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의 ‘깨달음’이나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은 다 같이 이성적 판단이나 과학적 분석 규명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언어 문자로도 전달하기 어려운 특수한 심리상태이다.
그러나 선종은 이러한 내용 즉, ‘행위가 없고 형상이 없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말을 해야 했으며, ‘마음으로 만 전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표현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선과 예술의 융 복합’이었다.
이는 혜능이 말한 “일체 만법은 모두 자신에 있으며, 자심을 좇아서 문득 진여본성을 드러내려 한다.”를 실현 하려는 것이었으며, 내심의 세계와 외재적 사물을 하나로 융 복합시킴으로써 선적사유를 통해 미적 인식을 경험하는 희열을 얻게 되었다. 이를 언어문자로 서술하면 ‘선시’가 되고 시각형상으로 표출하면 ‘선화’이다.
당시의 지식층들은 이 ‘선’과 ‘시’와 ‘그림’을 하나로 융합하여 문인화 즉, 수묵화예술을 창출해냈다. 이렇게 출현한 수묵화는 이후1,000동안 동아시아 미술의 근간이었으나, 이제는 그 깊고 오묘한 특성을 많이 잃었다.
그런데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그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이다. 이미 1세기 전 부터 동서미술의 결합내지 선종과의 융 복합을 꾀했던 것이다.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전시장에 소변기를 거꾸로 진열해놓고 ‘샘(fountain)’이라는 명제를 부쳤는데, 이는 곧 선종의 기봉(機鋒), 화두(話頭)와 다르지 않다. 당말 어느 선사는 제자가 “무엇이 불법대의입니까?” 물으니 “허공에 철산이 지나가고 산꼭대기서 파도가 하늘 높이 일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현대미술과 선은 상통하며 그 의미가 난해하고 표현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식방법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다이즘’을 난해한 미술이라고 했으며 이후 출현한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자동기술법 등 모두가 선종의 자아실현의 방법을 회화로 표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1세기동안 이것의 외형만을 추종하는데 급급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인데, 지금 세계 도처에서 ‘선’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물론 실제수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선종이 출현하여 당시 사상계를 지배하고 문화예술을 혁신시킬 때처럼, 다시 선과 융 복합을 통한 새로운 문화 창출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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