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에 대한 반증으로 쓴 작품


人間(인간)의 내면적 狀況(상황) 그려
심연의 추구… 허망과 幻滅(환멸) 가져와


◇‘幽靈(유령)’은 ‘입센’ 그 自身(자신)을 알고 近代(근대) 리얼리즘 戱曲(희곡)이 아직도 未熟(미숙)했던 그 터전을 우리에게 소상히 일러주는 作品(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作品(작품)은 결코 ‘입센’의 代表的(대표적)인 作品(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作品(작품)은 그의 問題劇(문제극) ‘人形(인형)의 집’이라는 戱曲(희곡)을 合理化(합리화)하고, 같은 因襲的(인습적)인 낡은 부르주아的(적) 結婚(결혼)의 空虛(공허)함을 입증하고 있는 作品(작품)이다.◇
 

  ‘人形(인형)의 집’의 女主人公(여주인공) ‘노라’는 자아의 발견으로 男便(남편)과 아이들을 뿌리치고 한 가정을 박차고 나가는 적극적인 행동의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公(공) ‘알빙’ 夫人(부인)은 家出(가출)치 못한 주저하는 第(제)2의 ‘노라’로서, 그는 끝내 自我(자아)를 忌避(기피)하고자 함으로써 破滅(파멸)의 主人公(주인공)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노라'의 後身(후신)이기도 한 ‘알빙’夫人(부인)은 ‘노라’에게서와 같은 的確(적확)한 判斷(판단)과 現實(현실)에의 挑戰(도전)이 없는 化身(화신), 그는 보다 內省的(내성적)이요, 思索的(사색적)인 人間(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알빙’夫人(부인)의 內向性(내향성)은 그로 하여 많은 疑惑(의혹)과 懷疑(회의)를 同伴(동반)하게 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이 모진 忍耐(인내)와 집념으로 인하여 世俗的(세속적)인 義務(의무)와 獻身(헌신)에의 奴隸(노예)가 되기도 하였으며, 假飾(가식)된 砂盤(사반) 위에서 하고 많은 幽靈(유령)들에게 쫓기면서도 그들과 妥協(타협)하는 現實的(현실적)인 女性(여성)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이 第(제)2의 ‘노라’로서의 前進(전진)이건, 後進(후진)이건 상관없이 여기서 우리는 한 女性(여성)으로서의 相兢(상긍)하는 2面(면)의 心理的(심리적) 葛藤(갈등)을 發見(발견)할 수 있고 同時(동시)에 作家(작가)의 눈이 이미 外婦(외부)로부터 人間(인간)의 本質的(본질적)인 內的(내적) 狀況(상황)으로 옮겨지는 그 深刻性(심각성)을 發見(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幽靈(유령)’은 ‘입센’에게 있어서는 이미 한 女性(여성)을 通(통)한 社會問題(사회문제)와 家庭問題(가정문제)를 超越(초월)한 人間(인간)의 外面性(외면성)과 內面性(내면성), 보다 深思(심사)하고 苦悶(고민)하는 現代人(현대인)의 ‘모랄’을 浮刻(부각)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作品(작품)이 '노라'에 견주어 藝術(예술)성이 深在(심재)한 怡愉(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藝術(예술)은 社會(사회)에 있어서의 手段(수단)과 方法(방법)에 앞서 人間深淵(인간심연)에 위치한 그 본질의 추구와 그로부터의 解放感(해방감)이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所重(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빙’夫人(부인)에게 있어서 深淵(심연)의 追求(추구)는 意外(의외)에도 그에게 虛妄(허망)과 幻滅(환멸)을 가져왔다. ‘노라’가 낡은 사슬을 끊고 집을 나갈 때 그에게 約束(약속)된 未來(미래)가 없었던 것과 같이 그에게도 結果(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은 그녀가 아들 ‘오스왈드’를 發見(발견)함으로써 그에게서 自身(자신)이 구하고 있는 一切(일체)의 모든 심벌의 對象(대상)으로 여겨간다. 自由(자유)와 淸淨(청정)·歡喜(환희)·眞實(진실) 등, 그러나 그것은 夫人(부인)의 誤算(오산)이었다. ‘오스왈드’는 그의 어머니의 單純(단순)한 심벌만이 아니라, 그 自身(자신)의 自由(자유)와 解放(해방)에 대한 要求(요구)가 있고, 알빙에 대해서도 그 自身(자신)이 取(취)할 수 있는 利害關係(이해관계)와, 自身(자신)의 權利(권리)를 찾는 一介(일개)의 人間(인간)이었다. 그리고 牧師(목사) 만델스에게 있어서도, 木絲(목사)가 ‘알빙’大尉(대위)의 財産(재산)으로부터 期待(기대)하는 부르주아的(적) 因習(인습)의 安定(안정)과 持續(지속)을 위한 심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全體(전체) 戱曲(희곡)의 組織上(조직상)으로 본다면 또 ‘오스왈드’는 저 멀리 ‘오이디푸스’의 서러운 宿命(숙명)에의 現身(현신)처럼 處理(처리)되고 있다.
