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성 긍정한 이상구현을

주체성 없으면 슬픈 單幕劇(단막극)
‘井底蛙(정저와)’적 思考方式(사고방식) 탈피해야
 

  大學生活(대학생활)이 귀중한때라는 것은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시기라는 때문이기도 하다. 주체성이야 말로 온갖 주위에서 강압과 지도만을 받고 자라온 中ㆍ高校(중ㆍ고교)시절을 탈피한 완전한 自我發見(자아발견)에서 온 結果(결과)가 된다. 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항로를 움직이는 진정 나침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本文中(본문중)에서>
 

  時間(시간)은 흐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太古(태고)의 山野(산야)를 휩쓸고 온 狂風(광풍)모양 말없이 世態(세태)를 살피며 흘러간다. 이토록 급속한 狀況(상황)하의 大學生活(대학생활) 4년. 물론 어떤 이에게는 5년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10년이 될른지 모른다. 허지만 인간의 평균수명을 70이라 하드라도 10분지1, 또는 20분지 1정도밖엔 안 된다. 그 짧은 찰나이지만 가장 重要(중요)한 時期(시기)가 이 대학생활이다. 지나가면 그만이다.
  또한 대학생활이 다시없는 귀중한 때라는 건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시기라는 때문이기도 하다. 이 主體性(주체성)이야 말로 주위에서의 강압과 지도만을 받고 자라온 中ㆍ高校(중ㆍ고교)시절을 脫皮(탈피)한 완전한 自我發見(자아발견)에서 온 結果(결과)가 된다. 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항로를 움직이고 나가야 할 것이며, 나침반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 대학생활을 어떻게 보내느냐는데 달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大學生活(대학생활)은 어떠한 姿勢(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현재 大學生(대학생)의 生態(생태)를 분류해보면 대게 4가지로 분류가 된다.
  첫째, 공부만을 밤낮으로 파고드는 學究派(학구파)가 있으며, 둘째 학교의 각종 써클활동을 주로 하는 의욕파, 셋째 공부도 않고 그렇다고 활동도 두드러지게 하지 못한 채로 지내버리는 허송 派(파), 넷째로 공부는 공부대로 熱心(열심)히 하면서, 各種學生活動(각종학생활동)도 남 못지않게 하는 中派(중파)이다.
  첫째 공부만을 밤낮으로 하는 사람을 본다. 주야를 도서관에 처박혀 내일을 計劃(계획)한다. 완전히 남과 절연한 채 독자적인 思考(사고)를 한다.
  좋다. 상아탑에서의 할 일이란 學問(학문)을 닦는 일이 가장 第(제)1義的(의적)인 일인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공부를 하다보면 건강을 해치기 일쑤다. 대학 졸업 시 신체조건 때문에 大事(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신체활동에 더 유의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活動(활동)만을 일삼는 무리다. 소위 영웅족이다. 모든 사람을 제압하려고 들기를 좋아한다. 얼른 보기엔 동경의 대상이 될른지 모른다. 학문의 기초가 서 있지 못한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게 바로 이런 型(형)일 것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의 의지를 내세우기 위한 基礎(기초)지식의 체계가 서야한다. 基礎(기초)가 虛弱(허약)하면 무너지기 쉬운 建築(건축)이나 다름없다.
  어느 때 그 根底(근저)에 자기의 뜻을 내세울만한 지식의 계보도 없이 世人(세인)들이 쓰는 식의 말투를 쓰면 너무나 초라하지 않을른지. 결코 이런 식의 人間(인간)이란 흔들리기가 쉬운 갈대의 性品(성품)을 가지고 있는 답습형이 分明(분명)하다. 이 사람이야 말로 완전한 이념이 서 있지 않은 것이다.
  다음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허송족이다. 머리는 좋을른지 모른다. 허지만 날마다 술타령이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선 자기는 모든 진리를 다 아는 체 주절거린다. 이건 도대체 비생산적인 所致(소치)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으랴.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인 것을.
  넷째로 中庸派(중용파)이다. 학문으로서 자기의 思想(사상)과 理念(이념)의 체계를 세우면서 한편으론 活動(활동)을 통하여 그 수완을 발휘하는 자다. 이자야 말로 주도면밀한 이다. 물론 根底(근저)에 깔리는 思想(사상)이나 理念(이념)은 學問(학문)만으로 이룩되는 건 아니다.
