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글씨

글씨가 예술의 한 분야 이루어
當時(당시)의 모든 탑비는 구양순체로 쓰여져
고선사 서다오하상비, 書道史上(서도사상)중요 資料(자료)


차례
1,연재를 시작하며
2,新羅佛敎(신라불교)
3,新羅美術(신라미술)
4,新羅佛塔(신라불탑)
5,新羅歌謠(신라가요)
6,新羅(신라)남산유적
7,新羅金石文(신라금석문)
8,新羅古墳(신라고분)
9,新羅(신라)화랑도
10,新羅社會相(신라사회상)
(골품제를 中心(중심)으로)

1, 고신라의 글씨
  글씨가 예술의 한 분야로 다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중국문화권만이 가지는 특색이다. 漢字(한자)라고 불리는 중국문자는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자체의 기본이 사물의 형상을 형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회화성을 탈피할 수 없는 제약을 안고 있었으니, 기록의 수단이라는 일차적인 문자의 의미 이외에 글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범주로 간주되어 일찍부터 이 방면의 발전이 현저하게 이루어져 왔다. 특히 秦(진)(기원전 221~206)이후로는 통일 된 문자인 篆書(전서)의 공식화와 붓의 출현으로 글씨의 기틀이 잡혀가는데 前漢(전한)(기원전 206~기원후 8)에 이르면 민간에서 비공식으로 사용되던 간편한 글씨체인 예서가 공식문자화 되면서 사물을 형용하는 복잡한 회화적 잔재를 청산하여 문자적인 체제를 갖춘다.
  다시 後漢(후한)에 오면 붓이 더욱 발달하여 현재 쓰는 것과 같은 대추씨 모양의 붓(棗心筆(조심필))이 발명되므로 글씨에 삐침이 생기니 소회 八分書(팔분서)라는 새로운 글씨체가 나타나서 글씨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이로부터 점차 획을 크게 생략하여 급히 쓰는 草書(초서)가 나오게 되고, 전서의 붓놀림을 가미하여 반듯하고 단정한 모양의 楷書(해서)가 나오게 된다. 해서가 공식화되고 이를 급히 쓰는 行書(행서)가 일반화 되는 것은 대체로 魏晋南北朝(위진남북조)시대(200~580)에 해당하는데 이시기에 鍾繇(종요)(151~230)와 王羲之(왕희지)(321~379)같은 글씨의 대가가 나와서 글씨체의 틀을 거의 완성시켜 놓는다.
  이런 사이에 우리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계속 받다가 漢四郡(한사군)이 설치되면서부터(기원전 108) 본격적으로 중국문자인 한자에 접하게 되고 이를 빌려 사용함으로써 글씨가 우리 미술사의 한 범주로 등장하게 된다.
  그라나 현재 남겨진 옛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 광개토왕비문이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작품인데 글씨체는 예서체에 바탕을 두고 해서법을 가미하여 굳세고 모지며 근엄한 특징을 보인다. 고신라쪽에는 진흥왕순수비들이 남아있다.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창녕비는 예서의 기미가 가시지 않은 고졸한 글씨체로 순박한 느낌이며, 진흥왕 29년에 세워진 함흥 황초령비, 이원 마운령비 서울 북한산비는 모두 꺾임이 분명치 않은 해서체이다.

2, 통일초기의 글씨
  신라가 통일을 이루어가던 시기에 唐(당)에서는 소위 初唐三大家(초당삼대가)라고 불리는 虞世南(우세남)(558~638) 歐陽詢(구양순)(557~641) 楮遂良(저수양)(596~658)이 나와서 가장 단정하고 힘이 넘치는 글씨체인 해서의 틀을 완벽하게 이루어 놓는다.
  그래서 이 글씨체들이 곧 외교통로를 통하여 신라에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굳세고 모지며 엄격한 구양순체가 환영받은 듯하다. 태종무열비와 문무왕비 및 사천왕사 동쪽비, 김유신 묘비, 김인문묘비, 상원사 동종명 성덕왕비등이 모두 구양순체로 써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이룩하던 굳건한 기상과 초창의 건실성이 사회정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서 이런 글씨체를 좋아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8세기 전반기부터는 점차 초창의 준엄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엄정 건실한 문화풍토가 안정과 풍요를 바탕으로 안락을 지향하는 향락적인 경향을 띠어가게 되자 우미 화려한 문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글씨도 이런 시대정신과 문화현상에 따라서 서서히 변화하게 되니 황복사 동함명과 감산사 불보살상 조상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복사 동함명은 저수량의 小楷法(소해법)이고, 감산사 불보살조상기는 설총이 짓고 釋京融(석경융)과 金驟源(김취원)이 썼는데 유려한 행서체 이다.
 
