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根本眞理(근본진리)는 不完全(불완전)한 말로나 또는 文字(문자)로 表現(표현)할 수 없는 絶對境(절대경)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아는 바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을 敎化(교화)하는데는 說明(설명)할 수 없는 眞理內容(진리내용)을 說明(설명)해보려는데서 無限(무한)한 言句(언구)의 表現(표현)이 必要(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많은 典籍(전적)들은 이것을 意味(의미)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四十餘年(사십여년)을 敎化說法(교화설법)하시면서 당신이 깨치신 眞理(진리)는 끝내 한마디도 說(설)하지 못하였다 하신것도 이를 두고 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다른 종교과 비교할 때는 뚜렷이 區別(구별)지을 수 있는 標準(표준)이 서있다. 이것이 불교의 특징인 同時(동시)에 標ㅇ(표ㅇ)이기도 하며 表現(표현)할 수 없는 불교眞理(진리)를 가장 가깝게 表現(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表象界(표상계)의 萬有(만유)는 가만히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도 쉬지 않고 時時刻刻(시시각각)으로 變化(변화)하는 것이라 觀破(관파)한 原理(원리)인 것이다.

불교信仰(신앙)에 들어오는 入門(입문)도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體驗(체험)한데서 可能(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또 現實生活(현실생활)은 至上最善(지상최선)이라는 생각을 否定(부정)하고 眞實(진실)한 自由(자유)의 世界(세계)를 建設(건설)해보자는 불교의 目的(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사닥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時時刻刻(시시각각)으로 變化(변화)하는 萬有(만유)는 어떻게해서 現實(현실)에 하나의 存在(존재)로 한 생각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對(대)한 解明(해명)이 必要(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目(목)과 緣(연)이 和合(화합)해서 一時的(일시적)d로 이루어진 것이지 本來(본래)부터 自體(자체)의 主體(주체)가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 解答(해답)이다. 萬有(만유)는 主體(주체)가 없다는 理由(이유)를 分析(분석)하고 說明(설명)하고 體系(체계)를 세운 것이 無我(무아)의 眞理(진리)며 불교敎理(교리)의 大部分(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 自身(자신)의 觀察(관찰)인 同時(동시)에 人類全體(인류전체)에 關(관)한 觀察(관찰)이었으며 나아가서는 모든 存在(존재)에 對(대)한 觀察(관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萬有(만유)는 잠시도 쉬지않고 變化(변화)하고 主體(주체)가 없는 法則(법칙)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며 主體(주체)(我(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괴로움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故(고)로 우리는 觀察如何(관찰여하)에 따라서 苦(고)의 世界(세계)와 樂(낙)의 世界(세계)가 갈라지는 分岐點(분기점)에 서있는 存在(존재)란ㄴ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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