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상현 국어국문학과 3

도시의 풍경은 다채롭다. 풍경은 사람들의 삶이고 의미이다.

좁은 골목에서 폐지를 정리하는 노인의 풍경, 고층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풍경, 허겁지겁 옷을 가다듬으며 전철로 향하는 사람의 풍경, 교복을 입고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등교하는 학생의 풍경, 이 풍경들에는 사람들의 삶과 그 의미가 담겨있다. 하지만 이 풍경들 속에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금지표시판이다.

아파트단지에는 외부인 출입금지, 도로에는 통행금지, 골목에는 쓰레기 무단투척 금지, 주차구역에는 주차금지, 건물에는 흡연 금지, 금지, 금지, 대한민국은 금지공화국이다. 도시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조금만 걸으면 서 너 개의 금지표시판은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금지표시판에 너무나 무감각하다. 삶 전체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노출되어서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 금지표시판이다. 문제는 길거리 뿐 아니라 우리 삶의 풍경에도 금지표시판들이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는 금지의 억압에 대해서, 그것이 삶의 풍경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라깡의 말처럼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나이에 맞게 해야 할 것들이 정해져 있고 그 이외의 것들은 금지된다. 대학은 가야만 하고, 취업을 해야만 한다. 남들이 다 하니깐 나도 해야만 한다.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것들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것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해야만 한다. “남들이 하니깐 저도 뭐라도 해야죠”라고 말하는 취업준비생의 한탄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한탄이다. “왜 이것을 금지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어리광이처럼 받아들여지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의 변명이 된다. 우리를 위한다는 금지들이 어느새 우리의 목을 조르고 있는 형세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시간에 맞춰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먹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저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즐겁다. 필자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들은 동물이 아닌가? 인간은 동물이다. 이 명제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의 명제가 아니다. 학생들은 일주일 내내 같은 길을 따라 등교하고 같은 시간표에 맞춰 공부한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일을 하며 정해진 봉급으로 살아간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깐,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깐, 다른 행동들은 금지되었으니깐 그렇게 살고 있다.

풍경들은 다채롭지 않다. 모든 풍경들은 금지표시판이 들어있는 획일적인 풍경이다.  참으로 끔찍하다. 코제브가 말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는 금지공화국의 동물들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풍경 속에서 금지표시판을 의식할 수 있다면, 그것을 뗄 용기가 있다면, 모두가 각기 다른 풍경을 만들 수 있다면 희망은 있다. 울타리 안에서 그저 ‘살아가는 동물’이 아닌 ‘살아있는 동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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