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건 영어영문학과(94졸) 동문

내가 동악을 서성이던 90년대 초 봄 학기 시작을 알리는 구 중앙도서관 앞 ‘등록금 투쟁’의 풍경이 21세기 ‘반값 등록금 투쟁’과 기억이 겹쳐진다. 지난 여름 학교에 있어야 할 어느 아이들은 대학의 교육적 특권을 누리기도 전에 그들도 모를 빚을 떠안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전전하고 있었다. 대학은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 편에 서 있다고 하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정부는 대학에 온갖 잣대를 들이대어 부실대학 운운하면서 대학을 기업화하여 ‘대학 주식회사’를 설립하라고 종용하고 있다.

시장과 자본의 논리만을 좇아 ‘사람’이라는 단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고속열차에서 일찌감치 하차한 이들의 일상도 좋아보이진 않는다. 고령화 사회를 걱정하며 정부는 출산을 장려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과다한 교육비와 양육비에 대한 걱정뿐이다.

연일 방송에서는 이른바 일등만이 살아남아야 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살포하고 있는 동안 대학은 정부의 요구에 발맞춰 ‘알짜, 예비, 잉여’로 나눠 학생들을 관리하고 있다. 이제 대학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더불어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라는 수사조차 지웠다. 학생들은 이런 시스템 안에서 차별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지독한 서열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서열주의에 의해 선택되지 않으면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진입한 학생들은 물려받은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점과 서열주의에 의해 선택됐다는 의식이 작용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중하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서열주의에 의해 버림받아 주체성을 갖기엔 아득하다. 선택된 자든 버림받은 자든 인간성 훼손의 피해자이긴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분노와 저항’의 표현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시장과 기업의 논리를 앞세워 부실대학 퇴출이라는 명목으로 각가지 지표와 숫자들을 들이대며 대한민국의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그 사이 대학은 요구된 지표와 숫자를 맞추기에 교육과는 거리가 먼 일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 학생들은 꿈을 잃어가고 있다. 대학과 구성원들이 등급으로 분류되고, 자기 서열을 스스로 규정하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림으로써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잉여’가 되어가고 있다. 교과부 관료들이 몇 푼의 돈으로 교육과 인간을 외면하고 대학을 저울질하는 동안, 훼손되어버린 인간의 존엄성과 비루함과 굴종, 더불어 교육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헤아리고 공동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한 삶을 기대하는 것은 허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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