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을 하며 한국을 보니 반년 만에 더욱 나라가 두 쪽이 된 듯하다. 양쪽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반년 전에도 진행 중이던 의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거기에 ‘심려 끼쳐드려 유감’이니 ‘철회 했으니 괜찮다’는 말들은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작년 여름, 나는 인도네시아의 ‘반다르 람풍’으로 파견을 나갔다. 총 4명으로 이루어진 봉사단은 성공적인 활동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파견을 철저히 준비했다. 이 덕에 인터넷 없는 공간에서 IT프로젝트와 정보화 교육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활동당시 단원들의 관계는 그리 순탄치 못했다. 한 공간에서의 단체생활로  인한 개인적인 갈등과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발생하는 공적 갈등은 예상치도 못한 시기에 터져 나왔다. 단원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대화하고 토론했지만, 터져 나오는 갈등의 홍수를 막아내기엔 부족했다. 출발 전 선명하게 보이던 우리의 목표는 갈등이라는 먹구름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위기 속에서 가르침을 준 것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였다. 그들에게 갈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열정적인 현지 코디네이터 덕에 파견도시는 물론, 9시간이 넘게 걸리는 도시까지 많은 곳을 다니며 교육을 했지만, 그 누구하나 화내고 얼굴 붉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특징 때문이라고 여겼다. 평화를 지향하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이라서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적고, 또 생겨도 숨기는 ‘연기’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갈등이 없었다. 아니 그들만의 고유한 대화, 사고방식을 통해 갈등을 차단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현지인들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 상대방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다. 그 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교환했다. 이때 시작하기 전 서로 ‘우리들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기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입장에서의 대화가 아닌,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공동체로써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어려움을 성토해 나갔다.
결국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화를 내지 않던 이유는 공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종국에는 같은 ‘모두의 안녕과 평화’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저에 깔고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우리나라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대화 시작 전, ‘말’로 상대방의 ‘안녕과 평화’를 빌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우리사회의 이성적, 일반적인 그리고 올바른 사회의 구성원은, 그가 속한 사회나 국가의 ‘안녕과 평화’, 즉 사회나 국가의 종속과 번영을 위한다. 단지 대화시작 전 하나의 구절로 인사를 건네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처럼 우리도 같은 목표를 기저에 가지고, 이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대화가 아닌 공동의 번영을 위한 대화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오늘날의 극심한 대립은 불필요하며 적절치 못하다. 하루 빨리 사회구성원 모두의 응당한 목표인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하나의 학교, 사회 그리고 대한민국이 되기를 희망한다.
 유학생활을 하며 한국을 보니 반년 만에 더욱 나라가 두 쪽이 된 듯하다. 양쪽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반년 전에도 진행 중이던 의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거기에 ‘심려 끼쳐드려 유감’이니 ‘철회 했으니 괜찮다’는 말들은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작년 여름, 나는 인도네시아의 ‘반다르 람풍’으로 파견을 나갔다. 총 4명으로 이루어진 봉사단은 성공적인 활동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파견을 철저히 준비했다. 이 덕에 인터넷 없는 공간에서 IT프로젝트와 정보화 교육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활동당시 단원들의 관계는 그리 순탄치 못했다. 한 공간에서의 단체생활로  인한 개인적인 갈등과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발생하는 공적 갈등은 예상치도 못한 시기에 터져 나왔다. 단원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대화하고 토론했지만, 터져 나오는 갈등의 홍수를 막아내기엔 부족했다. 출발 전 선명하게 보이던 우리의 목표는 갈등이라는 먹구름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위기 속에서 가르침을 준 것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였다. 그들에게 갈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열정적인 현지 코디네이터 덕에 파견도시는 물론, 9시간이 넘게 걸리는 도시까지 많은 곳을 다니며 교육을 했지만, 그 누구하나 화내고 얼굴 붉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특징 때문이라고 여겼다. 평화를 지향하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이라서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적고, 또 생겨도 숨기는 ‘연기’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갈등이 없었다. 아니 그들만의 고유한 대화, 사고방식을 통해 갈등을 차단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현지인들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 상대방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다. 그 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교환했다. 이때 시작하기 전 서로 ‘우리들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기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입장에서의 대화가 아닌,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공동체로써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어려움을 성토해 나갔다.
결국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화를 내지 않던 이유는 공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종국에는 같은 ‘모두의 안녕과 평화’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저에 깔고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우리나라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대화 시작 전, ‘말’로 상대방의 ‘안녕과 평화’를 빌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우리사회의 이성적, 일반적인 그리고 올바른 사회의 구성원은, 그가 속한 사회나 국가의 ‘안녕과 평화’, 즉 사회나 국가의 종속과 번영을 위한다. 단지 대화시작 전 하나의 구절로 인사를 건네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처럼 우리도 같은 목표를 기저에 가지고, 이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대화가 아닌 공동의 번영을 위한 대화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오늘날의 극심한 대립은 불필요하며 적절치 못하다. 하루 빨리 사회구성원 모두의 응당한 목표인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하나의 학교, 사회 그리고 대한민국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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