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부처의 인식론적 문제

知慧(지혜)와 慈悲(자비)의 佛國淨土化(불국정토화)가 인생의 正道(정도)
부처, 諸法(제법)을 無(무)ㆍ空(공)으로 보는 認識(인식)의 주체자
‘위대한 知慧(지혜)의 完成(완성)’이 般若經(반야경) 통한 부처의 本質(본질)
生(생)과 死(사), 오직 利益衆生(이익중생)의 願(원)이 있을 뿐
涅槃(열반), 人間心性(인간심성)의 정화가 극치에 달한 完德(완덕)의 상태


  産業革命(산업혁명)이후 전 세계가 산업화ㆍ물질문명화 되면서 자제력을 잃은 인간들의 物慾(물욕)으로 급기야 現代社會(현대사회)는 人間性喪失(인간성상실)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파멸 될 것 같으면서도 世界(세계)로 國家(국가)로 혹은 한 個人(개인)으로 存在(존재)하고 있는 것은 宗敎(종교)의 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三國時代(삼국시대)에 들어와 우리 民族(민족)의 精神的(정신적)지주가 되어온 佛敎(불교)는 오늘날의 우리가 있게 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 宗敎界(종교계)에서는 이 物質文明(물질문명)의이기에 휩쓸려 파벌싸움을 일삼는 등 부패한 모습을 보여줘 많은 빈축을 사왔다. 오는 20일로 佛紀(불기) 2527年(년)을 맞아 그 동안의 佛敎(불교)를 반성해보고 衆生救濟(중생구제)라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진정한 종교로서의 佛敎正立(불교정립)의 길을 모색해 보고 17일 本校(본교)중강당에서 실시되는 불탄기념강연회 강연요지를 싣는다. <편집자 註(주)>

一(일), 釋迦牟尼(석가모니)佛(불)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久遠不栃(구원불회)의 法(법),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도리를 全世界(전세계) 人類(인류)에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신 위대한 先覺者(선각자)이시며 스승이시다. 만고의 법이 그의 八十生涯(팔십생애)를 통해 나타나시어 참된 삶의 理想(이상)을 몸으로 마음으로 말로 보여 주시며 우리를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며, 우리에게 智慧(지혜)와 慈悲(자비)의 참된 實踐(실천)을 통해 현실을 佛國淨土化(불국정토화)하는 것이 인생의 정도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의 法身(법신)은 萬古(만고)의 法(법), 그 자체이며, 우주자연의 理法(이법)으로서 금강과 같이 不壊(불괴)하며, 玲瓏(영롱)한 공덕의 체이시다. 그 法身(법신)의 공덕이 아름다운 형상을 들어 내셨을 때, 우리는 그를 未會有(미회유)의 聖者(성자)로서 맞이하며, 그들 報身(보신)으로 받들지만, 그 法身(법신)의 공덕이 우리의 가슴에 감동을 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자기혁명의 발심을 일으키게 할 때 우리는 그를 化身(화신)으로서 받들게 된다.
  初期經典(초기경전)은 역사적 佛陀(불타) 즉 석가모니 佛(불)이 현존하던 시기의 모습을 그린 서술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묘사된 부처님의 모습은 報身佛(보신불)또는 化身佛(화신불)의 성격을 띠고 있다. 理想的(이상적)人間(인간), 어느 모로 보거나 결함과 하자가 없는 참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거기에서 만난다. 그는 탄생과 成道(성도)와 轉法輪(전법륜), 人滅(인멸)의 네 가지 사건을 통해 인간으로서 태어나 죽는 과정이 전혀 凡夫(범부)들의 그것과는 판이한 긍정적 의미로 가득 찬 것임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그의 生(생)에서나 死(사)에는, 오직 利益衆生(이익중생)의 願(원)이 있을 뿐이다.
  그는 사사로운 욕정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지도 않았고, 꼭 같은 죄악적 행위들의 바람직 스럽지 않은 果報(과보)로서 죽음을 당하신 것도 아니다. 그에게도 생ㆍ사는 있었지만 그는 이미 생ㆍ사를 초월하고 있었고 그의 생ㆍ사는 衆生敎化(중생교화)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생ㆍ사의 속박 속에서 벗어난 승리자, 그는 어찌하여 그러한 자유를 향유 할 수 있었던가? 그 승리의 클라이막스를 佛傳作家(불전작가)들은 한결같이 降魔成道(항마성도)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 위대한 승리는 단지 6년간의 수행이 결과라고만 묘사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길고 험한 전생의 보살 道(도) 실천이 불가결의 것으로서 전제되었었다.
