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동안 本紙(본지)는 學生文學作品(학생문학작품) 詩(시)27편 小說(소설)5편 꽁뜨6편을 게재했다. 이미 발표된 이 作品(작품)들의 質的(질적)인 향상과 보다나은 成長(성장)을 위해 그 作品(작품)들을 評價(평가)해본다. <編輯者(편집자)>
 

時(시)
質量(질량), 例年(예년)에 비해 豊盛(풍성)
獨特(독특)한 個性(개성) 제각기 살려

  今年度(금년도) 本紙(본지)에 發表(발표)된 詩(시)의 총 편수는 모두 18人(인)의 27篇(편)이었다. 어느 大學詩壇(대학시단)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멤버’와 佳篇(가편)들이 많아 ‘詩(시)의 大學(대학)’으로서의 傳統(전통)을 유지하는데 손색이 없었던 한 해였다.
  여기에다 이미 詩壇(시단)에 데뷔한 學生(학생)의 文藝誌(문예지)를 통한 發表(발표)와 11월에 있었던 東國文學燕(동국문학연)作品集(작품집)의 詩(시)까지 합치면 실로 놀라운 편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量的(양적)生産(생산)에도 몇몇 作品(작품)을 제하고는 質(질)이 우수하여 예년에 못지않은 풍성한 수확을 거둬 드리고 있다. 여기에 紙面(지면)이 닿는 대로 個評(개평)을 적어보기로 한다.
  金哲鎭(김철진)(演(연)3)은 ‘디오니소스를 위한 頌歌(송가)’와 ‘꽃과 旗(기)와 나’의 두 편을 선 보였다. ‘디오니소스…’는 詩(시)의 限界性(한계성)을 드러내는 作品(작품)이어서 後者(후자)를 취하기로 한다. 詩的(시적) ‘센스’를 담고 있는 作品(작품)이다.
그런데 꽃과 旗(기)의 聯關性(연관성)에 대해 납득이 갈만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다스럽고   첫 聯(연)의 <그것은 美(미)의 깃발>이라는 구절이 이 詩(시)의 全體(전체)를 위해롭게 하고 있다. <벗이같여>란 구절도 사족일 것 같다. 그런대로 이야기가 묘미를 살아오르는 것은 그의 서툰듯한 詩語(시어)와 굶직한 ‘이미지’ 덕분인듯 하다.
  鄭義弘(정의홍)(國四(국사)·詩人(시인))은 卒業祝詩(졸업축시)인 ‘頌歌(송가)’와 開校(개교) 61周年(주년) 祝詩(축시)인 ‘榮光(영광)의 스케취’의 두 편을 發表(발표)했다. 두편 모두 目的性(목적성)을 띤 이른바 行事詩(행사시)다. 이러한 制限(제한)된 素材(소재)의 詩(시)는 쓰기 나름이지만 많은 사람의 共同性(공동성)인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創作詩(창작시)로서는 대하기가 힘들다. 그중에서 ‘頌歌(송가)’를 택하기로 한다. 行事的(행사적)이면서도 거기에 담을 수 있는 폭넓은 ‘메타포어’의 동원이 新鮮(신선)한 言語感覺(언어감각)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成功(성공)한 편이다.
  그러면서 常識(상식)을 常識(상식)으로 옮긴 것들과 함축의 묘미를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宋暎燮(송영섭)(佛(불)3)은 新入生(신입생)의 入學(입학)을 祝賀(축하)하는 ‘삼월의 魂(혼)은’과 本社(본사) 學術賞(학술상) 創作文學部門(창작문학부문) 本相受賞(본상수상)의 榮光(영광)을 차지한 ‘解産說(해산설)’의 두 편을 보였다. 前者(전자)는 祝詩(축시)이면서 그 目的性(목적성)을 비교적 겉에다 나타내지 않고 안으로 몰고 들어가 行事詩(행사시)로서는 品格(품격)이 높다. 그런데도 그 호소력을 잃지 않는 것은 묘하고 당황감을 주는 言語(언어) 동원 때문이 아닌가 본다.
