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定(선정)은 修道(수도)의 核心(핵심)

禪(선)의 原理(원리)는 般若的直觀(반야적직관)

 

“比丘(비구)들아 三昧(삼매)를 修習(수습)하라, 比丘(비구)들아, 三昧(삼매)에 들어간 比丘(비구)는 如實(여실)히 了知(요지)하느니라” (相應部捷度篇(상응부첩도편)第一蘊相應那拘羅文品(제일온상응나구나문품) 第五三昧(제오삼매))

“比丘(비구)들아, 禪思(선사)에 있어서 요오가를 行(행)하라, 比丘(비구)들아, 禪思(선사)한 比丘(비구)는 如實(여실)히 了知(요지)하느니라” (同右(동우))

“智慧(지혜)가 없는 者(자)에겐 禪定(선정)이 없는 者(자)에겐 智慧(지혜)가 없다. 智慧(지혜)와 禪定(선정)과를 갖춘 者(자)는 實(실)로 涅槃(열반)에 가까이 온 것이니라” (無禪不智無智不禪 道從禪智得互泥洹(무선부지무지불선도종선지득호니원) Dhammafada No.372 法句經第三四章(법구경제삼사장))

釋尊(석존)은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생각건대 釋尊(석존)이 無上(무상)한 正覺(정각)을 이룰 수 있었던 根本契機(근본계기)는 實(실)로 菩提樹(보리수)밑에서의 靜觀(정관), 즉 禪定(선정)이었다. 傳(전)해진 바에 依(의)하면 그는 일찍이 出家以前(출가이전)에 이미 初禪(초선)에 該當(해당)하는 離生喜樂(이생희락)을 맛보았다고 한다.

初禪(초선)이란 모든 慾心(욕심)을 EJㅏ 모든 不善法(불선법)을 떠나 有尋有自(유심유자)하여 離(리)로부터 생긴 喜(희)와 樂(락)을 具足(구족)해 있는 狀態(상태)를 가르킨다. (中部三十六薩遮伽大經(중부삼십육살차가대경)) 어떤 이는 이렇나 事實(사실)이 後世人(후세인)의 推定(추정) 또는 類推(유추)의 結果(결과) 揷入(삽입)된 것일거라고 하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疑心(의심)을 품어볼 必要(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後(후) 釋尊(석존)께서는 ‘아알라아라카알라아마’와 ‘웃다가·라아마풋타’를 스승으로 하고 出家修行(출가수행)을 하는 중, 그들의 禪定(선정)을 또한 經驗(경험)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所期(소기)한 成果(성과)를 거두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中部第十二師子吼大經(중부제십이사자후대경)에 依(의)하면 釋尊(석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한 苦行(고행)으로서도 나는 人法(인법)을 超越(초월)한 特殊(특수)한 最上智見(최상지견)에 到達(도달)하지 못하였느니라 그 理由(이유)는 그 聖智(성지)가 到達(도달)되면 그것은 解脫(해탈)에의 聖道(성도)로서 거기에 따라서 行(행)하는 者(자)를 올바로 苦(고)의 滅(멸)로 引導(인도)하는 것이니라”

이와같은 聖智見(성지견)을 體得(체득)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禪定(선정)이 그 方法(방법)으로서 採用(채용)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菩提樹下(보리수하)의 深入禪定(심입선정)없이 佛敎(불교)의 現成(현성)을 생각할 수는 없다. 올덴베르그(Oldenberg)는 ‘他宗敎(타종교)에게 있어 祈禱(기도)인 것이 佛敎(불교)에서는 禪定(선정)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禪定(선정)이 佛敎的修道生活(불교적수도생활)에 있어서 核心(핵심)을 이룬다는 意味(의미)에서 옳은 것이다.

釋尊(석존)은 成道後(성도후) 活命外道(활명외도) ‘우파카’에게 처음으로 自覺(자각)을 宣言(선언)하시며 “나는 一切勝者(일체승자)니라, 나는 一切知者(일체지자)니라 一切法(일체법)에 물들지 않느니라. 一切(일체)를 捨離(사리)하고 愛欲(애욕)이 다하여 解脫(해탈)되었느니라”하였다. (Mahavagga p5, MahabashnⅢ p. 319)

一切勝者(일체승자)란 心解脫(심해탈)을 얻었음을 가르키고 一切知者(일체지자)란 慧解脫(혜해탈)을 얻었음을 意味(의미)한다. 雜阿含(잡아함) 第二十六卷(제이십육권) 七一○經(칠읽ㅇ경)에는 ‘離貪欲者心解脫(이탐욕자심해탈), 離無明者慧解脫(이무명자혜해탈)’이라한다. 貧欲(빈욕)과 無明(무명)을 떠난다고하는 것은 靜慮即禪定(정려즉선정)을 通(통)하여 비로소 可能(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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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尊在世時(석존재세시)부터 그 禪定(선정)의 實踐道(실천도)에 부쳐진 이름으로 止觀(지관)이라는 것이 있다.