  木絲(목사)는 巴里(파리)에서 돌아온 ‘오스왈드’가 파이프를 물고 舞臺(무대)에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 그는 마치 그의 아버지의 幽靈(유령)을 對(대)한 듯도 하였고 그의 어머니 ‘알빙’夫人(부인)은 그의 態度(태도)의 그 어디선가는 또 牧師(목사)와도 닮았다는 錯覺(착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오스왈드’ 自身(자신)은 아버지로부터의 무서운 病菌(병균)의 遺傳子(유전자)로서 아버지의 아들이란 點(점)만은 깊이 信賴(신뢰)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 破滅(파멸)을 自招(자초)하는 豫告的(예고적)인 場面(장면)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오스왈드’가 그 不吉(불길)한 豫示(예시)만을 주고 나갔을 때 牧師(목사)와 ‘알빙’夫人(부인)은 다시 臺座(대좌)하여 그의 아들 ‘오스왈드’의 敎育問題(교육문제)와 將來(장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牧師(목사)는 恒時(항시) 틀에 박힌 道德的(도덕적) 僞善家(위선가)로서 나타나고 ‘알빙’夫人(부인)은 그의 죽은 男便(남편)으로부터의 모든 遺産(유산)을 孤兒院(고아원) 建立(건립)에 喜捨(희사)하게 됨으로써 이제 막 過去(과거)가 回想(회상)되던 그 幽靈(유령)의 世界(세계)로부터 ‘오스왈드’를 구하고 그리하여 이로써 그녀 自身(자신)의 解放(해방)을 꿈꿀 때(食堂(식당)으로부터 의자가 넘어가는 요란한 소리.
  레지네-(날카로우면서도 속삭이는 소리로) 오스왈드 왜 이러세요? 놓으세요!…(오스왈드 기침을 하더니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알빙’夫人(부인)은 마치 그의 生前(생전)의 男便(남편)과 ‘레지네’어머니와의 實際(실제)하는 幽靈(유령)을 목격하고 ‘오스왈드’에 向(향)한 그녀의 期待(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一幕(일막)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作者(작자) ‘입센’의 完全(완전)히 計算(계산)된 算術(산술)인 冬時(동시)에 戱曲(희곡)의 原理(원리)인 것이다.
  그의 效果(효과)는 나머지 궁금한 事實(사실)에 대한 好奇心(호기심)을 剩戟(잉극)하고 劇的(극적)인 ‘서스펜스’를 더해간다. 여기에 ‘입센’의 重要(중요)한 面貌(면모)가 있다.
  아니 그것은 그 時代(시대) ‘헵벨’과 ‘오지에’ 등이 즐겨 쓴 당시 戱曲(희곡) 上(상)의 痛念(통념)이기도 하였다.
  그(입센)는 보다 일찍이 이러한 點(점)으로 ‘프랑스’의 技巧的(기교적)인 通俗作家(통속작가) ‘스크리브’의 硏究家(연구가)이자 또 그는 ‘베르겐’時代(시대)에 있어서 ‘스크리브’의 많은 戱曲(희곡)을 上演(상연)한 經驗者(경험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스왈드’와 ‘레지네’도 배다른 男妹(남매)다.
  그의 아버지 ‘알빙’大尉(대위)는 그의 生前(생전)에 있어 지금 ‘알빙’夫人(부인)이 目擊(목격)한 바와 같은 ‘오스왈드’와 ‘레지네’가 저지른 꼭 같은 場所(장소)와, 같은 模樣(모양)으로 그의 食母(식모)(레지네의 親母(친모))를 誘惑(유혹)하여 ‘레지네’를 얻었던 것이며 ‘레지네’는 또 지금 그의 食母(식모)로 있다. 이러한 事實(사실)은 ‘알빙’夫人(부인)에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暗澹(암담)한 現實(현실)의 宿命的(숙명적)인 一面(일면)을 보게 된다.
  그러나 第(제)2幕(막)에서도 ‘알빙’夫人(부인)은 그러한 幽靈(유령)에서 쫓기며 한편 勇氣(용기)와 忍耐(인내)로서 이를 凝視(응시)하여 苦鬪(고투)해 가는 것이다.
  허나 孤兒院(고아원)엔 豫期(예기)치도 않았던 불이 나고, 이리하여 ‘알빙’의 遺産(유산)들은 하나하나 불길과 더불어 消滅(소멸)되고 ‘오스왈드’에 向(향)한 期待(기대)도 불길의 衰殘(쇠잔)과도 같이 가물거린다.
  第(제)3幕(막)에서는 牧師(목사)가 ‘엥스트랑’에게 그가 賣淫宿(매음숙)으로서 計劃(계획)하는 '船員(선원)이 집'을 위한 돈을 約束(약속)하고, ‘레지네’또한 그의 不貞(부정)했던 어머니를 닮아 金錢(금전)과 快樂(쾌락)을 따라 집을 나가며, 드디어 ‘오스왈드’ 또한 그의 父親(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야한 咀呪(저주)스러운 遺傳(유전)-最後(최후)의 宣告(선고)와 더불어 이 孤獨(고독)한 靈魂(영혼)은 太陽(태양)을 부르며 硬化(경화)되어가는 것이다.
  여기 ‘오스왈드’의 悲劇(비극)과 ‘알빙’夫人(부인)의 絶望(절망)은 비단 이들만의 悲劇(비극)과 絶望(절망)이 아니라 이는 그러한 모든 人間(인간)이 겪어야할 共同的(공동적)인 宿命(숙명)이였다. 따라서 이는 作者(작자) ‘입센’이 處理(처리)한 ‘人形(인형)의 집’의 ‘노라’에 대한 反證(반증)이었고, 그의 合理化(합리화)된 作品(작품)으로서 제2의 ‘노라’로서의 幻滅(환멸)을 그린 作品(작품)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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