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度(인도)에서 發祥(발상)한 佛敎(불교)가 西城(서성)을 거쳐 中國(중국)에 들어오기는 大略(대략) 西紀(서기) 一世紀初(일세기초)의 일인데, 처음 中國(중국)에서 佛敎(불교)를 받아드리는 데는 커다란 難關(난관)이 있었으니 그것은 佛敎(불교)의 聖典(성전)이 中國(중국)의 文字(문자)인 漢字(한자)와는 전혀 判異(판이)한 梵語(범어)(Sanskrit語(어))로 記述(기술)되었다는 點(점)이었다.

卽(즉) 中國(중국)에서 佛敎(불교)를 제대로 受容(수용)하기 爲(위)해서는 무엇보담도 佛經(불경)의 漢譯(한역)이 急先務(급선무)요 또한 가장 요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佛敎聖典(불교성전)의 量(양)이 尨大(방대)하여 短時日內(단시일내)에, 그리고 小數(소수)의 人員(인원)으로 全佛敎聖典(전불교성전)의 漢譯(한역)은 도저히 不可能(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中國佛敎史(중국불교사)를 더듬어 보면 오랜 時日(시일)에 걸쳐 數(수)많은 譯經(역경) 중의 발자취를 엿볼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번역의 量(양)과 質(질)에 있어서 斷然(단연) 他(타)에 뛰어나고 後人(후인)의 稱頌(칭송)에 마지않는 두사람을 들 수 있으니 後秦(후진)의 구摩羅汁(마라즙)과 唐(당)의 玄獎(현장)이 바로 이에 該當(해당)된다.

구摩羅汁(마라즙)은 역시 印度人(인도인)이었다. 七歲(칠세) 때 出家(출가)하였고 龜玆國(구자국)에서 大乘(대승)佛敎(불교)를 宣布(선포)하였으나 後秦(후진)의 초빙을 받아 長安(장안)에서 國寶待遇(국보대우)를 받으면서 誠實論(성실론), 阿彌陀經(아미타경), 中論(중론), 大品般若經(대품반야경) 等(등), 經(경),律(율),論(론) 七十四部(칠십사부) 三百七十餘卷(삼백칠십여권)을 번역하였다.

玄獎(현장)은 十二歲(십이세)때 洛陽(낙양) 淨土寺(정토사)에서 出家(출가)하였고, 二十九歲(이십구세)때 求法(구법)의 雄志(웅지)를 안고 西城(서성)으로 떠났었다. 인도에 가서는 有名(유명)한 那蘭陀寺(나난타사)에서 唯伽論(유가론), 因明論(인명론), 俱舍論(구사론) 等(등)을 五年間(오년간) 배웠으며 十七年(십칠년)만에 百三十國(백삼십국)을 巡歷(순력)하고 歸國(귀국)할 때에는 佛舍利(불사리) 百五十粒(백오십립), 佛像(불상) 七(칠)구, 佛經(불경) 五百二十秩(오백이십질) 六百五十七部(육백오십칠부)를 가지고 와서 주로 弘福寺(홍복사), 大慈恩寺(대자은사)에서 번역에 從事(종사)하여 大般若經(대반야경) 等(등) 七十五部(칠십오부), 千三百三十五卷(천삼백삼십오권)을 번역하였다.

이와같이 이 두사람은 남달은 精力(정력)과 努力(노력)으로 많은 量(양)의 經典(경전)을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原典(원전)과 比較(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번역이었으므로 中國佛敎(중국불교)의 發展(발전)에 至大(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그 業績(업적)이 千古(천고)에 빚을 發(발)하는 것이기에 이 두 사람을 二大譯聖(이대역성)으로 존칭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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