 特(특)히 우리나라 大部分(대부분)의 大學(대학)이 大學(대학)의 機能(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 하나이다. 대학이 그 고고한 自治的機能(자치적기능)을 박탕당하고서는 그 使命(사명)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 大學(대학)에는 學問硏究(학문연구)와 講義(강의)의 自由(자유)가 保障(보장)되어야한다. 敎授(교수)와 學生(학생)이 없는 곳에 大學(대학)이 있을 수 없듯이 學問硏究(학문연구)와 講義(강의)의 自由(자유)가 없는 곳에 大學本然(대학본연)의 모습은 不在(부재)할 것이다.

아무리 갚은 眞理(진리)라 할지라도 그 自體(자체)는 自由(자유)를 通(통)해서 단 理解(이해)된다. 어떠한 權力(권력)에 의해서 監視(감시)를 받거나 强要(강요)된 理論(이론)은 生命(생명)을 잃고 만다 그래서 眞理探究(진리탐구)의 道場(도장)에는 어떠한 前近代的(전근대적) 權威意識(권위의식)도 許容(허용)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理論(이론)을 놓고 討論(토론)하고 傳達(전달)하기 위해서는 自由(자유)가 大前提(대전제)임을 古來(고래)로 말하여 온 까닭을 알 수 있겠다.

흔히 우리 韓國(한국)의 學風(학풍)을 實踐性(실천성)이 결여된 것이라나ᅟᅳᆫ 말을 듣는다. 그것은 學究者(학구자)가 自己主張(자기주장)을 絶對視(절대시)하고 學者的信念(학자적신념) 속엔 排他的要素(배타적요소)를 꾀고 이씩 때문이다. 絶對的(절대적)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知識(지식)의 說明(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自己(자기)가 信奉(신봉)하는 이데오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他學者(타학자)의 學說(학설)에 對(대)하여 寬容(관용)이 要請(요청)되는 反面(반면), 批判(비판)해야할 義務(의무)를 가져야하겠다. 이것이 곧 大學(대학)의 自由(자유)를 위하는 길이다.

둘째, 大學(대학)은 단순히 試驗(시험)과 就職(취직)을 위한 場所(장소)여서는 않되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經濟的社會的環境(경제적사회적환경)은 大學(대학)을 기형적으로 萎縮(위축)시키고 있다. 就職(취직)을 하기 위한 트레이닝·코스로 생각되게 한다는 것이다. 勿論(물론) 大學出身(대학출신)의 社會進出(사회진출)이 날로 어려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따라 大學當局(대학당국)이 對備策(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인줄 안다. 그러나 敎科目自體(교과목자체)가 여기에 치우쳐서는 않되겠다는 말이다. 또한 合理的(합리적)이며 科學的(과학적)이어야할 커리큐럼도 해마다 檢討(검토)디어 所期(소기)의 目標(목표)에 이르도록 努力(노력)해야할 것이다.

셋째, 大學(대학)의 本質(본질)은 學生(학생)들의 人格形式(인격형식)에 있다. 보다 眞實(진실)하고 바람직한 人間(인간)이 되도록 敎養(교양)을 주어, 갈고 닦는 것이 大學(대학)의 가장 큰 使命(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에선 學問(학문)과 人格陶冶(인격도야)를 分離(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人格敎育(인격교육)의 問題(문제)는 度外視(도외시)되고 있는 實情(실정)이다. 그러면서도 人格云云(인격운운)하기를 주저않는 것이 우리의 敎育者(교육자)들이다.

世界文化(세계문화)의 交流場所(교류장소)로서 大學(대학)의 任務(임무)는 크다 그리고 지금 까지의 分散的(분산적)인 學問(학문)에 統一性(통일성)을 부여하는데도 大學(대학)의 役割(역할)을 無視(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學問(학문)과 人格(인격)을 分離(분리)하여가지고는 이러한 任務(임무)나 役割(역할)을 다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의 機械的人間(기계적인간)이나 俗物主義的人間性(속물주의적인간성)만으로는 어떻게 來日(내일)을 期待(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敎授(교수)와 學生間(학생간)의 人間的(인간적)인 交涉(교섭)없이는 참된 大學敎育(대학교육)이 達成(달성)될 수 없다고 斷言(단언)한다. 現實情下(현실정하)에서 人格者(인격자)를 찾는다는 것은 無理(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敎育者(교육자)는 적어도 宗敎的哲學的(종교적철학적)인 길은 敎養(교양)의 所有者(소유자)들이어야 한다는 例(예)는 많다. 독일에는 칸트, 피히테 등의 嚴肅(엄숙)하고도 禁慾的(금욕적)인 哲學(철학)의 밑받침이 있고 美國(미국)에는 實用主義哲學(실용주의철학)이 强力(강력)히 作用(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敎育者(교육자)들은 人生問題(인생문제)로부터 宗敎(종교), 哲學問題(철학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은 摸索(모색)을 해온사람들이 稀少(희소)하기 짝이 없다. 人格陶冶(인격도야)를 부르짓기는 하지만 스스로 指導的立場(지도적입장)이 될 수 없었다.

요컨대 佛敎精神(불교정신)을 밑바탕으로한 本校(본교)만이라도 全構成員(전구성원)이 宗敎(종교) 및 哲學的修鍊(철학적수련)을 쌓아서 所期(소기)의 敎育目標(교육목표)에 이바지 해야하겠다는 것이다.

大學(대학)은 앞으로 보다 眞摯(진지)하게 國家(국가)와 社會(사회)에 奉仕(봉사)할 수 있어야하겠다. 象牙塔(상아탑)으로서의 大學(대학)은 오늘날 國家(국가)와 社會(사회)로부터 奉仕的大學(봉사적대학)으로 그 性格(성격)이 多少(다소)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大學(대학)은 어디까지나 眞理(진리)의 發見(발견)과 傳達(전달)을 통한 間接的(간접적)인 面(면)이 强調(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國家的(국가적)으로나 社會的(사회적)으로 要請(요청)되는 分野(분야)를 더욱 넓히고 深化(심화)하여 名實共(명실공)히 ‘國家(국가)의 頭腦(두뇌)’라는 位置(위치)를 높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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