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불교)는 手段(수단)이 될 수 없다.

文化宗敎的(문화종교적) 基準(기준)서 形成(형성)

傳統問題(전통문제)는 再評價(재평가)해야

<一(일)>歷史性(역사성)과 文化(문화)의 意味(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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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실로 미루어보아 이미 미래가 규정되어진다고 할때에에는 이미 거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관하여 흐르는 어떤 하나의 통일적 원리 혹은 역사적 필연성 같은 것이 가정되어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史觀(사관)을 가졌을 때에는 그 내용이 운위되기 전에 이미 직관적 형식적 원리로서 時間(시간)의 흐름이 가정되어 있다. 그 다음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의 번화가 긍정되어있다. 우리는 이 변화 그 자체를 인식하지는 못한다. 존재의 변화는 다만 존재자의 발생과 소멸현상을 통하여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즉 발생과 소멸은 존재자의 역사성의 가장 원리적 형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諸行無常(제행무상) 諸法無我(제법무아)’라는 佛敎敎理展開(불교교리전개)의 大前提(대전제)이다. 존재자의 발생과 소멸 사이에 生成(생성) 즉 ‘삶’이 있다. 삶은 발생과 소멸과의 사이의 過程(과정)이기에 그것은 이미 생긴 것이며 아직 멸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삶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변동하며 옮아 가고 있는 이 ‘過程性(과정성)’ 혹은 이미 시작은 되었으나 아직 다하지는 못한 이 ‘未完了性(미완료성)’이 모든 개개의 존재자의 가장 기본적 역사성이다. 그리고 이시간 이라는 可能性(가능성)으로 보장받은 과정성과 미완료성을 지닌 자연과 인간은 항상 이미 운동하면서 있고 행동하면서 있다. 역사성의 보편적 형식인 운동성과 행동성에 특수적인 역사성이 성립되며 이것이 아주 넓은 의미의 주체성이다. 연물의 主體性(주체성)은 屬性(속성)이고 인간의 주체성은 人格(인격)이다. 속성의 내포는 質量(질량)과 運動力(운동력)이며 인격의 내포는 自覺(자각)과 行動力(행동력)이다. 자연물의 운동은 기계적 필연적 무목적적이고 인간의 행동은 창발적이고 유목적적이다. 그리고 질량과 운동의 방향이 서로 다른 여러 자연물들 사이에서 맹목적적인 자연적 사실이 생기고 자각과 행동의 목적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목적적인 사회적 가치가 생기고 그 다음 자연의 맹목적적인고 기계적인 운동을 인간의 유목적적 創意的(창의적) 행동이 지배이용할때에 비로소 문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유목적적이고 창발적인 행동이 자연의 무목적적인 운동에 간섭하여 자연에게 목적성과 가치를 부여할 때 그 행동을 가르켜 ‘일’이라 한다.

‘죤듀이’는 문화란 “인간과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하였지만 결국 문화란 ”일과 일하여 놓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二(이)> 새 文化(문화)의 性格(성격)과 佛敎(불교)의 傳統(전통)○……○

한 文化(문화)의 性格(성격)은 일의 성격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전언한 바와 같이 일이란 인간이 무목적적인 자연에게 목적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일의 성격은 인간이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그 목적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된다. “목적”은 “위함”을 받기만 하는데에 그 기본적 성격이 있다. 따라서 “일”이 전언한 바와 같이 반드시 목적성을 가진다고 함은 “일”이 반드시 무엇을 “위한다”는 뜻이다.

