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은 '수입·건설 '발명의 해'

國史上(국사상) 기억될만한 첫 戊申(무신)은 법흥왕 15년
금년은 戊申史(무신사)의 전통대로 '躍進(약진)의 해' 되길
 

  戊申(무신)년에 우선 생각나는 笑話(소화) 한 토막.
  3·1운동 때. 내 동향의 ‘全恩來(전은래)’라는 소년(당시 12세, 戊申生(무신생))이 독립만세를 高唱(고창)하다가 日警(일경)에게 잡혀 取調(취조)를 받는데, ‘성명이 뭐냐?’ 물으니까 ‘저는 내요’라 대답하여 건방지다고 따귀 한번, 다음 ‘무슨 生(생)이냐?’고 나이를 물으니까 ‘戊申生(무신생)이요’하여 또 따귀 한번. 따귀를 두 개나 호되게 맞았으나 사실대로의 그러나 앵무새 같은 대답이 뜻밖에 소년애국자의 의연한 ‘반항의 자세’로 결과 되었음이 통쾌했었다는 이야기.
  그 戊申年(무신년)에 나는 여섯 살의 시골 어린애였다.
  그해 내 고향(황해도)에 전에 없던 큰 장마가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아버지가 일러주어 안대로 韓日(한일)보호조약과 한국군대 해산이 있었던 다음해라 各地(각지)에 抗日義兵(항일의병의병)이 蜂起(봉기)함을 보았다.
  그 반면에 새로 모집된 韓人(한인) 憲兵(헌병)보조원이 도처에 橫行(횡행)·발호하였고, 뒤에 알았지만 중앙엔 식민지 수탈의 중추기관인 동양拓植(척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역시 뒤늦게야 소문을 들어 알았지만, 그 해에 당시 우리정부의 소위 외교고문 親日(친일)美人(미인) 스티븐스가 桑港(상항)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타가 우리 애국지사 田明雲(전명운), 張仁煥(장인환) 두 분에게 사살되었으니 다음해 安義士(안의사)의 하얼빈 壯擧(장거)의 先(선)종이었다 할까. 그러나 몇몇 義士(의사)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亡國(망국)의 大勢(대세)는 이미 결정적으로 기울어가던 때.
  韓末(한말)의 戊申(무신)년(1908)은 이렇듯 암담·어수선했지만 國史上(국사상)의 다른 戊申(무신)년(西紀(서기)론 끝 數字(숫자)가 모두 8字(자))은 대개 외래문물의 눈부신 '輸入(수입)'과 ‘建設(건설)’과 ‘發明(발명)’의 史實(사실)로 點綴(점철)되어 있으니, 1968년의 戊申(무신)이 바야흐로 ‘건설·약진의 해’로 약속되었음에 스스로 일치되어 사뭇 고무적이라 하겠다.
  國史上(국사상)의 기억될만한 첫 戊申(무신)(528)은 신라 法興王(법흥왕) 15년. 이 해에 신라가 비로소 佛敎(불교)를 정식으로 奉行(봉행)했음은 ‘三國史(삼국사)’의 ‘15年(년) 啓行(계행)佛法(불법)’이란 明文(명문)과 그 밑의 殉敎(순교)聖者(성자) ‘異次頓(이차돈)’(이치돌)의 白乳血(백유혈)의 奇蹟(기적)의 記事(기사)로 주지의 사실. 海東(해동)에 佛日(불일)이 처음 빛난 해요 佛敎(불교)문화가 정작 수입된 시초로, 불법의 현재 최고전당인 宗立東大(종립동대)로선 특히 기억할만한 해.
  다음 興德王(흥덕왕)3년 戊申(무신)(828)엔 入唐回使(입당회사) 大廉和尙(대염화상)이 차 종자를 唐(당)에서 가지고 돌아와 智異山(지리산)에 심어 우리나라 茶(다)栽培(재배)와 茶道(다도)의 始原(시원)을 마련했으니 産業史(산업사)와 禪房(선방)생활사로 역시 기억될만한 해요,
  다음 眞聖女王(진성여왕) 2년 戊申(무신)(888)엔 角干(각간)魏弘(위홍)과 大矩和尙(대구화상)이 왕명을 받아 역대의 향가를 수집하여 저 유명한 ‘三代目(삼대목)’이란 一大(일대)歌集(가집)을 편성했다. 이 가집이 지금에 전했더라면 우리 문학이 세계 最古(최고) 最高(최고)의 수준을 자랑할 터인데 뒤에 湮沒(인몰)된 것은 문학사 내지 문학사의 천고의 불행이요 恨事(한사)이다.
