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대화 상지대 교수

세월호 참사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왜 일어났는지, 300명 이상의 젊은 목숨이 왜 죽어야 했는지 밝혀진 것이 없다.
같은 시기에 비리 구재단이 상지대에 입성했고 그 비리 당사자가 이사가 되고 총장이 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에 놀란 국민들은 다시 상지대 사태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상황이다. 이 두 사건은 바다와 땅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질적인 부정의와 부조리의 일각이 노출된 것이다.
상지대 사태는 역사가 길다. 60년 상지대 역사의 절반 이상이 사학비리를 매개로 한 분규로 점철되었다. 상지대는 80년대 내내 분규의 한가운데 있었다. 90년대 들어 비리 구재단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임시이사체제 하에서 대학의 민주화와 발전을 추진했다. 2000년대에는 그 성과를 인정받아 정이사체제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보수정권의 지원을 발판으로 비리 구재단이 되돌아오는 참극이 연출되었다.
상지대 사태의 중심에는 김문기가 있다. 세월호의 유병언과 같은 역할이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유병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처럼 상지대 사태 역시 김문기로 축소될 수 없다. 김문기는 우리나라 사학비리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가 족벌체제를 구축하여 사학비리를 자행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육용 재산을 사유재산으로 인식하고, 교육기관을 사기업으로 간주하고, 교육의 공공성 대신 영리추구에 탐닉하는 반교육적 사고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의 교육환경이 문제이다. 보수정당은 노무현정부에서 개정된 사립학교법을 대폭 개악했다.
대법원은 사학의 재산을 사유재산이라고 판결해주고 쫓겨난 비리 구재단에게 복귀의 길을 열어주었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비리 구재단이 학교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교육부는 이 과정을 수수방관하면서 직무를 유기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했다. 비리재단, 보수정당, 법조계, 정부로 구성되고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는 철통같은 사학비리유착연대가 작동한 것이다.
이 구조 하에서 설립자 아닌 김문기는 설립자를 참칭한다. 재정적 기여가 거의 없으면서도 사재를 털어 대학을 세웠다고 말한다. 상지대에 사학비리종합선물세트라는 오명을 주었으면서도 음해를 받았다고 강변한다. 사학비리로 구속되어 실형을 살았으면서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이 신념화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사학비리가 개인의 실수나 일탈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 속속들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은 학생을 고객으로 돈벌이하는 곳이 아니고 사학은 설립자의 사기업이 아니다. 더구나 기업에서도 하지 않는 족벌운영과 비리행위를 교육기관에서 자행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김문기와 구재단은 당연히 상지대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대학을 대학답게 운영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론을 만드는 국민적 노력이 있어야 대학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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