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화염병, 오늘은 촛불, 내일은?

“젊은이와 노인들이 한데 어울리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등, 한국의 집회는 일종의 대형 공공축제 같은 모습이다.”
영국 로이터 통신의 기사 중 일부다. 최근 해외에서 우리나라 시위 문화는 성숙한 시위문화라며 극찬 받고 있다. 미국 출신 쉐넌 킴 교수(다르마칼리지)는 “시위를 위해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큰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놀랍다”며 “미국에서는 일종의 질투심까지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시위의 모습이 촛불시위였던 것은 아니다. 4.19혁명과 6.10 민주항쟁 당시에는 경찰과 시민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최루탄 가스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위의 모습은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한 것일까.

 

화염병이 촛불이 되기까지

“학생 데모에서 학생의 주 무기는 투석과 화염병이요, 경찰의 주 무기는 최루탄이었다.”
조선일보 1987년 5월 20일자 기사 중 일부다. 군사정권 시절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진압에 맞서 시위 참가자들 역시도 몽둥이와 직접 만든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당시 집회에 참가했던 이병민(49) 씨는 “경찰과 시민 모두 방어를 명분으로 폭력을 휘둘렀다”며 “역설적이지만 그때는 시위 과정에서 안전해지기 위해선 폭력을 쓰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와 같은 시위문화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게 된다. 미군의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두 여학생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반미(反美) 촛불시위’가 일어났다. 11월 28일 ‘앙마’라는 ID의 네티즌이 한 사이트에 호소문을 올린 것이 촛불시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 네티즌은 호소문에서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가 된다고 합니다.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수만의 반딧불이가 됩시다”라며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로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모이자고 제안했다.

 

이제는 시위에서 촛불콘서트로  

더욱이 정권이 군사독재에서 민간으로 이양되고 시민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시민의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자 경찰의 폭력진압이 줄어들었다. 이제 시민들은 경찰의 무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않아도 됐고 화염병 대신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평화시위를 지향한 이후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와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시위까지 평화적인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최근의 촛불시위는 단순히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것에서 벗어나 ‘촛불콘서트’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변화했다. 시위 현장에서 시국을 풍자하기 위해 가사를 바꿔 가요를 부르기도 하고 유명 개그맨의 토크 콘서트, 일반 시민들의 연설 등 여러 문화콘텐츠를 만날 수 있다.

 

집시법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시위문화는 평화적으로 변화하는데도 관련 법률은 규제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있다. 헌법이 보장한 시위의 자유가 원활한 교통소통보다 더 중요하다며 최근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실에서 집시법 12조에서 ‘교통소통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할 수 있다’는 문구를 삭제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반면, 우리대학 김경제 헌법학 교수는 “집시법 자체는 만능의 법이 아니고 하나의 권리다”며 “도로는 원래 시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통의 장소로 타인의 이동할 수 있는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광화문 시위에 참가한 윤은솔(법학16) 양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한데 모여서 움직이기 불편하고 위험해 보였다”며 “교통통제로 인해 시위장소를 떠나 집으로 이동하는 데 많은 불편을 겪기도 했다”고 전했다.
주말이면 부모의 손을 잡고 온 가족이 광화문 시위에 참가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됐다.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가 성인이 된 후의 시위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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