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적 의미의 철학적 제문제

信仰優先主義(신앙우선주의), 오늘날 言語(언어)철학에 큰 영향 미쳐
現代哲學(현대철학)은 언어적 思考(사고)의 도구
言語分析哲學(언어분석철학), 현상학과 함께 哲學(철학)의 양대 산맥


1, 人間(인간)과 言語(언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은 생후 1년이나 2년부터 말을 하기 시작하고, 6년이 되면 일반적인 언어문법을 통달하고, 어휘구사능력은 평생을 지내면서 점차적으로 발달시키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언어의 기원, 언어의 문법적인 구조,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 언어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탐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런 뜻에서 언어는 호흡을 하거나 걷는 경우와 같이 ‘자연적으로’ 습득된다.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수학적인 계산과 같이 특수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습득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물론 유아시절의 언어는 문법적으로 틀릴 수도 있고, 아주 틀리게 발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구사하는 언어능력은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전거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서만 성취될 수 있는 반면에, 자전거보다도 훨씬 복잡한 언어의 구사는 ‘무의식적인 공동체 활동’에 의하여 간단히 습득될 수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의 법칙(The rules of language)을 잘 알지 못하거나 그러한 법칙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면서 이미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에 대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비교적 문화가 발달된 근래에 이루어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일상적으로 전혀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던 언어에 대한 학문적인 탐구를 새삼스럽게 시작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이 질문에 대하여 공리주의적인 답변을 시도한다.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결과 때문에 언어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언어에 대한 구사능력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언어학자들-일반적으로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언어구사력이 더욱 뒤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論語(논어)’는 識字憂患(식자우환)이라고 표현했고, ‘카타 우파니사트’는 극단적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표현했으며, 일상적으로 우리들도 “웅변은 은이며, 침묵은 금”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언어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언어를 문법적으로 틀리게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사전달에는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연구하는 論理學(논리학)조차 언어의 구사능력 자체를 향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학의 동기는 365×45(45세 된 사람이 살아온 일수)와 같이 구체적인 결과를 유도할 수 있는 공리주의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언어학의 동기는 오히려 사투리나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대면하게 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언어만을 믿어왔고 타인의 언어를 알고 난 다음에도 야만인의 것으로 취급했었다. 그리하여 모든 희랍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고, 중국인들은 자기들만을 세계의 中心人物(중심인물)로 취급했었다.
  그러나 근래에 발견된 고고학적인 화석에 의하면 이미 고대시절부터 외국인이나 외국에 대한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특히 여러 곳을 방랑하던 遊牧民族(유목민족)에 있어서는 그들의 언어가 단순한 의사전달의 수단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훌륭한 도구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자손번식과 같은 種族構成(종족구성)요소와 같은 기능까지 소유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조직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말하는 문학(speaking culture)를 지나 쓰는 문화(writing culture)로 된 최근의 일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언어학은 언어의 기원, 언어와 세계의 관계, 언어의 구조를 연구하는 가장 촉망받는 학문이 되었고, 언어학은 이제 언어학 자체의 가치 이외에도 인접과학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어학이 최근에 발견한 진리 중에는 언어가 通信手段(통신수단)(the means of communication)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思考(사고)의 道具(도구)(the most important instrument of thought)라는 것이다.
 
