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들에게 붙이는 말

꿈과 두려움의 소용돌이


  인류의 시조라는 아담과 이브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하였다 한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차라리 製靴業者(제화업자)라도 되었더라면 행복했으리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은 지식이 많아지면 더욱 불행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기나긴 학창생활에서 가장 깊이 배우고 가장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최고학부를 卒業(졸업)할 때만큼 허전함을 느끼게 될 때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직 철이 덜나서 그저 즐겁게만 지나는 때이고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막연하나마 큰 희망과 꿈에 부풀고 大學(대학)에 들어오면 하급학년에서의 포부와 이상이 아직 살아지지 않고 지나는 동안에 어느덧 卒業(졸업)기를 맞으면 쓸쓸함을 느끼고 불안감에 잠기고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젊은 인텔리의 슬픔이 시작된다. 이러한 심정은 大學卒業(대학졸업)을 앞두고 필자가 느낀 경험이지마는 오늘의 대다수의 젊은 학도들도 같이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왜 그렇게 쓸쓸할까? 이것은 초등학교 卒業(졸업)식에서 석별의 합창을 부르면서 울었던 그런 감상은 아니다. 16년이란 긴 학창생활의 최후 최고의 마지막 길에서 너무나 자기의 속이 빈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때문일 것이다. 시야가 넓어지면 未知(미지)의 세계도 더욱 많아지는 법이지만 卒業(졸업)할 무렵에는 이러한 이치를 뚜렷하게 자각되는 것이 아니다. 학문에나 지식에 자신이 생긴 것도 아니고 인생에 대하여 확고부동한 信念(신념)이라도 심어질 것도 없다.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회의와 허탈을 더 느낀다.
  그러면 또 왜 不安感(불안감)에 사로잡히는가? 부모형제의 노력와 보호를 받으면서 좁고 평화로운 학원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넓고 거칠고 낯선 곳인 社會(사회)로 내던져진다는 공포감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未知(미지)의 세계로의 전진과 개척은 용감한 모험가들에게는 자부심을 자아낼지는 몰라도 연약한 인텔리에게는 불안을 안겨주기만 한다. 그리고 취직 결혼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부양이라는 여러 가지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된다는 근심도 불안의 일부요인이 될 것이다. 卒業(졸업) 후 직장은 없어도 걱정이다. 있어도 불안하다. 직장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大空(대공)을 날려는 거대한 理想(이상)의 날개를 묶어놓는 곳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결혼도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결혼을 젊음의 무한한 자유를 구속하는 올가미처럼 느껴진다. 독신은 不定(부정)한 상태로서 모든 決定(결정)의 母體(모체)이다. 결혼은 우리의 行動(행동)과 사상을 제한하고 나아가서는 固定(고정)시켜 침체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결혼의 기쁨에 따르는 강력한 불안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를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을 해야 되겠다는 의무감이나 첨가되면 마음의 짐은 점점 무거워지고 기분은 우울해 질뿐이다. 죽음은 실제로 당하는 것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더 괴롭다하듯이 校門(교문)을 떠난 뒤에 現實社會(현실사회)에 부딪쳐 보는 것보다 현실을 생각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지 행동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식인에게 고민이 많은 이유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또 행동 없는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행동과 생활은 곧 社會(사회)와 직결되어 필연적으로 현실에 關與(관여)하게 된다. 지식인의 사렴과 사화와의 대립 理想(이상)과 現實(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살아나가는가가 문제다. 만약 어느 한 개념을 추궁한다면 그가 놓여져있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는 그이 삶은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요 때로는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투철하고 강인한 信念(신념)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어느 길이라도 택할 것이지만 평범한 일반인은 그러한 험악한 길을 걸을 용기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大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악의 現實(현실)이건 善(선)의 現實(현실)이건 그에 무조건 굴복하여 同化(동화)된다면 그것은 지식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濁水(탁수)와 淸水(청수)를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비위도 좋고 도량도 넓은 사람이겠지만 그런 사람은 결국 탁한 사람이 된다. 濁水(탁수)와 淸水(청수)를 합하면 결코 맑은 물이 되지 않은 까닭이다. 설혹 탁한 물을 마셔야할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지식인은 청탁을 가리고 正邪(정사)와 善惡(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비판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며 自覺的(자각적) 反省(반성)에 의한 자유의지와 발견의 능력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상실이라는 자살을 초래할 것이고 인간 아닌 인간이 사는 곳은 생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학교를 떠난 이후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책에서 또는 강의실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직장에서 혹은 社會(사회)에서 배우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英語(영어)로서 卒業(졸업)식이란 말은 시업식으로 되어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지식이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진정 배움의 길은 校門(교문)을 떠날 때부터 시작된다는 뜻일 것이다. 大學(대학)에서 얻은 지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또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卒業(졸업)생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이 卒業(졸업)시에 느끼는 不安(불안)과 쓸쓸함은 시업 아닌 卒業(졸업)이라는 관념에서 심리적으로 크게 作用(작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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