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句(법구)비유經(경) 刀杖品(도장품)에 보면 다음과 같은 說話(설화)가 있다. - 어떤 比丘(비구)가 오래 앓고 있었따. 비록 精舍(정사)에 누워 있었지만 몸은 더러워졌고 냄새가 물씬거리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이를 아예 避(피)했을 것은 물론이다. 부처님은 몸소 나아가 더운 물로 그 病者(병자)의 몸을 씻어 주셨다. 나라의 임금이나 백성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부처님은 世上(세상)에서 높으신 분. 三界(삼계)에 뛰어나신 분. 어찌 몸소 이렇게?…’ 하며 의아했다. 부처님은 말씀한다. - ‘부처가 이 世上(세상)에 온 까닭은 바로 이런 궁하고 외로운 사람은 위한 것. 병든 者(자)나 빈궁하고 孤獨(고독)한 老人(노인)을 도와 공양하면 그 福(복)은 한이 없나니. 그 공덕이 쌓이면 마침내 道(도)를 얻으리라.’ 고 하였다.

▲ 우리는 黃昏(황혼)의 산 길에서 한 마리의 밟혀 죽은 昆蟲(곤충)을 발견할 때가 있다. 市街(시가)를 거닐다가 손을 내미는 걸인을 만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손을 내미는 걸인을 오히려 不必要(불필요)한 存在(존재)로 생각하며 눈을 돌릴 것이다. 또한 이 宇宙(우주) 안의 누구도 산길에서 밟혀 죽어버린 昆蟲(곤충)을 아는 이는 없다. 전혀 自己(자기)와는 關係(관계)가 없는 일로 생각한다.

‘한 마리의 개미를 죽여도 理由(이유)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유고’의 말이 생각키운다. 밟혀 죽는 昆蟲(곤충)-. 진가치는 걸인. 여기에 理由(이유)나 責任(책임)을 부여할 만큼 우리들의 狀況(상황)은 자리가 잡혀있지 않다고도 볼 수 있겠다.

▲ 그러나 모든 生存者(생존자)는 自己(자기)와 같은 集團(집단) 속에 있다. 自己(자기)만을 빼놓고 江(강) 건너 불처럼 世上(세상)을 내다본다는 것, 그것은 결국 自己(자기) 스스로를 社會(사회)의 不在者(부재자)로 생각하는 태도다. 百萬(백만)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모두 不在者(부재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나’ 하나만이라는 例外的(예외적) 생각을 한다. 그 결과는 百萬(백만)이라는 無責任(무책임)한 不在(부재)의 集團(집단)을 의미하고 만다.

▲ 人間社會(인간사회)에서 個人(개인)의 責任(책임)만큼 重要(중요)한 것이 없다. 個個人(개개인)의 責任(책임)은 곧 全體(전체)의 責任(책임)도 된다. 나 하나만이 이 責任(책임)에서 例外者(예외자)가 될 때 集團(집단)은 不在(부재)하게 된다. 孤獨(고독)한 病者(병자)를 더럽다고 피하는 王(왕)이나 百姓(백성)은 적어도 自己(자기)만은 이 病者(병자)에게 責任(책임)이 없는 例外者(예외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부처님은 몸소 나아가 病者(병자)를 도왔다. 福(복)을 쌓고 道(도)를 얻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人間(인간)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集團社會(집단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個個人(개개인)의 責任(책임)이라는 意味(의미)도 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길’을 찾고 福(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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