2, 哲學(철학)에 있어서의 言語(언어)의 位置(위치) 
  인간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철학이 인간존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이미 孔子(공자)의 正明思想(정명사상)이나 名家(명가)의 사상이 있었고,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플라톤은 ‘크라티루스’(Cratylus)라는 대화편에서 어휘의 발생과정, 어휘와 어휘의 관계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를 세밀하게 고찰했다. 여기서 그는 사물과 사물의 이름간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그 사물의 이름을 관찰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물의 이름이 반드시 사물을 지칭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는 慣習說(관습설)(Convention, thesis)과 自然說(자연설)(nature, phusis)을 절충하여, 모든 사물의 이름의 뜻은 주로 사회의 관습이나 질서에 의하여 결정되지만 원칙적으로는 언어의 뜻을 부여하는 실제적인 존재(name-givers)에 대한 無知(무지)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하여간 플라톤은 모든 사물과 그 사물의 이름을 연결해주는 內的(내적)인 適合性(적합성)(inner fitness)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 내적인 적합성을 기술할 수 있는 방법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신념은 오늘날 언어학자들의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다.
  實在界(실재계)와 現象界(현상계)의 구별에 근거를 둔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배척하고 常識(상식)에 근거한 철학을 전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중요하게 여겼던 語源學(어원학)(etymology)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언어의 뜻은 관습에 의하여 주어진다”고 선언함으로써 언어의 기원에 대한 自然論(자연론)을 배척했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이 주장했던 초인간적인 意味附與者(의미부여자)의 존재와 역할을 배격하고 언어와 언어간의 內的(내적)인 適合性(적합성)을 배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언어학의 기초적인 초석을 제공했다.
  특히 그는 “저 사람이 걷는다”와 같은 진위를 따질 수 있는 命題(명제)와 “사람은 두발로 걷는다”와 같은 단순한 표현을 구별함으로써 최근에 크게 대두되고 있는 언어의 인식적인 기능과 비인식적인 기능을 암시한 최초의 언어학자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했다. 하여간 아리스토텔레스는 어휘의 뜻을 그 어휘를 구성하는 형식보다는 기능과 의미의 차원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그 후에 희랍시대와 로마시대에 걸친 문법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었고, 특히 서양의 언어학이 동양의 싼스크리트에 대한 연구에 의하여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후에 언어학은 중세, 르네상스시대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언어는 언제는 철학의 중요 관심사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언어철학, 언어분석 철학, 일상 언어 철학과 같은 용어가 나올 정도로 언어가 철학의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발생한 소위 ‘비엔나학파’(the Vienna Cicle)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오늘날에는 언어분석철학이 現象學(현상학)과 더불어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3, 言語哲學(언어철학)의 內容(내용)
  전통적으로 철학적 명제는 진위가 중심문제였고 그 명제의 진위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책상이다’라는 명제가 실제로 책상을 지시하면 옳은 명제이고, 그렇지 않으면 틀린 명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엔나 학파에서 발생한 論理的(논리적) 實證主義(실증주의)에 의하면, 모든 명제는 그 명제의 진위를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의미가 있느냐는 테스트를 통과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가 없는 명제는 진위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명제의 의미는-여기서 ‘의미’라는 표현은 ‘그 경험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와 같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표현이다-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경험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고 경험의 구체적인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는 명제만이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명제만이 진위를 따질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이제 意味論(의미론)으로 대체되었고, 의미론은 극단적인 경험론의 양상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신이 존재한다’거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증명(verify)할 수도 없고 反證(반증)(falsify)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위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무의미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는 학교에 간다’는 표현을 ‘는나 교에학 간다’로  표현한 미치광이의 발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反形而上學(반형이상학)인 분석철학은 그 후에 많은 수정을 받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언어철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비트겐슈타인(L. Witgenstein)의 이름을 차용한 ‘비트겐슈타인 的(적)인 信仰優先主義(신앙우선주의)’라는 표현까지 생기게 되었다.
  한편으로 최근의 언어분석철학은 理想言語(이상언어)(ideal language)에 대한 추구를 버리고, 日常言語(일상언어)(ordinary language)에 대한 분석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언어의 記述的(기술적)인 기능(descriptive function)과 더불어 비기술적인 기능(non-descriptive function), 예를 들면 “아, 꽃이 아름답다”와 같은 감정적인 기능(emotive function)이나 “나는 그대에게 洗禮(세례)를 주노라”와 같은 遂行的(수행적)인 기능(performative function)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종래의 대부분의 철학적 명제는 철학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혼란을 덜 일으키도록 再構成(재구성)(reconstruction)및 명료化(화)(clarification)시켜야 된다고 주장하고, 철학의 목표는 곧 언어의 분석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언어철학의 공과를 다지기에는 아직 그 역사가 너무 짧다. 다만 언어철학은 내용만을 중요시하고 그 내용의 표현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는 ‘안락의자의 철학자들’(the armchair philosophers)에게 언어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각성시켰음에는 틀림없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철학은 언어를 단순한 통신수산뿐만 아니라 중요한 思考(사고)의 道具(도구)로 믿는 문학도, 언어학도, 사회과학도에게 새로운 각도로 철학을 재조명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철학은 言語的(언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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