  宗敎(종교)ㆍ文化(문화)ㆍ社會(사회)전반에 걸쳐 樹立(수립)되는 것이다. 고로 兩面(양면)을 통해 닦은 것은 완전히 知(지)ㆍ德(덕)ㆍ體(체)를 습득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未來(미래)를 꿈꾸려면 현재의 위치가 확고해야 한다. 현재를 만족치 말고 언제나 앞을, 보다 먼 곳을 미리 보는 자가 곧 승리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시 앞의 원만형이 현재와 未來(미래)를 동시에 다질 수 있는 行動(행동)이 아닐까.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모든 方面(방면)으로 果敢(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 式(식)의 思考方式(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앞에는 보다 큰 世界(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일정에 어느 女大生(여대생)이 佛敎人(불교인)과 對話(대화) 끝에 다음 한마디를 듣고 크게 느낀바 있다고 했다.
  “네 가슴에 世界(세계)를 품어라. 네 안에 모든 世界(세계)가 담겨 있느니라.”
  그렇다. 모든 걸 자기마음속에서 캐내야 된다. 자신에게 혜안의 눈을 돌려야 된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옳게 생각하고 뜻이 깊으면 그대로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現實(현실)이 요구하는 大學生(대학생)의 자세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未來(미래)의 必要性(필요성)과 要求(요구)에 의해서 學問(학문)을 探究(탐구)하는 態度(태도)가 우리한테는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다. 좀 더 뚜렷한 自己(자기)주체성을 완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時代(시대)에 敏感(민감)해야 한다. 時代性(시대성)을 外面(외면)하는 자는 理想(이상)이 없는 자다. 事態(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그 對策(대책)을 강구하는 예민한 感覺(감각)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理想(이상)이 實現(실현)될 수 있으며, 내일을 設計(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제법 時代(시대)에 敏感(민감)한 듯 政治人(정치인)들을 책하고 變則國會(변칙국회)가 어떠니 하고 시니컬한 소리를 일삼는 걸 본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데모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것이 곧 正當(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學生(학생)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학원에서는 적어도 政治性(정치성)은 排除(배제)돼야 한다.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전에는 일편의 슬픈 단막극으로 끝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요사이 變則國會(변칙국회)나 政治波動(정치파동)은 글자 그대로 변칙이다. 변칙이 時代性(시대성)을 띌 수는 없다. 결코 현명한 大學生(대학생)의 현혹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오직 原則(원칙)과 順理(순리)에 따른 當爲性(당위성)속의 時代(시대)추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大學生活(대학생활)에서 宗敎(종교)도 무시할 수 없다. 어느 학생은 宗敎(종교)를 通(통)해서만이 모든 건 可能(가능)하다고 力說(역설)한다. 올바른 信仰(신앙)을 通(통)해서만 人間(인간)의 形成(형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뭇 강조한다. 물론 영향력이야 어찌 적으랴. 하지만 요사이 대부분의 宗敎(종교)는 時代性(시대성)에 뒤졌다고 본다. 宗敎(종교)로서 社會活動(사회활동)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오직 社會(사회)의 추이에 따라 자기의 사상을 세우는데 필요할 뿐이다.
  이와 같이 現代(현대)의 大學生(대학생)은 非生産的(비생산적)인 것은 버리고 오직 생산적인 자세를 갖는 것만이 필요하다. 적어도 한국의 대학생에겐 자기의 주체성을 확립한 生産的(생산적)인 자세가 진정 필요하다.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時代性(시대성)에 민감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진 한국의 대학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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