  어느 王陵(왕릉)발굴에서라도 혹 그것이 발견된다면 无涯(무애)교수의 大著(대저) ‘古歌(고가)연구’가 백권쯤으로 增補(증보)되고 老學究(노학구) 여생의 四天(사천)의 大業(대업)을 이룰 터이지만 부질없는 공상일 뿐 어떻든 이 888 戊申年(무신년)은 뒤의 訓民正音(훈민정음)이 발명된 1443년과 함께 우리 문화사상 최고의 해.
  다음 利用厚生(이용후생)의 길로 여러 가지 과학적 발명을 이룩한 것이 역대 戊申史(무신사)에 散見(산견)됨은 偶合(우합)인 채로 신기하다.
  朝鮮(조선) 성종 19년 戊申(무신)(1488) 8월엔 崔簿(최부)가 水事(수사)(물레방아)를 창제했고, 현종 9년 戊申(무신)(1688)정월에 거제도에 당시 희귀하던 銅鑛(동광)이 발견되어 희한한 銅(동)이 생산되더니 그해 8월에 金佐明(김좌명)이 銅(동)과 鐵(철)을 合鑄(합주)하여 새 활자를 만들었다(實錄字(실록자)). 활자의 발명과 주조는 주지하는 대로 우리 민족이 서양보다 앞서기 몇백년의 천재적 능력을 과시하였고 그 뒤의 개량발전도 그 전통적 재능의 전개였다.
  외래문물의 수입이 워낙 좋지마는 그 思想的(사상적) 滔滔(도도)한 유입은 先在(선재)한 문화사상 생활과의 충돌을 일단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더구나 외래부정 물품의 잠입은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두 예가 모두 ‘戊申(무신)사’ 중에 끼어있다.
  正祖(정조) 12년 戊申(무신)(1788) 8월에 李景溟(이경명)이 上疏(상소)하여 서학(천주학)의 폐를 痛論(통론). 西勢東漸(서세동점)에 의한 西敎(서교)의 流入(유입) 전파는 이미 불가피한 大勢(대세)요 또 서구문명의 수입으로 차라리 달가운 일이었으나 당시 보수적 재래의사상 생활습관과는 一大(일대)충돌과 대결이 없을 수 없었던 과정. 그 해에 드디어 국가에서 엄명을 발하여 西學(서학)의 書冊(서책)을 모조리 불사르게 했으니 뒤의 西敎徒(서교도)大虐殺(대학살)이 이미 이해에 前兆(전조)되었고.
  憲宗(헌종) 14년 戊申(무신)(1848) 3월에 冬至使畵員(동지사화원) 朴禧英(박희영)이 北京(북경)서 아편 먹는 吸具(흡구)를 실근히 貿易(무역)해 왔다가 발각되어 엄벌을 받았다. 주지하는 대로 아편은 그보다 10여년 전(1837)에 英人(영인)이 3만천函(함)을 중국에 유입시킴으로써 그 中毒者(중독자)가 淸國(청국)全 土(전토)에 금방 퍼졌고 一代(일대)의 快男兒(쾌남아) 廣東(광동)총독 林則徐(임칙서)의 아편소각으로 아편전쟁이 야기되었으나 阿片亡國(아편망국)의 난을 요행 면했는데, 그 뒤 10몇년 만에 이 괘씸한 畵員(화원)이 문제의 물건을 어쩌자고 密貿(밀무)해 온 것. 금시 적발 처벌되어 蔓延(만연)의 禍毒(화독)을 면했음은 천만의 幸(행). 겨레를 망쳐도 自利(자리)와 時體(시체)유행만을 따르는 徒輩(도배)는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었는듯.
  끝으로 금년은 '납'(잔나비)띠의 해. 원숭이는 흉내내기가 장점인 채 단점이나 날래고 민첩함이 特長(특장). 이 한해에 우리겨레(내지 學徒(학도)제군)는 남의 흉내내기보다 껑충 뛰어 창의에 留念(유념)하고 날세게 일(공부)하고 능률적으로 건설(실력양성)하는 동시에, 戊申(무신)國史(국사)의 전통적인 여러 실례대로 외래 우수한 문물의 수입과 증산(성적향상)에 주력하여 先進諸國(선진제국)에 竝駕(병가)하는 글자대로 ‘躍進(약진)의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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