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예술의 전통 그 평가와 현대화 - 불교공예

佛經(불경)·佛語(불어)·佛說(불설)의 現代化(현대화)를
佛敎(불교)의 專門的(전문적) 연구기관 필요


  佛像(불상)은 初心者(초심자)들의 신앙심을 돋우기 위한 방법의 일종이지,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불상이란 慈悲(자비)와 관대와 仁慈(인자), 즉 釋迦如來(석가여래)의 사상을 표현해서 초심자로 하여금 감화될 수 있는 像(상)을 조성하는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상이 갖춰야 될 조건들은 그 民族(민족)과 民族性(민족성), 文化(문화), 國家體制(국가체제)등등에서 무수한 양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컨대 불상을 조성하는 樣式(양식)이 있다면 인도佛(불)과 중국, 한국, 일본, 南方諸國(남방제국)의 불상 등등이 인도의 것에 동일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相異(상이)하다는 것은 각기 민족의 文化(문화)가 달랐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불교는 그 傳統(전통)이 확고하다. 그러나 近代化(근대화)라는 벅찬 課題(과제)앞에서는 지나치게 無力(무력)했다. 그것은 佛敎藝術(불교예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각 寺刹(사찰)의 법당에 새로 안치되는 불상 들이 ‘現代(현대)’라는 것과 먼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新羅佛(신라불), 百濟佛(백제불), 高麗佛(고려불), 李朝佛(이조불) 등등이 각기 제작 年月日(년월일)의 기록 없이도 그 시대를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그것은 불상이 시대에 따라 變還(변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佛像(불상)의 어떤 部分(부분)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法(법)은 불상이 가지는 非凡(비범)한 신비 속에 조형적 효과를 바라는 감각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현대인의 감각에 과연 부합하느냐는 문제는 고려해볼 문제다. 우주의 신비를 파헤쳐 달나라의 땅을 豫約申請(예약신청)하고 있는 現代人(현대인)과 佛像과의 대조가 이뤄지겠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환언하면 불상 앞에 쪽지어 비녀를 꼽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나 불상 앞에 ‘넥타이’를 매고 혹은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엎드려 기도한다면, 과연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보아질 것인가.
  불상, 그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現代人(현대인)의 감각에 맞아야 한다. 時代的(시대적)인 불상, 거슬러 올라가 고려, 신라, 백제 등 사회에 맞는 불상과 마찬가지로 1900년대의 인간과 불상의 조화는 기필코 이루어져야할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불상이란 것은 그것이 가지는 外在性(외재성), 즉 귀의크기위치, 팔의크기위치, 옷고름의 위치 등등 양식에 미치는 문제 등은 사실상 불상을 조성하는 法(법)에 있다고 보지 않으며, 그것은 內在性(내재성)이야말로 불상을 조성하는 사람의 궁극의 法(법)임과 동시에 眞(진)으로 생각된다.
  자비와 관대와 인자-이것이 불상으로 표현되어 現代人(현대인)의 감각과 동화되어 신앙을 일으킬 수 있는 동기가 된다면 불상은 現代化(현대화)했다고 본다.
  불교의 현대화란 유독 불상만의 현대화로서는 결코 이뤄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佛堂(불당)에 現代化(현대화)된 불상이 봉안되어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흡사 현재의 불상과 ‘미니·스커트’와의 대조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불교美術(미술)이 똑같은 균형을 유지하면서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미술을 나눠보면 대충 불상, 建造物(건조물), 工藝(공예), 丹靑(단청), 의생, 幀畵(정화), 주변의 造景(조경)등으로 들 수 있는데 이것들 중 한 가지가 現代化(현대화)가 된다고 해서 불교의 전반적인 현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提案(제안)하건대 미술의 각 분야별로 作家(작가)를 선정하여 그 작가로 하여금 한 해에 한두點(점)씩의 作品(작품)을 내게 해서 硏究發表會(연구발표회)를 가지게 하고 佛敎美術(불교미술)을 論(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면 해를 거듭해 갈수록 차츰 체계를 이룬 종합적 現代化(현대화)가 자연히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교미술의 綜合展(종합전)을 가진다면 더욱 의의 있는 일이 될 것이요, 나아가서 세계 佛敎國(불교국)과의 交觀展(교관전)을 갖는다면 他國(타국)의 佛敎美術(불교미술)과 비교도 하면서 우리 불교예술의 性格(성격)과 位置(위치)도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최고 전당인 ‘東大(동대)’와 ‘宗團(종단)’이 중심이 되어 쇄신적인 ‘슬로건’을 가지고 해야 될 일이라고 보며, 특히 佛敎大學(불교대학)내에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佛敎美術科(불교미술과)’를 설치함으로써 불교현대화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미 ‘佛敎大(불교대)’가 설치 독립되어 있으니까 佛敎大學內(불교대학내)에 불교예술과를 설치하는 것도 전혀 無實(무실)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佛敎美術(불교미술) 전반이 현대화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첫째로 불교인(敎者(교자)) 자체의 시급한 現代化(현대화)가 긴요하다. 그들은 ‘現代(현대)’라는 것을 배워야 하고, 理解(이해)해야 할 것이다.
  둘째, 佛經(불경), 佛語(불어), 佛說(불설)의 3者(자)가 다같이 現代化(현대화)될 때 비로소 불교의 現代化(현대화)가 이뤄질 거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불교미술의 현대화운동은 좀 늦은 감이 있으나, 지금부터라는 과감히 추진해야 될 숙명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거룩한 8萬大藏經譯經(만대장경역경)운동은 몇10년을 걸려 역경해서 그 한권을 터득하는데 과연 시일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 그러나 美術(미술)은 視覺(시각)을 통해서 직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봄과 동시에 認識(인식)이 된다. 그러 쓰는 불교현대화운동의 본격화는 빨리 서둘러야할 것이다. 마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을 알 수 있듯이 불교예술을 보고 불교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