止(지)란 所謂(수위) 奢摩他(사마타)(pali samaiha; skt,’samatha)이며 觀(관)이란 所謂(소위) 毘鉢舍那(비발사나)(pali vipassana, skt.vipasyana)의 飜譯(번역)이다. ‘리스·데이비즈’(Rhys dairds)는 止(지)를 Calml, 觀(관)을 insight로 옮기고 있으며 Neumann은 止(지)를 Ruhe로, 觀(관)을 Klarsicht라고 한다. Nyanatiloka는 止(지)를 Gemuetsruhe라고 번역하면서 緊張(긴장)된 精神集注即定(정신집주즉정)으로 얻어지는 不動(부동)의 心的狀態(심적상태)라 하고, 觀(관)을 Helblick 또는 Einsicht라고 번역하면서 所謂(소위) 五蘊(오온)을 無常(무상), 苦(고), 無我(무아)에서 知見(지견)하는 것이라고 規定(규정)했다. Dhemmasaugani(P23)에는 止(지)를 正定(정정)에 觀(관)을 正見(정견)에 配(배)하고 있다. 從來(종래) 止(지)는 停止(정지), 寂止(적지), 止息(지식)等(등)이라고 말해지고, 마음이 動(동)하지 않고 煩惱(번뇌)가 寂然(적연)히 止息(지식)된 狀態(상태)라고 보아왔고, 觀(관)은 觀達(관달), 觀照(관조), 貫穿(관천)等(등)이라고 말해지며, 智(지)가 通達(통달)해 無明(무명)을 뚫고 如實(여실)히 事物(사물)을 理解(이해)하는 狀態(상태)라고 해왔다. 그러므로 止(지)는 마음을 寂靜(적정)히 하는 것 寂靜(적정)히된 狀態(상태), 觀(관)은 事物(사물)을 如實(여실)히 知見(지견하는 것, 知見(지견)하는 힘을 말한다. 따라서 止觀(지관)은 좁게 말하면, 四禪(사선), 넓게 말하면 四禪(사선), 四無色定(사무색정), 四無量(사무량), 四念處(사념처), 八解脫(팔해탈), 八勝處(팔승처), 九相(구상), 十念(십념), 十想(십상), 十一切處(십일체처)等(등)의 禪定觀法(선정관법)을 말하는 것이 된다. 或(혹)은 止觀(지관)을 二分(이분)해서 止(지)를 禪定(선정)으로, 觀(관)을 知慧(지혜)로 보는 說(설)이 있으나 어쨌든 止(지)와 觀(관)은 俱修均等(구수균등)되어야 한다는 것이 諸經(제경)의 一致(일치)된 見解(견해)이다. (法句經第三百七十二(법구경제삼백칠십이), 雜阿含十七卷四百六十四經(잡아함십칠권사백육십사경), 同二十一卷五百六十經(동이십일권오백육십경), 巴利增支部四章百七十等(바리증지부사장백칠십등))

增支部第二集第三愚人第十一(증지부제이집제삼우인제십일), 第十二(제십이)에는 다음과 같은 句節(구절)이 있다.

‘比丘(비구)들아, 다음의 둘은 順明分(순명분)의 法(법)이니라, 그 둘이란 止(지)와 觀(관)이다. 比丘(비구)들아, 止(지)를 닦아서 무엇이 成就(성취)되느냐? 마음(citta)을 닦는 것이다. 마음을 닦아서 무엇이 成就(성취)되느냐? 모든 貧(빈)(raga)이 斷滅(단멸)된다. 比丘(비구)들아 觀(관)을 닦아서 무엇이 成就(성취)되느냐? 慧(혜)를 닦는 것이다. 慧(혜)를 닦아서 무엇이 成就(성취)되느냐? 모든 無明(무명)이 斷滅(단멸)된다.’ 즉 止(지)로써 마음을 닦아 貧欲(빈욕)을 끊어버린 心解脫(심해탈)을 얻고 觀(관)으로써 慧(혜)를 닦아 無明(무명)을 끊어버린 慧解脫(혜해탈)을 얻는다.

