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 막는 해안 요새에서 엑스포를 개최하기까지

▲ 여수 연등천에서 본 여수구항의 해양공원(왼쪽), 거북선 대교, 돌산도(오른쪽).
-해류가 만나는 도시, 여수(2)

한반도에서 여수의 위상과 기능이 변화된 계기는 고려 말인 1223년(고종 10년) 김주(현재 김해)에서 시작된 왜구의 약탈이었다.
왜구는 1223년부터 1392년까지 한반도를 519회나 침략했다. 특히 고려의 멸망기인 1350년(충정왕 2년)부터 40년간은 역사적으로 가장 침략이 빈번한 시기였다. 여수는 쓰시마 섬, 이키 섬에 근접해 있으므로 왜구의 침략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여수는 1400년대 중기부터 해안의 변방 농어촌에서 군사병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어촌에서 해안 요새로
1423년(세종 5년), 조선의 중앙정부는 해안 군사방어의 중요성을 인식해 한반도의 방어체계를 내륙의 산성 중심에서 서해안ㆍ남해안의 석재 군사요새로 전환하여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1479년(성종 10년)에는 기존의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이하 전라좌수영)’이 순천도호부로부터 여수로 이전하였다. 또한 여수의 종고산 남쪽사면을 따라 남동쪽의 자산(紫山/資山)/척산(尺山)을 따라 군자동, 동산동, 관문동, 고소동, 중앙동 일대의 평지에 전라좌수영성이 조성되었다. 이곳은 전라좌도 수군의 해군기지로서 1479년부터 1894년까지 약 400년 동안 왜구침입을 방어하는 남해안의 군사방어기지로 기능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1545-1598년)은 이곳에서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저지하고 격퇴하였다. 때문에 전라좌수영성은 1593년(선조 26년)부터 1601년(선조 34년)까지 전라, 충청, 경상의 삼도를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부로서 조선수군의 거점으로 왜구침략을 막는 해상권의 중심부였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순천부와 낙안, 보성, 고흥, 광양의 5개 군현은 물론 사도, 방답, 여도, 발포, 녹도 등 5개 수군기지를 광역권 차원에서 총괄하였다.
전라좌수영성의 내부에는 동서남을 잇는 T자형의 도로체계와 세 개의 성문들을 두었다. 서문(통의문)은 교동의 골목길을 통해 순천과 연결되었고, 동문(총인문)은 동북쪽의 현재의 동산동, 공화동, 만덕동과 연결되었다. 전라좌수영성의 주진입부는 남문(진남문)으로서 현재 진남상가길과 통제영 4길 주변에 시장이 조성되었다. 남문 앞의 종포에는 해안에는 군선이 만들어지거나 정박하는 조선소와 계선장이 중앙동 로터리와중앙1길 부근에 입지해 있었으며 주변에 주거지 역시 조성되었다.
여수는 선박제조의 거점이기도 했다. 특히 여천의 망마산을 중심으로 북쪽에 비봉산, 고락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는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 마을 ‘시전동(枾田洞)’이 입지해 있었다.
이순신은 망마산-고락산의 서쪽 ‘며포’ 만(灣)에 거북선 조선소를 만들었다. 해안에 방파제 역할을 하는 지름 40 m의 원형의 굴강(掘江)을 조성하여, 군선의 정박과 수리를 했다. 또한 조선소 주변에는 무기를 관리하는 세검정과 군기창이 있었으며, 선소를 방어하는 기마병의 훈련장이 조성됐다.
전라좌수영성의 남쪽, 현재 중앙동 로타리로부터 자산공원을 따라 오동도까지 웃종포, 종포, 아랫종포, 그리고 삼일동의 낙포, 돌산 군내리의 방답진에도 모두 조선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종포의 조선소 역시 거북선을 제작했으며, 낙포의 조선소는 판옥선을 제작하기도 했다. 

