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再創造(재창조)의 過程(과정)으로서
人間(인간)은 自身外(자신외)엔 救援(구원) 못해
禮吏(예리)해진 理性(이성) ‘神(신)의 죽음’을 招來(초래)


  1882年(년)에 刊行(간행)된 ‘즐거운 學問(학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니체가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간단히 넘겨버렸다.
  니체에 對(대)한 이러한 誤解(오해)는 니체를 빛을 전하려온 사람으로 理解(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로 理解(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잘못이었다.
  다시 말해서 니체의 ‘神(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단순히 기독교를 비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人間(인간)의 탄생을 위한 순교였다.
  새로운 것의 創造(창조)는 과거의 것을 밟고 넘어선다. 때문에 創造(창조)는 때때로 몹시 돌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創造(창조)의 과정을 살펴보지 않는데서 온다.
새로운 신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옛날의 신전은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야말로 과거의 신전에 최초로 해머를 댄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니체는 신전을 파괴하는 것이 파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하여 성실한 의사와도 같이 당시의 상황을 분석한다.
  神(신)의 죽음은 교통사고와 같이 偶發的(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가 진보하고 人間(인간)의 理性(이성)이 예리해짐에 따라오는 당연한 結果(결과)였다. 니체가 죽었다고 말하는 神(신)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神(신)의 의미만이 아니라 理想(이상)과 理念(이념)의 영역 즉 초감성적 세계를 통틀어서 말한다. 그러므로 니체가 神(신)과 人間(인간)의 關係(관계)라고 말할 때 聖書的(성서적) 계시에 의한 기독교적 神(신)과 人間(인간)의 關係(관계)라는 소극적인 意味(의미)만이 아니라 초감성적인 진리와 人間(인간)의 本質(본질)의 관계라는 적극적인 의미도 포함되어있다.
  神(신)과 人間(인간)의 關係(관계)는 신이 人間(인간)을 創造(창조)했다는데서 출발한다. 創造神(창조신)의 思想(사상)은 人間(인간)의 原象(원상)에 遡及(소급)되는 관계에 서있다. 다시 말해서 人間(인간)은 神(신)의 現存(현존)이라는 말이다. 神(신)은 人間(인간)을 創造(창조)할 때 자기 모습대로 創造(창조)했다는 聖書(성서)의 이야기는 人間(인간)은 神(신)의 精神(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人間(인간)의 本質(본질)은 그것의 創造者(창조자)인 神(신)속에 있다는 思想(사상)이다. 이 思想(사상)은 바로 ‘本質(본질)은 存在(존재)에 앞선다’는 것으로 19世紀(세기) 이전에 人間(인간)의 存在(존재)를 認識(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이 思想(사상) 속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存在忘却(존재망각)이 잠재해있다. 存在忘却(존재망각)이란 ‘存在(존재)하는(scind)’것과 ‘存在(존재)(sein)’의 개념에 포함된 2重意義(중의의)(曖昧性(애매성))가 形而上學(형이상학) 발단 이래로 潛伏(잠복)한 채로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여기 무엇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미 在(재)(있다고 하는)의 意味(의미)가 了解(요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了解(요해)되어 있다고 믿는 바로 이것이 存在忘却(존재망각)인 것이다. 이것 때문에 存在(존재)자는 그 存在性(존재성)(그의 存在樣態(존재양태))에 대해서 묻지 않는 잘못을 가져온다.
  또 하나 創造(창조)神(신)의 思想間(사상간)은 理性(이성)의 動物(동물)이라는 人間(인간)의 本質(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人間(인간)은 神(신)의 모습에 따라 創造(창조)되었기 때문에 自然的(자연적)으로 나올 수 있는 結論(결론)으로서 人間行爲(인간행위)의 기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理性(이성)의 動物(동물)이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神(신)을 죽이는 살인자적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人間(인간)의 理性(이성)이 발달하여 과학적 진보가 이룩되자 人間(인간)의 本質(본질)과 存在(존재)와 價値(가치)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方向(방향)에서 說明(설명)하고 理解(이해)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人間(인간)의 本質(본질)과 存在(존재)의 새로운 認識運動(인식운동)은 이미 칸트에 의해서 크게 시도 되었지만 그러나 人間(인간)의 本質(본질)의 存在(존재)론이 근본적으로 問題化(문제화)되지는 않았다. 本質(본질)은 存在(존재)에 先行(선행)한다는 기독교적 思想(사상)이 완전히 뒤집힌 것은 실존주의라는 집합명칭으로 불리우는 哲學者(철학자)들에 의해서다.
  마침내 싸르트르는 ‘實存主義(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存在(존재)는 本質(본질)에 先行(선행)한다’고 말하여 앞의 ‘本質(본질)은 存在(존재)에 先行(선행)한다’라는 말을 정반대로 주장하게 되었다.
  이말은 創造說(창조설) 속에 숨어있는 人間(인간)은 完成(완성)된 存在(존재)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人間(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가는 自由(자유)로운 存在(존재)라고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말은 종전에 있었던 人間(인간)은 神(신)의 精神(정신)을 本質(본질)로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으로 人間(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 조건도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스스로를 形成(형성)해 나가야하는 책임을 가진 動物(동물)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人間(인간)은 괭이나 십처럼 쓰일 곳이 정해진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本質(본질)이 存在(존재)에 先行(선행)) 먼저 태어나고 다음에 자기를 形成(형성)해 나간다는(存在(존재)가 本質(본질)에 先行(선행))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神(신) 대신에 人間(인간)을 기초로 하는 人間本位(인간본위)의 思想(사상)이 나오게 된 것은 人間(인간)의 理性(이성)이 진보한 때문이다.
  일찍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存在(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도 신의 자리에 人間(인간)의 理性(이성)을 앉혀 놓아도 人間(인간)의 存在(존재)는 타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보인 것이다. 이 가능성을 가장 먼저 확신한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니체’였다. 그는 이 가능성의 확신, 즉 시의 자리에 人間(인간)의 理性(이성)을 대신 앉혀도 人間(인간)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위해서 감히 그는 신의 죽음을 이야기 했던 것이다. 그가 神(신)의 죽음을 이야기 한 것은 오직 人間(인간)을 위한, 지금까지 신에 의해서만 모든 說明(설명)이 가능했던, 人間(인간)을 人間(인간)에 의한 人間(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다.
  神(신)의 죽음은 이처럼 새로운 人間學(인간학)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人間(인간)의 승리라고 떠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하나의 過程(과정)일 뿐이다. 끝으로 싸르트르의 말을 빌려보면 실존주의 무신론은 神(신)의 存在(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神(신)의 存在(존재)한다 할지라도 人間(인간)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人間(인간)은 자신을 재발견해야하며 비록 신의 存在(존재)에 관한 유력한 증명이 있을지라도 人間(인간) 자신 이외에는 人間(인간)을 권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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