  우리는 그 보살도 실천의 내용을 이 宇宙自然(우주자연)의 한 구성분자로서 그 萬古(만고)의 法(법)을 體得(체득)하는 것이었다고 풀이하고자 한다. 그의 智慧(지혜)는 그것을 아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고, 그의 禪定(선정)은 主(주)ㆍ客分別(객분별)의 散亂(산란)한 心思(심사)를 調伏(조복)하여 法(법)의 沈黙(침묵)에 一致(일치)해 들어가는 훈련이었고, 그의 神進(신진)은 영원한 生命力(생명력)을 間斷(간단)없이 持續(지속)시키는데 필요한 절대적 요건이었다. 이러한 修行(수행)의 결과로 그는 그 자신이 말한 法(법)의 세 가지 특징 내지는 네 가지 특징(三法印(삼법인) 또는 四法人(사법인))에 완전히 符合(부합)하는 智慧(지혜)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 內面的(내면적)完成(완성)에서부터 對外的(대외적)關係(관계)의 完成(완성)인 布施(보시)와 忍辱(인욕)등 慈悲(자비)의 功德(공덕)을 원만하게 발휘할 수 있는 能力者(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諸法(제법)의 무아함을 깨달음으로써 我(아)를 성취한 분이시며, 그는 諸行(제행)의 무상함을 깨닫고 이에 따라 生活(생활)함으로써 常(상)을 성취시킨 분이시며 그는 一切(일체)가 皆苦(개고)임을 깨닫고 오히려 樂(락)을 성취하신 분이시며 그는 열반의 寂靜(적정)함을 깨닫고 가장 활발한 공능을 발휘하신 분이시다.
  그는 이미 온갖 종류의 惡(악)을 짓지 아니하는 분이며 모든 善(선)한 일을 다 받들어 실천하는 분이며 항상 그 意識(의식)과 無意識(무의식), 모든 생각을 정화무후하게 하는 분이다.
  그는 모든 고통을 다 이겨낸 사람이다. 그에게 生(생)은 있지만, 그 生(생)은 이미 苦(고)가 아니며, 그에게 老(노)가 있었지만, 그 老(노)역시 이미 苦(고)가 아니었고 그에게도 병이 있었지만 그 病(병)도 이미 그에게는 苦(고)가 아니었고 死(사)도 역시 그와 같았다.
  그는 愛慾(애욕)과 憎惡心(증오심)을 調伏(조복)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離別(이별)의 슬픔과 아픔이 없었고, 그는 모든 것을 내것으로 만들겠다는 有有欲(유유욕)이 없었으므로 갖지 못함으로 인한 不安(불안)과 焦燥(초조)와 恐怖(공포)가 없었다. 그는 人間(인간)의 肉體(육체)와 官能(관능)과 行動(행동)과 意識(의식)등 그것을 어떻게 움직여야 그 機能(기능)이 가치 있는 것이 되는가를 알고 이들에 하나의 統一(통일)(integration)을 주었으므로 잘못된 執着(집착)으로 인한 自己分裂(자기분열)의 아픔을 이미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를 涅槃(열반)(nirvana)에 들었다고 하였다. 그 ‘니르바아나’는 凡夫(범부)들이 겪는 苦痛(고통)의 原因(원인)과 結果(결과)의 소멸을 의미한다.
  ‘니르바아나’는 허무가 아니다. 人間心性(인간심성)의 정화가 극치에 달하므로 해서 인간생활의 모든 국면이 밝고 맑고 바르고 크고 생명력에 넘쳐흘러 그 자체로서 圓滿具足(원만구족)하며, 따라서 그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을 금치 못하게 하는 完德(완덕)의 상태이다.
  ‘니르바아나’의 무는 貪(탐)ㆍ瞋(진)ㆍ痴(치) 의 無(무)를 말하며 無我(무아)와 無常(무상)과 苦(고)와 空(공)을 자각위에 我(아)와 常(상)과 樂(락)과 淨(정)의 四德(사덕)이 남김없이 갖춰진 상태이다.