3, 글씨의 다양한 발전
  8세기 중반에 이르면 글씨는 다양한 발전을 보이니, 봉덕사 성덕대왕신종명(771)에서 김□완이 쓴 文(문)은 장중한 해서체이고 홍단이 쓴 辭(사)는 활달한 행서체인데 모두 초당의 근엄 청고한 글씨체를 중후하게 변형시킨 글씨로 신라에서 독자적인 서체 변천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불국사 석가탑 속에서 발견된 목판, 두루말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의 글씨체도 굳세고 단정하며 모진 글씨이나 살찐 맛이 깃들어 이와 상통하는 시대양식을 보인다. 천보 17년(758)명이 있는 갈항사 석탑기는 저수량체로 굳세고 빼어난 풍취가 있으나 뻑뻑한 촌티가 있어 오히려 고졸한 맛이 있다.
  한편 이렇게 글씨체가 다양하게 발전해나가자 신라의 서도계는 글씨의 본질을 파악하고 근본적인 이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초당삼대가의 근원을 이루는 왕희지체를 숭상하고 그를 따라 배우려는 글씨풍이 크게 일어난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의해서 왕희지체의 대가 인 金生(김생)(711~791)이 출현한다.
  그의 여산폭포시나 전유암산가서, 백률사 석당기,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등은 모두 유려 전아한 왕희지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경주 황복사비나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비는 김생이 왕희지 글씨를 집자하여 쓴 것이다. 그래서 김생은 동방의 왕희지니 왕희지의 재현이니 하여 동방의 書聖(서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생의 출현은 통일 이후 백여 년간 부귀와 안락을 누리면서 비대해진 신라귀족들의 호사와 문화적 세련도를 대변하는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왕희지체가 중국역사상 귀족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왕권조차 좌우할 수 있던 남조 초기의 東晋(동진)에서 바로 그 권문귀족에 속하는 사람의 손에 이루어져서 조형예술에 탐닉하며 유유자적하던 귀족들에게 애호되던 사실을 상기할 때 서로 연결되어지는 면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라 상층귀족들이 격심한 내분과 권력다툼의 소용돌이에 휩쓸러들어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는 9세기로부터 더 이상 왕희지 체를 고수하지 못하는 현상도 이를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9세기로 접어들면 왕희지체의 유행이 가져온 결과로 저수량체의 글씨가 점차 많아져서 선림원종명(804), 백률사육면석당기(817), 법화경 石片(석편) 등이 보이고 있는데 특히 선림원 종명은 저수량의 행서체이다.
  원효대사(617~686)의 비문인 고선사 서당화상비는 희귀하게도 세상에 전해진 것이 거의 없는 구양순의 행서체이어서 서도사상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것이다. 필법이 매우 유려하여 저수량체의 유행과 함께 당시의 글씨풍토를 대변하는 것이라서 미술양식이 시대정신을 어떻게 반영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4, 탑비의 글씨
  그러나 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통일의 여세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신라가 곧 佛國(불국)이라는 자부심으로 화엄불국사를 재현해 내는 등 귀족문화의 극성을 보이던 신라도 귀족의 부패 타락과 귀족 간의 왕권다툼으로 점차 쇠망의 길로 접어든다. 마침 이때 상층귀족으로 신분상승이 불가능 한 것을 불만으로 여기던 하층귀족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혹은 儒學生(유학생)이 되고 혹은 留學僧(유학승)이 되어 그 곳의 새로운 문물 및 신사조를 배워가지고 돌아온다. 이들은 당나라에서 배운 신지식으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꿈꾸게 되는데, 유학생들은 당나라의 율령정치와 같은 유교식 치국이념을 구현하는 것이었고, 유학승들은 신흥의 선종사상을 전파하여 귀족화한 불교를 대중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귀족사회의 부패, 타락과 대조적으로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래서 최치원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당나라 문과급제자의자격으로 조성의 요로에 나아가 시폐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祖師心印(조사심인)을 받아온 禪師(선사)들은 각처에서 禪門(선문)을 개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이들의 회유와 무마가 필요하여 선문의 조사들을 國師(국사)로 봉하고 서거 후에는 국가에서 탑비를 해 세워주는 선종특유의 법식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탑비의 글과 글씨는 모두 유학생 출신의 신 지식층들이 맡게 되어 뜻하지 않은 글씨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초기 北宗禪係(북종선계) 선사들의 비문은 아직 신라귀족들이 맡고 있어서 단속사 신행선사(704~779)의 비문은 희강왕(836~837)의 아버지인 이찬 김헌정이 짓고 僧靈業(승령업)이 썼는데 9세기 초반의 글씨 풍답게 왕희지체이고, 희양산문의 智證(지증) 道憲(도헌)(824~882)의 비문은 孤雲(고운) 崔致遠(최치원)(857~?)이 지었으나 분황사승 慧空(혜공)이 83세의 나이로 써서 역시 왕희지체이니 모두 보수적인 글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南宗禪(남종선)의 心印(심인)을 받아온 성주산문의 朗慧(랑혜) 無染(무염)(800~888)이나 지리산 쌍계사의 眞鑑(진감) 慧昭(혜소)(774~850)등 九山禪門(구산선문)의 조사탑 비중 상당수가 최치원, 崔仁流(최인유)(868~944) 종형제의 손에서 지어지고 또 써지는데 한결같이 구양순체이다. 또 당시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姚克一(조극일)의 글씨도 구양순체이고 장흥 보림사 晋照(진조) 體澄(체징)의 비문을 지은 金穎(김영)의 글씨도 구양순체이다. 나머지 당시의 모든 남종선문의 탑비문도 거의 구양순체로 쓰여 지고 있으니 이는 새 사회의 건물을 꿈꾸는 신 지식층들의 건실하고 굳건한 의지가 구양순체로 대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초기의 구양순체 유행과 비교되는 것으로 이 세력들이 고려를 건국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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