原始佛敎當時(원시불교당시)의 禪定(선정)은 巴利中部第百四十一諦分別經(바리중부제백사십일체분별경)이 言及(언급)하는 바와같이 正定(정정)의 內容(내용)인 四禪(사선)이나 經典(경전)들은 이 四禪(사선)이나 經典(경전)들은 이 四禪(사선)의 特質(특질)을 (1) 離生希朗(이생희락) (2) 定生喜樂(정생희락) (3) 捨念樂住(사념낙주) (離喜妙樂(이희묘락)) (4) 捨念淸淨(사념청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四禪(사선)의 起源(기원)은 佛敎(불교)밖에 있었다 佛陀(불타)는 다만 그 精神(정신)을 採擇(채택)하여 그 獨自的(독자적)인 意味內容(의미내용)을 附與(부여)한 것이다. 學者(학자)들은 釋尊(석존)에게 있어서의 禪定(선정)의 特質(특질)을 (1)解脫理想(해탈이상)을 實現(실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必要(필요)한 方法(방법)이지만 이것 自體(자체)가 決(결)코 目的(목적)이 아닌 것이며 (2)死後(사후) 그것에 相應(상응)하는 어느 天上界(천상계)에 태어날 것을 期(기)하는 것이 아니라 現世(현세)에 있어서의 解脫(해탈)의 實現(실현)을 目的(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3)어디까지나 現實(현실)의 考察(고찰)로부터 出發(출발)하는 것이며 (4)物心(물심)에 各各(각각) 實體(실체)를 認定(인정)하여 그 二元的(이원적) 對立(대립)을 前提(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物心一元論(물심일원론)에 立脚(입각)하고 있으며, (5)禪定(선정)의 目的(목적)이 外道(외도)의 境遇( 경우)와 같이 어떤 神通(신통)을 引發(인발)하는데 있지 않으며 (6)佛陀(불타)의 禪定(선정)은 ‘마음이 寂靜純淨(적정순정)하여, 煩腦(번뇌)가 없고, 隨煩腦(수번뇌)를 멀리 떠나, 柔軟(유연)하고 恒常(항상) 活動的(활동적)이면서도 安住(안주), 不動(부동)한 狀態(상태)에 있어’ 外道(외도)의 무리들이 하는 바와같이 形式(형식)에 사로잡혀, 快樂(쾌락)에 執着(집착)하고, 邪見(사견)교慢(만)에 基(기)초한 것이 아닌 點(점)들이라고 指摘(지적)하고 있다. 釋尊(석존)의 禪定(선정)은 한마디로 말하여 無明(무명)을 滅盡(멸진)하고, 愛欲(애욕)을 克服(극복)하고, 利他(이타)의 大悲(대비)로 가득찬 柔軟心

(유연심) Muducitta이다.

小乘的(소승적) 禪定(선정)은 그 二元的(이원적)인 實在觀(실재관)에 影響(영향)을 입어, 八正道(팔정도)의 第八正定(제팔정정)을 前七支(전칠지)와 別個(별개)로 目的視(목적시)하는 傾向(경향)을 낳았고, 修行(수행)의 效果(효과)를 具體的(구체적)으로 나타내보이기 위해서 禪定(서정)의 段階(단계)를 重要視(중요시)함과 같은 傾向(경향)을 낳았다. 그 禪觀(선관)의 項目(항목)도 有機的(유기적), 組織的(조직적)이라기 보다는 雜多(잡다)한 蒐集的樣相(수집적양상)을 띠우고 있으며, 그 禪定(선정)이 衆生救濟(중생구제)의 慈悲(자비)에 發(발)하지 않고 自己完成(자기완성)을 爲主(위주)로 하고 있다는 것도 그 特色(특색)이라 아니할 수 없다.