  ‘나르바아나’는 ‘바라밀’이다. 다할 나위 없는 극치에 가 버린 상태 건너가 버려, 더 갈 데가 없는 度無極(도무극), 우리는 그것을 오늘날 말로 ‘궁극적 현실’(Ultimate Reality)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戒(계)의 극치요, 定(정)의 극치요, 慧(혜)의 극치이다. 여기에 施(시)와 忍(인)과 勤(근)의 세 가지 극치를 補完(보완)설명한 것이 六(육)바라밀이요. 여기에 施(시)ㆍ戒(계)ㆍ忍(인)의 補助的(보조적) 行爲規範(행위규범)인 方便(방편)의 극치를 보태고, 勤(근)을 더욱 추진하는 願(원)의 극치를, 그리고 定(정)의 바탕이 되는 力(역)의 극치를, 끝으로 慧(혜)(즉 반야바라밀다)의 기초적 측면인 智(지)의 극치를 더 추가하여 설명했을 때, 그것은 十(십)바라밀이 되었다. 이 ‘바라밀’의 온전한 到達者(도달자)가 부처님이요, 그것을 목표로 가고 있는 途程(도정)에 있는 자가 菩薩(보살)이다.
  우리는 初期經典(초기경전)에 열거된 인간생활의 바람직한 諸法(제법)이 다 ‘바라밀’이라 해도 잘못이 아니다. 八正道(팔정도)의 見(견)ㆍ思(사)ㆍ語(어)ㆍ業(업)(일하는 길)ㆍ命(명)(목숨을 바르게 유지하는 길)ㆍ勤(근)ㆍ念(념)ㆍ定(정)의 하나 하나를 다 어느 것도 소홀하게 함이 없이 극치에 도달하게 하신 분이 부처님이다.
  깨닫지 못한 者(자)의 生涯(생애)와 末路(말로)는 惑(혹)⟶業(업)⟶苦(고)의 악순환일 따름이지만, 그 六道輪廻(육도윤회)의 반복을 뛰어넘은 生(생)-死(사)가 智慧(지혜)와 慈悲(자비)를 具足(구족)한 각자의 涅槃的 生死(열반적 생사)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알찬 현실을 그가 서 있는 그 곳, 그 시간에서 明淨(명정)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마음은 慈(자)가 無量(무량)하고 悲(비)가 無量(무량)하고 喜(희)가 無量(무량)하고 捨(사)가 無量(무량)한 마음이며 그의 행위는 分別對立(분별대립), 시기, 질투, 欺瞞(기만), 劫奪(겁탈), 憍慢(교만) 放縱(방종) 속의 衆生(중생)들에게 그 소외된 人間的狀況(인간적상황)을 벗어나 참된 삶의 共同體(공동체)에로 돌아오도록 하는 네 가지 ‘攝(섭)’(Sanigraba integration) 의 行爲(행위)(攝事(섭사))로 나타난다. 布施(보시)와 愛語(애어)와 利行(이행)과 同事(동사)가 그것이다.

  二(이), 반야경은 부처님의 궁극적 實相(실상)을 空(공)으로서 특정지우며 主觀的(주관적)으로 我執(아집)을 버리는 것이 人間(인간)의 成佛(성불)을 가능케 하는 첫 걸음이라 천명하고 나아가 객관적으로 모든 事物(사물)과 槪念(개념)에 대한 法執(법집)을 버리는 것이 人間(인간)成佛(성불), 佛化(불화)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임을 가르치셨다.
  이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본질은 ‘위대한 지혜의 완성’(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다.
  이 지혜의 완성 없이 부처는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은 佛母(불모)이다. 모든 다른 ‘바라밀’이 다 이 지혜의 ‘바라밀’을 體(체)로 하고 거기서 파생한다고도 할 수가 있다.
  구체적 한 개인으로서 역사상에 나타나셨던 석가모니佛(불)의 압도적 인격 앞에서 초기제자들은 그 눈이 부셔 그들은 이분이 터득하고 깨달았던 우주적 진리, 諸法(제법)의 실상에 대한 혜안에 있어서 미진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아함이나 部派(부파)불교의 畏曇(외담)에는 보완이 필요한 언급, 시정이 필요한 논의들이 생겼었다. 그런 의미에서 般若(반야)바라밀다 경류의 출현은 절대적 의의를 가진다. 모든 대승불교의 전적이 다 이 반야바라밀다의 안목, 그 직관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그 반야바라밀다의 눈으로 보여진 人間(인간)과 世界(세계) 法(법)들의 實相(실상)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般若心經(반야심경)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 반야바라밀다의 眼目(안목)을 가진 사람을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이라고 한다. 觀(관)이 自在(자재)하신 분이다. 그는 이름의 보살일 따름이지 이미 부처다. 우리는 여기서 初期(초기) 大乘佛敎(대승불교) 리더들이 느낀 약간의 當惑(당혹)을 看破(간파) 할 수가 있다.
