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의 재조명


信仰(신앙)변천이 造像史(조상사)에 영향
일본‘廣隆寺(광융사)木像(목상)’ 신라작품으로 평가


  本稿(본고)는 일본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제6회 국제학술강연회’에서 발표된 미륵신앙과 半跏思惟像(반가사유상)-黃壽永(황수영) 총장, 半跏思惟像(반가사유상)의 전개과정-田村圓澄(전촌원징) (九州資資館長(구주자요관장)), 미륵보살반가상의 과제 (百濟半跏像(백제반가상)을 중심으로)) -大西修也(대서수야) (九州藝補工大(구주예보공대)) 敎授(교수) 등 3편의 논문 중 2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註(주)>

<一(일)>
  佛像(불상)이 禮拜(예배)의 대상임에 각기 다른 名號(명호)를 지니고 조성 되었으며 그에 대한 신앙은 또한 所衣經典(소의경전)으로서 전래하여 왔다. 동양의 信佛諸國(신불제국)에서 시대에 따른 신앙의 변천상은 각기 다른 造像史(조상사)를 엮어왔는데 이 같은 양상은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동일하였다. 中國(중국)에서 한반도에 불교가 初傳(초전)된 삼국시대에 각국에서 조성된 불상은 대략 釋迦(석가)‧彌勒(미륵)‧觀音(관음) 그리고 彌陀(미타)였는바 이 같은 초기 조상사 중에서 미륵신앙에 따른 現存(현존) 작품 중 在名品(재명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二(이)>
  고구려에 있어서는 日政末(일정말)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永康七年銘(영강칠년명) 金銅光背(금동광배)를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이에 앞서 같은 장소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 1구가 해방후 남하하였는바 이 반가상과 상기 영강명광배를 同一像(동일상)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실물대비에 따라서 각기 다른 것으로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같은 평천리사지에서 출토된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이곳에 보이는 ‘造彌勒尊像(조미륵존상)’이나 ‘慈氏三會(자씨삼회)’같은 문자는 그대로 미륵상의 조성과 신앙을 말하고 있다. 이 같은 光背銘(광배명)이나 반가상의 출토에서 당시 미륵상이 如來(여래)‧菩薩(보살)의 두 형식으로 조성된 확실한 자료로 삼을 수가 있다. 이외에도 既知(기지)의 황해도 곡산출토인 辛卬銘(신앙명) 金銅(금동)三尊佛光背銘(삼존불광배명)에서 ‘値遇彌勒(치우미륵)’이란 귀중한 문자를 찾을 수도 있었다.

<三(삼)>
  百濟(백제)에 있어서는 해방직전의 抹餘(말여) 抹蘇山(말소산)발굴에서 滑席半跏思惟像(활석반가사유상)의 하반신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으로써 백제의 初見例(초견례)를 삼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유품은 이 외에도 抹餘(말여) 定林寺址出土像(정림사지출토상)이 있었고 해방후 同郡(동군) 石城面寺址(석성면사지)에서 출토된 또 하나의 滑石像(활석상)이 있어 주목되었다.
  그런데 이들 石像(석상)破片(파편) 이외에 1980년 金堤郡(김제군)의 寺址(사지)에서 출토된 靑銅板佛像(청동판불상)은 백제금속상으론 첫 번 보는 유례로서 비록 小品(소품)이나 주목할만하다. 主尊(주존)으로 조성되었는데 塔形(탑형)을 頂載(정재)한 寶冠(보관)이나 天衣(천의)의 양식 등에서 또한 귀중한 자료로 삼을 수가 있다.
  이 외에도 백제멸망직후인 670년대의 작품으로서 충남연기 碑岩寺(비암사)碑像(비상) 중에서 半跏思惟石像(반가사유석상)을 主尊(주존)으로 한 사면석상이 수습된 사실, 그리고 이어서 同郡(동군) 蓮花寺碑像(연화사비상)에서 ‘阿彌陀經(아미타경)’의 명문을 읽은 것은 日本(일본)의 野中寺像(야중사상) 명문 ‘彌勒(미륵)’이라 보이는 사실과 더불어 각기 반가상의 名號(명호)를 전하여 주었다. 일본 藤澤一夫(등택일부) 교수가 상기 부소산상을 고찰하여 일본 書紀(서기)에 보이는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가 ‘彌勒石像(미륵석상)一軀(일구) (일본서기 敏逹天皇(민달천황)13년 584년)와 同大同高(동대동고)의 것으로 추정한 사실 또한 주목할만하다. 공주 도읍기의 미륵불광사(謙益(겸익)) 익산도읍기의 미륵사 등은 모두 백제의 융성하였던 미륵신앙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의 큰 수확으로 꼽히는 충남 서산군 雲山磨崖三尊(운산마애삼존) 중의 반가사유상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위치를 지키는 백제의 유일의 국보상이라 하겠다.