“~을 위(爲(위))하여”라는 것이 “일” 곧 文化(문화)의 기본적 성격이다. 모든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문화를 소유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만이 “~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을 위하여”일하는 그 무엇의 성격에 따라서 한 “일”과 문화의 성격이 결정된다. “위하여”일하는 그 “무엇”의 성격이 서로 다르면 성격이 서로 다른 문화가 있게 된다. 우리가 새 문화를 이룩하자는 것ㅇ느 새로운 성격을 가진 그 “무엇”을 위하여 일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샐운 성격을 가진 그“무엇”을 위하여 일할 때에는 이미 그전에 일해 놓은 모든 일들은 그 새로운 “무엇”을 위하여 새 가치기준에 의하여 다시 평가 받아야한다. 佛敎(불교)의 傳統(전통)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새로운 “무엇”, 새 文化(문화)가치기준이야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불교가 世界的宗敎(세계적종교)이고 그 眞理(진리)가 언제나 최고가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그 새것이 불교자신의 진리가 아닌 한 불교는 그 새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고, 그 새 가치기준을 불교자신의 가치기준보다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 인간도 불교를 위한 수단이될지언정 불교가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민족과 국가도 불교를 위한 수단이 될지언정 불교가 민족과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불타의 “乳兒獨存(유아독존)”이란 바로 이런 뜻이며 또 불교의 전통도 여기에서 계승되어 왔을 것이며 또 이렇게 계승되어 가야할 것이다. 만약 지난 날의 역사적 불교가 어느 시대에 있어서 불교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는 塔(탑)을 더 높이 쌓았다면 그 시대의 불교도는 민족주의자 국수주의자들에게 굴복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이용당하였다. 불교의 전통이 그 塔(탑)에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塔(탑)은 불교의 순수성을 흐리게 하였다. 만약 앞날의 불교가 어느 시대에 있어서 불교보다 인간을 위하는 탑을 더 높이 쌓는다면 그것은 불교의 발전이 아니라 그 쇠퇴이며 불교가 ‘휴매니즘’의 가치계열에 종속됨이며 불교도의 인본주의자에의 굴복이며 불교의 외도에로의 전락을 의미한다. 여하한 새 文化(문화)의 건설도 불교의 수단이 될지언정 불교가 새문화 건설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진리야 말로 모든 존재자의 최종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불교를 위하지 않는 일은 일이 아니고 불교를 위하지 않는 文化(문화)는 文化(문화)가 아니다. 최고목적 최종목표가 없이 右往左往(우왕좌왕)하는 世界史(세계사)는 역사가 아니라 다만 무의미한 變遷(변천)이며 목적지없는 彷徨(방황)이다. 최고목표를 자각못하는 행동은 행동이 아니라 발작이다. 무의미한 변천에 발전성이 있을리 없고 발작적 행동에 주체성은 없다. 발전성과 주체성없이 역사와 文化(문화)는 없다. 實存(실존)도 만약 이념없는 實存(실존)이라면 미친 자와 다름이 없고 미친 자의 발작에 낡은 문화도 새 문화도 있을 이치가 만무하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현대의 문명문화는 일종의 가벼운 정신병적 증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함은 이념보다 實存(실존)을 앞세우려는 현대에서는 있음직한 일이다.

이렇게 볼 때 文化(문화)가 치ㅇ 넓게는 다만 종교적가치기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좁게는 다만 어떤 특수종교의 가치기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三(삼)> 空思想(공사상)의 새 文化的(문화적) 意味(의미)

새문화건설을 위한 새로운 이념이 불교의 진리가 아니라면 불교는 여하한 다른 이념을 위하여서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함은 불교의 진리가 문화가치의 반가치이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불교의 진리는 다른 어떤 문화가치보다도 초월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 가치는 물론 문화가치계열에서 단절된 비연속적 가치를 의미하는게 아니고 문화가치 보다 한층 더 고차적인 가치를 의미할 뿐이다.

인간이 불교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지언정 불교가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함은 佛陀(불타)가 인간을 떠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佛陀(불타)만이 그 자신 인간이면서도 누구보다도 더 높이 인간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민족과 국가불교를 위한 수단이 될지언정 불교가 민족과 국가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함은 佛陀(불타)가 민족과 국가를 떠나서 살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는 佛國土(불국토)에 내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역사상에서 흥망하고 역사는 시간을 타고 자연 속에서 흐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제 아무리 영원하고 그 자연이 제 아무리 변화무쌍하다고 하여도 거기에 인간이 없으면 문화와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문화와 역사의 주인공이 도리 수 있음은 인간만이 유목적적 자각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달리말하자면 인간만이 주어진 현실에 만족치 않고 이상적 목적을 갖고 이 이상적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일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상적 목표를 갖고 일할 줄 안다는 말을 인간이 아직 다하지 못한 자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움직임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매듀아놀드’는 “문화는 지식에 의하여 人間性(인간성)의 모든 좋은 면을 발전시키므로서 인간을 총체적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이라고 하였고 또 ‘티·에스에리오트’는 “문화는 한민족의 종교의 구현”이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문화의 건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함은 인간이 자기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인간의 具顯(구현)을 위하여 일하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새로운 인간이란 다만 지금이나 에전 것과 다른 어떤 인형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참된 인간형을 의미한다.

즉 새 文化(문화)건설이란 인간이 좀 더 참된 자기자신을 具顯(구현)해보자는 것이다. 이러므로 새 文化(문화)의 ‘새것’의 의미는 다만 시간적으로 가장 현재에 가까운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世代的(세대적)으로 新舊前後(신구전후)를 의미하지도 않고 오히려 좀 더 “참되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위하여 일할 우리들의 좀 더 참된 모습”은 무엇일까 인간역사의 지난 날에 있어서 의미한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 알려졌고 또 어떤 文化(문화)의 이념이 되었던 여러 가지 인간형이 있다.

회색빛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푸라톤’의 관념적 이상세계가 참된 인간의 세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밝은 태양과 오색이 찬란한 감촉의 세계에 우리인간은 물들여있다. 두 끝을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적 中道的(중도적)세계에서 인간의 참모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기에는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젖힌 수많은 선구자들의 순교적 활동은 너무나도 극단적이었다. ‘후랜시스 베이콘’의 참된 모습이 발견되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자연계의 기계적인 系列(계열)은 끝간데가 없고 또 귀납과 연역은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볼테일’의 도덕적 요청의 根底(근저)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찾기에는 역사상에서 惡(악)의 힘은 너무나도 강했었다.

<글쓴이·佛大講師(불대강사)> 元義範(원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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