大乘佛敎(대승불교)의 禪定(선정)은 觀佛三昧(관불삼매), 法華三昧(법화삼매), 首擇嚴三昧(수택엄삼매), 一行三昧(일행삼매), 諸法實相觀(제법실상관), 無量壽佛法(무량수불법) (般舟三昧(반주삼매)等(등)) 等(등)이 그 主要(주요)한 것이다. 大乘禪中(대승선중)에는 三論宗(삼론종)의 八不中道觀(팔불중도관), 天台宗(천태종)의 三諦圓融觀(삼체원융관), 華嚴宗(화엄종)의 事事無碍法界觀(사사무애법계관)등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大乘佛典(대승불전)은 그 어느 것을 莫論(막론)하고 모두 佛陀(불타)의 入定說法(입정설법) 또는 出定說法(출정설법)의 形式(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이 經典(경전)들이 佛陀(불타)의 體驗內容(체험내용)을 나타내어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現實(현실) 속에 生生(생생)히 되살리도록 하는 것은 使命(사명)으로하는 文獻(문헌)들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大乘的禪定(대승적선정)의 特質(특질)은 固定的(고정적)인 實體觀念(실체관념)을 否定(부정)하는 空思想(공사상)을 基礎(기초)로 하고 있다는데에 있다. 보다 發展(발전)된 大乘的禪定(대승적선정)을 唐(당)의 宗密(종밀)은 最上乘禪(최상승선)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四七○年頃(사칠공년경)에 中國(중국)에 渡來(도래)한 菩提達磨(보리달마)(Bodhidharma)所傳(소전)의 禪系統(선계통)을 말한다. 宗密(종밀)은 이것을 自心(자심)이 本來情淨(본래정정)하고, 煩腦(번뇌)에 實體性(실체성)이 없고 元來無漏(원래무루)한 智性(지성)을 具足(구족)하고 태어났으며 心即佛(심즉불)로서 이 兩者(양자)가 結局(결국) 다를바 없다고 頓悟(돈오)하는 禪(선)이라고 한다. 中國(중국)에서 말하는 禪(선)은 사람들이 本來(본래)부터 具有(구유)하는 眞性(진성)을 悟修(오수)하는 根源的體驗(근원적체험)을 말한다. 그 眞性(진성)을 悟(오)로 나타내는 것을 慧(혜)라 하고, 그것을 修(수)로 나타내는 것을 定(정)이라 한다. 이와같은 定慧(정혜)를 總稱(총칭)해서 禪(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禪源諸詮集都序(선원제전집도서)敬德殿燈錄(경덕전등록) 第十三卷(제십삼권)) 六祖慧能(육조혜능) (六三八-七一三(육삼팔-칠일삼))의 禪(선)을 定慧不二(정혜불이)의 法門(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理由(이유)에서이다. 六祖壇經(육조단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定慧體一不二(정혜체일불이), 即定是慧體(즉정시혜체) 即慧是定用(즉혜시정용) 即慧之時定在慧(즉혜지시정재혜) 即定之時慧在定(즉정지시혜재정) 그러나 여기서 悟(오)한다는 것은 眞性(진성)을 對象(대상)으로하여 이를 覺知(각지)한다는 말이 아니다. 直接的(직접적)으로 眞性(진성) 그 自體(자체)에 부디쳐 心性自身(심성자신)이 되고 佛性全體(불성전체)를 具現(구현)하는 것이다. 깨닫는 마음과 깨달아진 眞理(진리)와가 하나가 디어 있는 體驗(체험)이다. ‘스즈끼·다이세쯔’ (鈴木大拙(영목대졸))의 表現(표현)을 빌리면 衆生(중생)의 同一眞性(동일진성)을 믿는 것은 理入(이입)(Entrance by Reason)이다. 이것을 實踐的(실천적)으로 體得(체득)하는 사람은 行入(행입) (Enrrance by conduct)이라는 것이다.

禪(선)의 原理(원리)는 般若的直觀(반야적직관)(Prajna-Intnition)에 있다. 般若的直觀(반야적직관)이란 現實(현실)에 接近(접근)하는 佛敎的方法(불교적방법)이다. 般若即慧(반야즉혜)(Prajna)는 現實(현실)을 分別(분별) 또는 差別(차별)하는 理性的理解(이성적이해)의 方式(방식)과는 全(전)혀 다른 것이다. 佛敎(불교)에 있어서도 事物(사물)을 이와 같이 觀察理解(관찰이해)하는 方法(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뷔지쟈아나’ (Vijnana)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理性的(이성적) 따라서 推論的(추론적)인 理解(이해)는 感覺世界(감각세계) 및 知性世界(지성세계)에 있어서나 適用(적용)될 수 있는 限界(한계)있는 不透明(불투명)한 認識作用(인식작용)에 不過(불과)하다. 거기에는 보는者(자)가 있고 또 보여지는 對象(대상)이 있어 이 兩者(양자)의 對立(대립)이 前提(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般若(반야) 즉 프라지냐아‘에는 이런 區別(구별)이 없다. 보는 者(자)와 보여지기는 對象(대상)과가 一切(일체)이며 보는 主體(주체)가 보여지는 客體(객체)이며 보여지는 客體(객체)가 보여지는 主體(주체)인 것이다. 이를테면 differentiation이나 discrriimnation이 되지 않은 分別以前(분별이전)의 것 말하자면 無分別(무분별)로서의 純粹經驗(순수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天地未分(천지미분) 主客未生(주객미생)인 그곳에 直接的(직접적)으로 뛰어들어가 거기에 떠오르는 것 現實(현실)의 自覺(자각)(selfawareress)그 自體(자체)가 般若的直觀(반야적직관)인 것이다.

