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현실적 진실추구

새로운 表現(표현)방법과 觀客(관객) 접근시도
近代劇(근대극)의 공약․과정을 배제

 
오늘 文化(문화) 전반에 있어서 다른 어느 時代(시대)보다 뚜렷한 특징은 ‘進步(진보)’와 ‘無秩序(무질서)’의 思潮(사조)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大學人(대학인)들은 자칫하면 ‘새로운 것’의 추종자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文化(문화)풍토를 보다 ‘아카데믹’ 하고 本質的(본질적)인 것으로 천착하여야 하겠다. <편집자>
 
소위 전위연극, ‘아방가르드 플레이’(Avant-Garde Play)란 일차대전 후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일환이다. 즉 기성예술의 형식과 관념을 철저히 부정, 파괴하고 새로운 경지를 구축하려는 혁신적 예술운동을 말한다. 미술, 음악, 문학, 건축 등에 많은 변혁을 가져온 이 운동은 영화에 있어서도 한 장르로 대두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경에 불란서 영화계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했다. 흥행만을 위주로 하던 영화의 목적을 순수한 영화적 표현수단을 강조하여 이른바 실험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연극에 있어서 전위성이 싹트기는 이들 건축, 미술, 문화 등과 같이 1차 대전 후였지만 그것은 그동안 내려오는 통속극의 도전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반복의 실험을 면치 못하다가 2차 대전이 종료되고 난 후부터 차츰 대중 속을 파고들게 되었다. ‘反演劇(반연극)’이나 ‘앵그리 영맨’의 극들, 그리고 그 외의 전위적 요소를 지닌 극들은 모두 전위적 연극임엔 틀림없다. 그럼 여기서 전위연극의 정통이랄 수 있는 ‘反演劇(반연극)’을 중심으로 그 내용과 형식 및 성격과 그들 극의 목적 등을 개관해보기로 한다.
 