▲ 여수 자산의 충무정(중앙), 여수구항, 남산(먼 배경).
간척사업, 지금의 여수를 만들다
그렇다면 우리의 ‘밤바다 여수’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아는 여수 구(舊)도시는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의 도시개발을 통해 그 물리적인 체계와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도시변화는 거대한 간척사업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개조된 해안선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해안 매립 이전 ‘조선말의 여수’는 현재의 여수지도에서 확인이나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규모와 형태가 크게 다르다. 특히 여수의 일본인들은 한국인과의 토지소유권의 충돌과 분쟁을 최소화하며 항구수변과 거대농지를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연등천(蓮燈川)의 주변과 종포(鍾浦)의 해안, 그리고 배후의 광양만 갯벌을 간척하였다.
일본인들이 본토에서 축적한 수변매립과 토목사업의 기술은 오사카와 도쿄에 형성된 항구와 수로의 변화를 통해서도 쉽게 관찰된다. 당시 일본의 매립시공과 토지개발사업의 경쟁력과 자본력은 네덜란드보다도 앞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여수의 해안매립은 1910년부터 일본의 민간기업들에게 매우 좋은 투자대상이었다.
매립으로 만들어진 여수의 중앙동에는 여수의 항구와 철도, 도시중심부가 조성되었으며, 또한 배후의 대포리와 소라면에는 소라천과 쌍봉천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업농장이 자리 잡았다. 당시 진행된 여수의 대표적인 매립사업은 여수구항의 부지매립(1907년), 진남관 주변의 중앙동과 교동의 수변 매립(1914-1916년), 진남관 남쪽의 중앙동부터 자산 해안까지 갯벌매립(1917-1933년), 여수신항의 부지매립(1935년)이다.
여수 구도시는 이러한 매립사업들을 통해 종고산 서쪽의 도시중심구역인 본정(本町), 연등천을 따라 여수서초교와 공장구역의 서정(西町), 그리고 종고산 서쪽부터 동북쪽의 여수신항까지 주거, 항구, 동시장의 동정(東町)으로 나뉘었다. 당시 서정, 본정, 동정은 여수구항의 중앙동 로터리에서 공화동의 여수역과 여수신항까지 연결하는 중심상업가로인 본정통(현재의 중앙로)와 동문로를 따라 선형으로 연결되어 점차 서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였다.
한편 여수의 얼굴이었던 종고산 남사면의 전라좌수영성은 1910년을 전후로 해체되었으며, 성벽이 해체된 구릉지들을 따라서 주거지가 조성되었다. 전라좌수영성내의 수군절도사 사무소인 운주헌(運籌軒)은 1897년부터 여수군청으로 사용되었으나 1917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시기에 여수의 상징건물인 진남관(鎭南館)은 여수공립보통학교(1911년, 현재 연등천변의 여수서초교)와 여천공립심상소학교(1939년, 현재 공화동의 여수동초교)로 사용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여수중학교와 여수야간중학교가 입지했다.
당시 한국인의 생활거점은 서정의 연등천변에 조성된 서시장(西市場 1934년)으로 여수5일장과 가축시장을 겸한 여수의 가장 큰 시장으로 번성하였다. 한편 여수 구도시에서는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일본정부의 이민정책에 따라 일본어민들의 여수정착이 진행되었으며, 이 시기를 전후로 여수면의 일본인 인구는 최고치인 약 3,000명에 육박하며 여수면 인구의 약 1/4을 구성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인들은 이민정착 초기인 1910년대에 종포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며, 이후 1920년대를 지나면서 종고산과 자산 사이(현재 동정동)의 격자형 도시블록, 그리고 연등천을 넘어 봉산동의 남산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당시 일본인들의 중심 거점은 현재 여수기상대 부지에 조성된 여수신사(1918년)였다. 이후 여수신사는 1940년 현재 여수공업고교-종고중교 부지로 확장 이전하였으며 일본사찰인 정행사(正行寺)가 중앙동에 들어섰다. 또한 현재 동문동우체국 동쪽으로 여수 최초의 상설시장인 동시장(東市場, 1932년)이 조성되었고, 여천공립심상소학교(1939년, 현재 공화동의 여수동초교)가 중심이 됐다.

여수 신항의 조성, 그리고 엑스포
흥미로운 것은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 주도로 여수가 수산물생산의 거점으로 성장한 것이다. 목포세관 산하의 여수감세서(1911년, 이후 여수세관)가 조성되어 항구로서 해운 행정을 시작했으며, 여수구항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직접 항만공사와 항만행정을 관리하는 ‘지정항’이 되었다.
당시 여수구항의 동쪽에 위치한 종화동의 수변(현재 여수해양공원 주변)에는 키조개 통조림공장(1914년)을 포함한 어업조합들이 여수수산시장(1926년, 현재 여수선어시장)을 중심으로 수산업생산과 유통상권을 구축하였다. 이 시기에 여수의 국동에는 수산생산의 근대교육과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1917년, 이후 여수수산대학교이며 현재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설립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치도(治道) 10개년 계획’ 하에 여수와 순천을 연결하는 신작로(1910년, 현재 국도17번과 유사함)가 건설되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는 광려철도선ㆍ전라철도선의 종착역인 여수역(1930년)과 여수신항ㆍ외항(1930년)이 남조선철도회사의 주도로 함께 조성되었다.
여수신(新)항의 개발은 원래 1923년부터 여수구항의 확장을 목적으로 여수역과 여수수산물시장의 조성사업과 함께 계획되었다. 그러나 중앙동과 교동의 부지확장이 어려워 조선총독부는 공화동과 수정동 해안으로 위치를 변경했다. 이에 따라 여수신항에는 현재 여수엑스포 행사장(2012년) 부지에 대규모 매립사업으로 최대 3,000톤급 선박의 정박시설과 방파제가 들어섰으며, 인접하여 세관검사소, 보세창고, 화물창고 등이 조성되었다. 이후 여수신항은 1931년 여수-시모노세키(下關/Shimonoseki)와 여수-하카다(博多/Hakata)의 여객노선들이 운항하며 대일본 도시들의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현재 여수엑스포 중심광장 부지에는 한반도의 최남부 철도종착역인 (구)여수역(1930년)과 여수항역(1937년)이 조성되어 광려철도선(광주송정리-순천-여수, 1930년)과 함께 운영됐다. 이에 여수신항의 주변해안에는 호남의 쌀, 면화, 수산물을 처리하고 보관하는 정미소, 면화공장, 창고 등이 성업하였으며, 일본인 자본으로 조성된 조선소들 역시 운영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시멘트, 연탄 등의 제조공장들이 여수신항에 집중 조성되었다. 먼저 쌍용시멘트 여수공장(1969년), 동양시멘트 여수공장(1979년)이 들어섰다. 정부는 2003년부터 남해안 지역 및 국토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여수의 엑스포 행사 유치사업을 추진했으며 2007년 유치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012년에 덕충동 여수신항을 포함한 주변의 270만 제곱미터 부지에 총 공사비 2조 1천억 원의 여수엑스포 행사장이 조성되었다. 
이와 함께 여수신항 일대에는 도시인프라 이전과 조성이 진행됐다. 먼저 기존 여수역사(1980년)의 부지에 여수엑스포의 중심광장이 조성되었다. 이어 여수역을 2009년 덕충동으로 이전, 총 공사비 910억 원을 들여 배의 선두모양을 형상화한 ‘여수엑스포역사’로 정비하며 엑스포를 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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