禪(선)의 論理(논리)는 그러므로 逆說的(역설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即(즉) 뭇사람들의 豫期(예기)에 反(반)해서 一般的(일반적)으로 眞理(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反對(반대)되는 說(설) 또는 自家撞着的(자가당착적)인 說(설)을 媒介(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對象論理(대상논리)란 客觀的(객관적)인 것에 對(대)하여 그 性質(성질) 關係(관계) 變化(변화) 存續(존속)의 樣式(양식)等(등)을 肯定(긍정)이나 否定(부정)의 方法(방법)으로 定(정)하는데 不過(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같은 對象論理(대상논리)로서는 主體的生命(주체적생명)에 關(관)한 充分(충분)한 把握(파악)이 不可能(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主體的(주체적)이라고 하는 것은 물건과 같이 對象化(대상화)하고 客觀化(객관화)해서는 볼 수가 없는 한편 안에 있으면서도 同時(동시)에 밖을 包括(포괄)할 수 있는 그런 따위의 것을 가르킨다.

그러므로 主體的論理(주체적논리)의 特質(특질)은 깊이 矛盾(모순)되는 兩極(양극)의 無限(무한)한 切斷(절단)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同時結合(동시결합)이 있는 點(점)이다. 生(생)이 온전히 生(생)이되고 마는 것을 生(생)속에 死(사)를 아는 것이며 死(사)가 온전히 死(사)가 되고 마는 것은 도리어 死(사) 속에서 生(생)을 보는 것이다. 마태福音(복음)의 ‘너희가 네 生命(생명)을 얻고자하는 者(자)는 이를 잃을 것이요 너희가 나를 위해 네 生命(생명)을 버리는 者(자)는 도리어 이를 얻으리라’한 따위의 것이 바로 主體的論理(주체적논리)가 內包(내포)하는 파라독스인 것이다. 이러한 파라독스는 對象論理(대상논리)를 窮地(궁지)에 몰아넣고 거기에서 다시 轉身(전신)해서 살길을 發見(발견)하게끔 하는 것이다. 實存哲學的(실존철학적)으로 말하자면 人間(인간)을 限界狀況(한계상황)에 몰아넣고 그 後(후)에 이를 究破(구파)해서 本來的(본래적)인 自己(자기)Rigenes Selbst에도 歸一(귀일)케 하려는 것이다.

死(사)라 하고 生(생)이라 하는 것이 果然(과연) 무엇을 意味(의미)할 것인가? 이 두 개에 모두 두 개의 意味(의미)가 있다. 목숨이 끊긴 다는 것도 死(사)이지만 여기에서는 거짓 나(我(아))에 죽는 것을 가르킨다. 다시 말하면 無我(무아)에 徹(철)하는 것 以外(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같은 自己否定(자기부정)은 참된 自己(자기)에 사는 所以(소이)이며 이것을 일컬어 同心(동심) Conuersion이니 再生(재생) Wiedergeburt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大死一番(대사일번)하지 않으면 大活現成(대활현성)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摩詞般若波羅蜜多經(마사반야바라밀다경)에 ‘是心非心(시심비심) 心相常淨故(심상상정고)’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A는 A가 아니다. 그런 故(고)로 A다’하는 主體的論理(주체적논리) 般若的直觀(반야적직관)의 論理(논리)에 依(의)해서만 證悟9증오)된다. ‘非(비)’라는 對立的把握方式(대립적파악방식)을 ‘即(즉)’이라는 自己同一的直觀(자기동일적직관)에로 바꾸는 般若(반야)=智慧(지혜)가 없이 人間(인간)은 그가 던저진 苦海(고해)에서 헤어날 길을 發見(발견)치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般若的直觀(반야적직관)으로서의 禪(선)은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으로는 空(공)인 現實(현실)을 如實(여실)히 達觀(달관)할 수 있는 가장 純粹(순수)한 基盤(기반)이 되는 經驗(경험)이며 또한 佛敎了解(불교요해)의 가장 切實(절실)한 열쇠이다.

(글쓴이·佛大敎授(불대교수)) 李箕永(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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