  그동안 이 現實(현실)과 너무나 먼 거리로 밀려 나 있던 부처님을 갑자기 現實(현실)속에 모셔 오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흔적이 바로 이러한 菩薩(보살)의 登場(등장)이란 사실 속에서 엿보인다.
  그들은 苦(고)의 現實(현실), 無知(무지)의 現實(현실), 蒙昧(몽매)한 大衆(대중)이 사는 현실 속에서 일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그 前生(전생)의 修行段階(수행단계)에 견주어 六(육)바라밀을 실천하는 菩薩(보살)의 모습으로 代替(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실천자, 선포자, 그들은 그러면 인간 그 스스로를 어떻게 觀(관)하는 者(자)들인가? 그들은 五蘊(오온) 즉, 色(색)ㆍ受(수)ㆍ想(상)ㆍ行(행)ㆍ識(식)의 다섯 가지 ‘스칸다’(구성부분)가 다 空(공)하다고 照見(조견)한다. 그 말씀은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께서 이미 四諦(사체)를 설하실 때 다 하신 말씀이었지만 다시 이제 와서 강조를 되풀이 하는 것은 그동안 部派佛敎(부파불교)의 槪念主義者(개념주의자)들이 五蘊(오온)의 形式的(형식적) 敎條的(교조적) 說明(설명)에 熱(열)을 올리며 ‘반야’(智慧(지혜))의 의미를 타락시켜 버려, 그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야심경의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은 그리고 ‘無色 無受想行識(무색 무수상행식), 無限耳鼻舌身意(무한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無限界(무한계) 乃至(내지) 無意識界(무의식계), 無垂明(무수명) 亦(역) 無無明亦(무무명역), 乃至(내지) 無老死(무노사) 京(경) 無老死畵(무노사화)’ 등은 人盡(인진)을 否定(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人生(인생)에 대한 執着(집착)을 否定(부정)하는 것이었다.
  執着(집착)의 否定(부정)을 ‘空(공)’, ‘無(무)’, ‘無所得(무소득)’ ‘無罣礙(무괘애)’ 등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또 ‘不生不滅(부생부멸) 不垢不淨(부구부정) 不增不減(부증부감)’이라고 心經(심경)은 말했다. 이 마지막 구절은 般若直觀(반야직관)으로 諸法(제법)을 보면 그 五蘊(오온)등의 諸法(제법)이 空(공)함을 구태여 말로 표현 한다면 생겼다. 살아졌다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때 묻었다 깨끗해졌다 하는 것이 아니며 또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 된다. 결국 그것은 人間(인간)의 근본 主體(주체)를 眞如(진여)한 覺(각), 그 자체, 言語道斷(언어도단)이고 不可思議(불가사의)한 本覺(본각) 그 自體(자체),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는 無上正等覺(무상정등각)(anuttarasamyaksambodhi) 그 자체라는 말이다. ‘더 할 나위 없이 절대적으로 올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란 마음은 반야바라밀다의 마음이다.
  人間(인간)의 어떠한 相(상)에도 걸리지 않고, 그 밖의 現象界(현상계)의 어떠한 다른 相(상)에도 얽히지 않고 그러면서도 神通力(신통력)이 있고, 光明(광명)이 있고 모든 相待(상대)를 여의였으며, 比(비)할 바 없이 平等(평등)하며, 그리하여 온갖 苦厄(고액)을 除去(제거)할 수 있는 眞實(진실)된 能力(능력), 그것이 부처님의 本質(본질)이다. 그것이 佛性(불성)이다. 그것을 唯識(유식)의 이론으로 말하면 제 8식 아알라야識(식)의 眞如(진여)한 一面(일면)이라 한다. 그것을 元曉(원효)등 如來藏思想(여래장사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따로 떼어 제9식 아말라識(식)(無垢識(부구식))이라 했다.

  三(삼),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같은 반야바라밀의 안목으로 본 여러 가지 現象(현상)에 대한 補完的 見解(보완적 견해)들을 우리에게 보여 줌으로써 부처님의 體(체)와 相(상)과 用(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더 새롭게 해주고 있다.