이른바 전위연극의 정통이랄 수 있는 불란서의 ‘反演劇(반연극)’(앙띠데아뜨르)이 시작되기는 1950년 이후이다. 그러나 시작된 지 얼마 안가서 이것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었으며 특히 미국의 경우엔 앞으로 반연극의 가능성을 다분히 보여주었다. 샤무엘 베케트를 비롯하여 이오네스꼬, 아다모프 등 일련의 반극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처음 상연될 때 관객들은 브로드웨이에서 판을 치는 모든 연극 장르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연극이라 더욱 관심을 기우렸고 모여 들어야만 했다
유진․이오네스코의 ‘무소’가 제로 모스텔, 에리 와리지 등의 명연기로 꽤 오랫동안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었고, 불란서의 이색적 작가 쟝 쥬네의 ‘흑인’이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각광을 받는 등.
이러한 움직임은 결코 테네시 윌리암스와 아서 밀러, 윌리암 인지, 패디 사예프스키 등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주었다.
젊은 실험작가들이 당시 유행하던 희극적 뮤지컬이나 낡은 수법의 작품만을 공연함에 골방이나 지하실로 전전하던 것이 이를 계기로 조금 대우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오프 브로드웨이에서의 실험은 계속되었지만) 재크 미쳐드슨, 재크 갤버, 아서 코피트와 애드워드 앨비는 反演劇(반연극)의 영향을 조금이나마 받은 젊은 기수들이었다.
반연극은 근대연극이 갖는 모든 극적 공약과 극적 과장성을 배재하고 인간의 현실적, 존재적 진실을 찾아 헤맨다.
실존주의와 같이 내적 존재세계를 파헤치는 일도 거부하고 미국의 테네시 윌리암스나 아서, 밀러모양 인간 심리의 사건 처리마저 부정해버린다.
이들은 무대에서 울고 웃고 떠들지 않으며 진지한 태도로 진실성에 육박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따라서 관객도 현실적 존재에 빠지며 하나의 관극자가 아니라 극중 인물로서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구경꾼이 아니라 자신과 무대 위의 극중 인물 또는 자기와 자아(自我(자아))와의 삼각관계 속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反演劇(반연극)이 모두 그러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작가가 있으면서도 같은 계열에 있게 마련인 경우와 같다.
그럼 여기서 세계전위 극작가의 쌍벽이랄 수 있는 유진 이오네스코와 샤무엘 베케트의 몇몇 작품을 훑어보기로 한다.
1950년 ‘대머리 女歌手(여가수)’란 자그마한 극으로 파리극계에 데뷔한 이오네스코는 그의 ‘대머리 女歌手(여가수)’에서 대머리 여가수는 등장시키지 않고 있어 관객의 노여움을 샀으며 우리가 지금까지의 극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다.
스미드 부처와 마르뗑 부처, 그리고 마리란 하녀와 소방대장의 여섯명이 등장하는 이 극은 제 1장에서부터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대사의 중복, 행동의 반복만을 요구하며 틈틈이 관객과 대화의 광장을 여는 것을 추구한다.
주변의 시계소리도, 그들의 대화소리도 모두가 현실성을 무시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현실에 접근하고 있는 듯 싶다.
그의 대표적 일막극 ‘의자들’ 속에도 ‘대머리 여가수’와 같은 면은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언뜻 보아 관객을 외면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이 있으며 늙은 부부는 등장부터 날때까지 부조리의 한 단면을 상징한 듯 하면서 보러오는 관객들이 직접 이 늙은 부부를 초대한 입장-말하자면 극중인물이-되는 것이다.
풍자와 해학, 평범을 넘지 못하는 그야말로 부조리한 인간생활을 평범하게 보려는 태도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 작품만 보아도 그의 다른 작품까지도 극적 사건은 중요시하지 않으며 그 어떤 이상과 희망, 그렇다고 타락을 원치도 않는 평범의 카테고리가 대사의 아니, 사건의 연속과 반복으로 인간의 부조리성을 규명하고 있다.
난해성을 면치 않고 있는 것이 反演劇(반연극)의 특징처럼 이오네스코의 희곡은 극을 ‘보이는 자’(연기자) ‘보는 사람’(觀客(관객))이나 모두 어리둥절한 가운데 폭발하고 비웃음을 사게 하고 어떤 면에선 더욱 냉철하게 한다.
베케트의 극 역시 이오네스코와 비슷하지만 대사나 행동의 중복은 가져오면서도 이오네스코처럼 간결함은 없으며 더욱 심각하려 애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보면 反演劇(반연극)들이 모두 그렇듯 다섯 사람만이 등장한다.
시골 부랑자 두 사람이 길거리 나무 밑에서 고도우를 기다린다. 그 때 난폭하고 거만한 폭군이 기다란 끈에 노예를 매어 몰고 들어온다. 수줍어하는 소년이 두 번의 막이 끝날 무렵이면 나타나서 고도우가 오지 않는다고 일러준다.
두 사람의 부랑자는 방탕하면서도 조바심이 앞서 있으며 폭군의 입장도 복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다섯 인물은 모두가 무엇을 목메어 기다리나 그것은 나타나지 도 않으며 나타날 리도 없다. 고도- 그것을 관객에게 마껴 버리므로 관객의 생각에 따라 해석하게 하는 작가적 태도를 취한다.
말하면 까뮤나 싸르트르가 그들의 작품에서 심각하게 해부하고 있는데 반해 이들 반극작가들은 심각한 계산위에 우스꽝스럽게 뒤틀리게 조직함으로 코미디의 성과를 얻도록 한다.
이런 점은 애드워드 앨비도 이들에 못지않게 접근하고 있다.
앨비는 실패한 동성애의 위기를 그린 ‘동물원 얘기’ 이후 문제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선 공포와 희극적 요소가 통일된 하나의 저류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모든 작품을 보면 모두가 표현방법의 개혁, 관객과의 새로운 접근, 좀 더 깊은 인간의 심연을 추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내용보다는 표현방법, 이를테면 연기나 연출에 큰 발전을 기약할 수 있게 된 게 확실하다.
이상으로 반연극을 개관해 보았다.
이러한 반극운동 이를테면 전위 연극의 일환일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전위극 ‘리빙.씨어터’ 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미 주리언 벡크와 주디스 마리나 부부에 의해 벌써 20년째 독립해 실험하고 있는데 5년 전인가 케네트 브라운의 ‘다리’의 상연으로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은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전혀 사건의 전개 같은건 담을 쌓고 있으며 인간의 기본조건 마저 박탈당한 한 해병대 포로들의 생활을 다큐멘터리 수법으로 묘사함으로써 관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고통을 체험하도록 한다.
현대인의 기계화, 비인도주의에 대한 냉철한 고발의식이라 생각된다.
드라마가 없으면서도 극은 존재하며 극을 해설하는 해설자나 프론트 따윈 아예 없으며 관객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자기 자신의 갈등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대는 무대만이 무대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전위연극은 연극의 종합성을 더욱 추구하여 인간의 진실된 이면의 세계까지 형상화하려는 연극의 혁명적 목적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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