<四(사)>
  古新羅(고신라)에 이르러 半跏像(반가상)의 더욱 확실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다.
  첫째는 6세기 후반작으로 추정되는 月城(월성) 斷石山(단석산) 神仙寺像(신선사상)이다. 이 자연석굴은 銘文(명문)에 의하여 그 主尊(주존)이 彌勒三尊(미륵삼존)임을 알 수 있는바 그 외에도 半跏思惟像(반가사유상) 一軀(일구)가 있어 이 석굴이야말로 그대로 ‘彌窟勒(미굴륵)’ 이라 칭할 수가 있겠다. 이와 관련 하여 토함산 석굴이 예부터 ‘彌陀窟(미타굴)’이라고 불러온 사실은 神仙寺(신선사)의 경우와 같이 본존의 名號(명호)를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 신선사에 보이는 부조상은 오늘도 조성당초의 자리를 지키는 완형의 唯一例(유일예)로서 新羅半跏石研究(신라반가석형구)의 시발점을 이루고 있다. 이 石窟(석굴)이 金庾信(김유신) 장군과 인연을 맺었던 ‘中岳石窟(중앙석굴)’ (三國史記(삼국사기))로 추정된 사실은 그의 묘역에 설치된 願刹(원찰) 松花房(송하방) (오늘의 金山齋(김산재)) 半跏石像(반가석상) (경주박물관)에 대한 추정과 더불어 또한 留意(유의)되어야 하겠다. 오늘 국내에는 石新羅(석신라)의 말기(6‧7세기)에 이르러 조성된 金銅像(금동상)2구가 전래하고 있어 모두가 세계의 걸작이다.
  安東(안동)과 慶州(경주)에서 전래하였다고 전하는바 이들이 각기 미륵상으로 추정되는 것은 특히 古新羅(신라)에서의 미륵신앙이 화랑제도와 관련하여서 삼국통일의 큰 힘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상기한 金(김)장군의 낭도를 가리켜 세인들이 ‘龍華香徒(용화향도)’라고 지칭한 사실 또한 소홀하게 넘길 수는 없다. 근래에 새로 조사된 半跏思惟像(반가사유상)의 新例(신예)로는 忠州磨崖群像(충주마애군상)이 있다. 반가사유상으로 主尊(주존)을 삼았으되 보살상을 거느렸고 이와 따로 같은 岩面(암면)에는 여래좌상을 안치하여 天人像(천인상)의 공양을 받도록 하였다. 이 新例(신례) 또한 古新羅(고신라)의 미륵신앙을 오늘에 보여주는 신례인데 이 지역에서 고구려비가 전래하여 온 사실은 이 지구의 역사와 신앙의 배경을 전하여 주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磨崖群像(마애군상)이나 金銅像(금동상) (梁山出土(양산출토) 新像(신상)) 등 新例(신례)의 증가는 3국 중 유독 古新羅(고신라)에서의 미륵신앙의 높은 비중과 그에 따른 반가사유상의 유행을 짐작케 한다.

<五(오)>
  끝으로 작년 2월 日本 對馬島(대마도)조사에서 필자 등이 수합한 金銅像(금동상)은 확실한 장소에서 전래한 一例(일례)로서 百濟作(백제작)으로 추정되었다. 그리하여 日本(일본)에서 기왕에 傳來像(전래상)으로 추정된 長野難松寺(장야난송사) 金銅半跏像(금동반가상) 또는 上記(상기)한 扶蘇山石像(부소산석상) 등과의 比較(비교)考察(고찰)이 진행되었다. 한편 가장 유명한 日本(일본)의 국보인 京都(경도) 廣隆寺木像(광륭사목상)이 近年(근년)의 조사와 논의에서 마침내 古新羅(고신라)作品(작품)으로 강조된 사실과 더불어 국내 또는 일본에서의 우리의 半跏像(반가상) 자료는 증가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半跏樣式像(반가양식상)으로서 한국의 造像史(조상사)의 영광을 더욱 밝힐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리라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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