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시대의 도래

 
정전협상이 시작되면서 피난지에서 운영되던 전시연합대학은 사실상 해체기에 접어들어 학생들도 소속대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해체된 전시연합대학은 지방문화의 육성과 지역사회의 특수성을 살리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각 도의 국립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함께 16개에 달하는 사립대학이 새로 설립되거나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우리학교 역시 이 시기에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기준은 3개 단과대학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재단 이사회는 1951년 11월 25일 피난지인 경남교무원에서 사찰림 일부를 농림학부 설치와 경영에 충당키로 결의하였다.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1952년 2월 1일 농림대학 증설과 대학원 신설을 골자로 한 인가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고, 1953년 2월 6일 정식으로 종합대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다.

이로써 우리학교는 불교학과·영문학과·정치학과 등 3개 대학원과 불교대학·문과대학·법정대학·농림대학 등 4개 단과대학을 갖추게 되었다. 농학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은 서울대와 서울농업초급대학(서울시립대 전신)의 원예과 정도였고, 사립대학으로는 우리학교가 처음이었다.

초대 총장에는 중앙불전에서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권상로 박사가 취임하였다. 종합대학 승격으로 교수진의 확보와 제반시설의 보완이 긴요했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컸다. 많은 교수와 강사들이 강제 납치되거나 화를 당하였기 때문에 교과를 편성하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상로 총장이 고령을 이유로 6개월 만에 자진 사퇴하자 당시 (주)한국광산 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백성욱 박사가 제2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학교는 3년여의 임시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1953년 8월 20일부터 서울 귀환을 시작하여 9월에 정상적으로 개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교정은 인적이 끊긴 채 잡초만 우거져 있었고, 교내 도로와 축대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또 정문과 인쇄소가 위치해 있던 건물 2개 동은 폭격으로 소실된 상태였다. 결국 교직원들은 공터에 가건물을 짓고,조명기 교수가 개인적으로 계약한 필동 소재의 유치원 대지와 사찰 건물을 빌려 가까스로 강의실을 마련하였다. 또 피해를 입은 도서관도 서둘러정리하고, 전란기에 시장에 쏟아져 나온 도서들을 구입하여 약 6만 8천여부의 도서를 구비하였다. 이렇듯 전쟁으로 황폐화된 대학의 복구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된 것은 1953년 11월에 이르러서였다.

이용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