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준비하며 청춘사른 광복군 흔적 곳곳에

<동대신문=윤혜경 기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의 기틀을 처음 다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만남을 어떻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난여름, 국가보훈처와 대학내일이 공동주관하는 ‘대학생 중국항일유적탐방’에 전국의 대학 방송국과 학보사 기자 26명이 함께 참여해 중국 속 항일 유적의 발자취를 따랐다. 

 

▲ 중경 임시정부 청사의 모습

그 첫 번째 발걸음으로 찾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의 수많은 가정집들의 얼기설기한 빨래줄 사이로 마주본 상해 임시정부 청사의 모습은 벅찬 마음 한편 애잔한 마음이 먼저 스몄다. 18년 동안 260명이 다녀갔다는 이곳 청사는 빛바랜 태극기가 교차해서 걸려 있는 1층 회의실과 2층 김구 선생의 집무실, 좁디좁은 통로와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3층 구조였다. 이 좁은 건물 안에서 100명 이상이 운신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 정도다. 한편 임시정부청사 근처 수많은 건물들의 잔해는 상해의 재개발 열풍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관리담당을 맡고 있는 정준표 주임은 “상해 임시정부 자리도 재개발 대상 중 하나로 고려됐지만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의 긴밀한 협조로 재개발 열풍을 빗겨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상해 임시 정부를 뒤로 하고 임시정부의 마지막 모습이 남아있는 중경으로 향한다. 상해를 떠나 중국대륙을 가로 질러 비행기로 2시간 버스로 또 다시 1시간. 고층 아파트와 주택 건물들 사이로 중경 임시정부 청사가 보인다.
중일 전쟁과 일본의 계속되는 탄압, 거기에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임시정부 내부갈등까지. 이로 인해 임시 정부는 중국 각처로 옮겨 다니게 되고 결국 중경에 마지막 둥지를 틀게 된다. 중경의 임시정부 청사는 상해청사보다 15배나 큰 규모였으며 조직적으로도  분권된 모습을 보였다. 벽을 사이에 두고 대통령 집무실과 외교통상부 그 옆방에는 재정경제부가 있는 형태랄까?

하지만 중국 스촨성 지진의 영향으로 곳곳에 금이 간 중경 임시정부청사의 모습은 유명 인사들의 방문과 기업들의 후원 간판이 걸려 있는 상해 임시정부의 모습과 달리 어딘지 쓸쓸해 보인다. 이에 중경 임시정부 가경해 관장은 “상해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교통편 또한 용이하지 않아 사람들의 발걸음과 관심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중경청사의 중요성에 대해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중경 임시정부의 경우 광복군 창설을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을 받아들여 통합적으로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통제하였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로 진격해 독립전쟁을 벌이려 했던 중경 청사. 하지만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며, 우리 광복군이 준비한 독립 전쟁은 무산됐다.

광복군 중에는 20대, 우리또래의 학생들도 함께 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부모 곁을 떠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을 각오했다. 기자단의 손민지(이화 VOICE)양은 “우리또래의 여느 학생처럼 한창 꿈 많았을 나이에 그들의 미래는 모두 조국 광복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십 년이 흐른 후, 그 당시 그들 또래의 학생들은 대학생기자단이란 이름으로 이곳을 찾았다. 자주적인 독립전쟁을 치르겠다는 무산된 광복군의 꿈, 허탈한 그 마음 한 켠을 알 것만 같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