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재 정치외교학과 객원교수

1852년 2월 26일 새벽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인근 간스바이에서 영국 수송함 버큰헤드호가 침몰했다.

군인과 민간인 포함 643명이 승선한 이 배의 생존자는 193명이다. 2014년 4월 16일 단원고 학생 등 476여명이 탑승한 세월호가 침몰했다. 생존자는 172명이다.

두 사건 모두 대형 참사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 사건은 영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 먼저!’라는 세계 표준의 일명 ‘구명보트’ 윤리가 버큰헤드호 사건으로 정착되었다. 이 규범의 확립 전까지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많이 죽고 다친 것은 여성과 어린이였다. 버큰헤드호 윤리는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사건에서도 준수되었고, 1951년 엠파이어윈드러시호 침몰 시에도 지켜졌다.

세월호 사건은 버큰헤드호 사건에 비견되는 대형참사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는 2014년 대한민국의 봄은 형언하기 힘든 절망적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전국이 온통 노란리본으로 뒤덮였고, 국민들은 정부를 향해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슬픔과 뒤엉킨 분노는 정권 심판론으로 향하고 있다. 혹자는 ‘국민이 미개해서 그렇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혹자는 ‘대통령과 같이 눈물 안흘린 사람은 백정’ 운운하고 있다. 제발 그 입 다물라! 국민들의 절망적 분노가 폭발한 이유를 정말 모르는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다.

아니 최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에 대한 분노다.

국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국민이다. 국민의 생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는데, 정부는 골든타임을 속절없이 흘러 보냈다. 국가와 어른을 철썩 같이 믿었던 어린 생명들이 온갖 비리와 반칙으로 수명을 연장해온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동이다. 가슴 저리도록 숭고하다.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끼를 벗어준 앳된 여승무원이, 제자들을 위해 물이 차오르는 아래층 선실로 향한 선생님이, 친구와 이승의 마지막 끈을 묶어둔 우정이, 무전기를 양손에 들고 발견된 주검이 그렇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정부는 없다.

정부는 정부답지 못했다. 방송과 신문에는 온갖 변명과 은폐가 판을 쳤고, 곳곳에서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의혹들이 양파껍질 벗기듯 이어졌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 정권을 심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은 전쟁 통에 도망간 정부, 총칼로 강압한 정부, 자기 잇속만 챙긴 정부에 지쳐 이제 정부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아직도 국민들의 분노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 모르는가? 입에 발린 ‘존경’은 필요 없다. 우리는 정부다운 정부, 염치를 아는 정부를 원한다. 호도하지 말라. 이것이 정권심판론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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