  부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深化(심화)된 論議(논의)의 본격적 실마리는 이미 金剛經(금강경)에서 如來(여래)를 身相(신상)으로 보려고 하면 如來(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한 구절에서 비롯되고 있다.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라는 宣言(선언)은 體(체)를 강조하려한 것일 뿐 相(상)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닌데, 그 점에서 만약 금강경의 이 구절 중 虛妄(허망)의 의미를 文字(문자)그대로만 해석한다면 커다란 錯覺(착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般若(반야) 經類(경류)의 佛陀觀(불타관)은 주로 認識論的(인식론적) 立場(입장)에서 문제시 된 것인 만큼 그것을 存在論的(존재론적)으로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하면 잘못된 견해에 빠지기가 쉽다. 諸法(제법)을 無(무)와 空(공)으로 보는 認識(인식)의 主體(주체), 그가 부처이다. 그 主體(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오직 識(식)을 가진 存在(존재), 佛性(불성)을 가진 衆生(중생)일 수밖에는 없다. 그 識(식)이 많아지고, 그 佛性(불성)이 고스란히 들어나고 그럴 때 비로소 중생은 그 올바른 認識(인식), 투철한 自覺(자각)을 이룩한다. 석가佛(불)의 一生(일생)과 敎說(교설)과 敎化活動(교화활동)을 方便(방편)이라고 보고 久遠(구원)한 本佛(본불)이 常住不滅(상주불멸)한다고 선언한 法華經(법화경)의 一乘眞實(일승진실)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사실은 잊혀졌던 眞理(진리)의 중요한 一面(일면)을 들어 낸 것이다.
  또 역시 佛身(불신)의 常住(상주)를 말하면서 一切衆生(일절중생)의 無上正等覺中道種子(무상정등각중도종자)야 말로 佛性(불성)임을 강조하고, 아무도 列外(열외)없이 모든 衆生(중생)이 다 이 佛性(불성)을 지니고 있어 말하자면 그들이 이미 그 佛性(불성)으로 인하여 本體(본체)로서의 佛種(불종)(부처님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大涅槃經(대열반경)은 進一步(진일보)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의 本質(본질)인 涅槃(열반)을 常(상)ㆍ樂(락)ㆍ我(아)ㆍ淨(정)의 四德(사덕)과 法身(법신)ㆍ般若(반야)ㆍ解脫(해탈)의 三事(삼사)중 어느 하나도 궐 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은 것은 佛(불)의 認識論的(인식론적)의 미와 存在論的(존재론적)의미가 동시에 言及(언급)된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존재론은 결코 어떤 고정적인 絶對的實體(절대적실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緣起的 存在(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法身(법신)’이 존재론적 의미의 體(체)를 지칭하는 의미가 있고 또 ‘解脫(해탈)’이 역시 불신 존재의 양태이기는 하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해탈이지 定住(정주)나 固着(고착)이 아니다.
  楞伽經(능가경)이나 승만경 등 일련의 如來藏思想經典(여래장사상경전)과 그 論書(논서)들은 衆生界(중생계)가 곧 如來藏(여래장)이요 法身(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法身(법신)은 無量無邊(무량무변)의 佛法(불법)(佛功德(불공덕))과 다를 바 없고, 그것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 법신은 상황에 따라 중생 또는 보살, 여래라 불린다고도 했다.
  初期經典(초기경전)등을 통해 밝혀진 바 있는 佛(불)의 十號(십호)(열가지 호칭)는 부처님이 누구인지를 잘 납득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래란 칭호는 두고 두고 後代(후대)의 대승불교에서 까지 가장 함축성 있는 부처님의 異稱(이칭)으로서 우리의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如來(여래)는 如如(여여)(또는 眞如(진여))한 경지에 오신 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화엄경의 法界無碍緣起(법계무애연기)의 이상을 설명하는 同義語(동의어)라고 볼 수가 있다. 그것은 主(주)ㆍ客(객) 對立(대립)의 邪見(사견)을 반야바라밀다로 無化(무화)한 다음에 나타나는 多樣性(다양성)속의 統一性(통일성), 統一性(통일성)속의 多樣性(다양성)의 調和(조화)와 秩序(질서)의 다이나미즘을 의미한다.
  如來(여래)란 칭호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그의 心性(심성)이 外部(외부)로 表出(표출)되어 다른 衆生(중생), 또는 다른 法界(법계)의 諸要素(제요소)들과 갖는 緣起(연기)의 如如(여여)흠을 동시에 생각해야 할 것이다. 如來法界無碍緣起(여래법계무애연기)는 同義語(동의어)적인 性格(성격)이 있다.
  이 如來(여래)를 衆生(중생)들의 궁극적 現實(현실)이라 한다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迷惑的(미혹적) 意識(의식)속의 衆生(중생)들을 如來藏(여래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佛陀觀(불타관)은 大乘佛敎(대승불교)의 唯識說(유식설)과 결부되어 발전되었다. 이는 現代(현대)식으로 表現(표현)하면 인간인 당신 자신, 당신의 이웃, 가졌건 못 가졌건, 男子(남자)건 女子(여자)건, 人間(인간)이 모두다 如來(여래)의 씨앗(如來藏(여래장))이라는 견해이다. 당신이 곧 부처라는 사상이다. 여기에는 베에다안타적인 思考方式(사고방식)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것은 추호도 불교의 本軌道(본궤도)에서 이탈된 사상이 아니라, 당연한 思辨(사변)의 발전 결과라 할 수 있다.
  나는 유마居士(거사)가 ‘衆生(중생)이 아플 때 보살은 아프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아픔과 괴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이를 극복하는 철학은 바로 보살도 중생도 남남이 아닌 ‘如來(여래)의 씨앗’이요, 如來(여래)의 경지를 구성할 불가결의 分身(분신)들이라는 데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衆生(중생)이 곧 如來藏(여래장)이라는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그러한 근본저거 자각 없이는 어떠한 慈善的(자선적) 행위도 거짓이 되고 죄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남이 아니라 如來(여래)의 分身(분신)이라는 근본적 자각은 반드시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는 無我(무아), 無衆生(무중생), 無人(무인), 無夏者(무하자)란 반야 바라밀다를 완성시켜 진실로 捨身供養(사신공양)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승만 夫人(부인)이 財物(재물)의 受畜(수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고 모두 貧苦衆生(빈고중생)을 成熟(성숙)시키기 위해서만 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나, 四攝法(사섭법)이란 기가 막힌 宗敎的(종교적) 교훈의 실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지는 않겠다고 한 것, 그리고 아무리 고약한 犯罪者(범죄자)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고, 즉 除外(제외)하거나 疎外(소외)시키지 않고, 折伏(절복)이던 攝受(섭수)던 적절한 방법으로 모두 政法(정법)속에 머물게 하겠다는 이 생각이 다 法界(법계)의 諸衆生(제중생)이 다 無得(무득)한 緣起(연기)를 살게 하겠다는 뜻에 통한다.
 
  四(사), 如來(여래)의 다른 일면은 人間的(인간적) 次元(차원)을 넘어선다. 우주 大自然(대자연)의 신비로운 調和(조화)와 秩序(질서)의 ‘프로세스’ 그 자체가 如來(여래)이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理法界(이법계)라 말할 수도 있고, 事法界(사법계)라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더 나아가 理(이)와 事(사)가 無礙(무애)한 法界(법계), 事(사)와 事(사)가 無礙(무애)한 법계라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人間과 인간상호간의 관계, 인간과 自然(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道具(도구)들과의 關係(관계)에서의 如來(여래)함의 실현이라고 말을 바꾸어 설명할 수가 있다.
  이러한 無礙(무애)의 關係(관계)의 성립을 우리는 ‘하나 속의 많은 것’ ‘많은 것 속의 하나’ ‘하나가 곧 전체’ ‘전체가 곧 하나’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또 個體(개체)의 自主性(자주성)의 존중과, 그 個體(개체)의 特殊性(특수성)의 배양, 그리고 그 個體(개체)의 自發的(자발적)인 自己否定的(자기부정적) 獻身(헌신)으로 全體(전체)의 同質性(동질성)과 和合(화합)의 成就(성취)를 도모하는 일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이 ‘하나’의 現實(현실)이 곧 如來(여래)의 顯現(현현)인 것이다.
  儀式(의식), 修行(수행)의 모든 節次(절차)와 方便(방편)은 이러한 如來(여래)의 現實(현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서의 我執(아집)과 法執(법집)의 克服(극복), 이 目的(목적)을 달성하는 手段(수단)이라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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