  ‘解産說(해산설)’은 그의 作業(작업)으로서는 새로운 길을 트여주는 里程(이정)이 될 作品(작품)이다.
  종래 그가 잠시 시도했던 거친 호흡과 詩(시)앞에 자기의 無能(무능)을 들어내어 唐惶(당황)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던 일들을 기억한다면 여간 다행한일이 아니다. 특히 ‘이미지’의 配合(배합)에 완벽을 보였고 한구절 한구절이 살아있어 全體(전체)의 중후한 맛을 서로 도와주고 있다.
  그 날,
  木刻像(목각상)의 裸身(나신)앞에서 誕生(탄생)하였지
  설레는 橋子(교자)를 누르며 너는 웃고 있었지 <下略(하략)>
  이러한 도입부는 잔재주만으로는 어려운 生産(생산)이다. 河德祚(하덕조)(國(국)3)는 ‘금가락지’ ‘사랑의’ 두 편을 發表(발표)했다. 前者(전자)는 日常的(일상적)인 言語(언어)를 동원해 그 기능이 살아있는 듯하면서도 常識的(상식적)인 것을 못 넘겨 佳句(가구)가 눈에 띄면서도 全體的(전체적)으로 統一性(통일성)을 잃고 있다. ‘사랑의’는 그에 비하면 佛家(불가)의 말씀을 동원해서 <輪回(윤회)>를 說明(설명)하고 있는데 안이하다는 흠이 잡히기에 알맞다. 强點(강점)은 日常的(일상적)인 言語(언어)를 하나하나 살려내어 제자리에 있게 해준 것. 그러면서 內容(내용)에 앞 사실을 기억해주는 作品(작품)으로 주의해 볼만하다.
  洪禧杓(홍희표)(國(국)3·詩人(시인))는 이해에 제일 많이 發表(발표)를 해서 ‘봄지렁이’ ‘採集(채집)’ ‘不眠(불면)의房(방)에서’ 등 3편을 보여주었다.
  이 詩人(시인)의 매력은 무엇보다 서툰 기교를 부리지 않고 항상 자기 ‘포지션’을 지켜주는데 있다. 신선하고 맑은 言語感覺(언어감각)과 깨끗한 ‘이미지’의 조립, 여기에 素材(소재)를 잡아 끌어내는 才能(재능)이 合勢(합세)하고 있다.
  ‘봄지렁이’는 發想(발상)이 안이하다는 한가지로 제외하기로 하고 ‘採集(채집)’과 ‘不眠(불면)의 房(방)에서’ 중 ‘採集(채집)’을 택한다.
  흔들리는 나의 손끝은 거울 속을 방문하며 보이지 않는 밤바다의 당신의 옷섶을 들척이고<하략>
  첫 聯(연)이다. 완벽한 ‘메타포어’다. 네 개의 구가 각기 긴밀하고 유기적인 關係(관계)에서 하나의 思想(사상)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러한 조립은 완벽성을 가다가 안이하다는 흠도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폭넓고 깊은 詩精神(시정신)의 <採集(채집)>이 要求(요구)되어야 할 줄로 안다.
  鄭鳳翼(정봉익)(國(국)3)은 ‘還俗勸誘(환속권유)’ ‘말’의 두 편을 發表(발표)했다. 後者(후자)는 ‘한글날’을 위한 시다. 前者(전자)를 택한다. 詩(시)는 무용 散文(산문)은 步行(보행)이라는 外國(외국) 친구의 소박한 理論(이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詩(시)다.
  散文(산문)이 散文(산문)으로 남는다면 詩(시)가 될 수 없다.
  그의 言語(언어)의 구축은 차라리 散文的(산문적)이다. ‘이미지’의 조립도 ‘지그재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강한 說得力(설득력)을 안겨주는 것은 굵은 목소리 때문이다. 言語(언어)의 기능을 최대한 利用(이용)하려는 그의 태도에 설득 당한 때문인가. ‘이미지’배합에 正確性(정확성)을 띄우는 作業(작업)이 앞선다면 한번 여겨볼만 하다.
  馬鐘河(마하)(國(국)3)는 ‘埠頭(부두)의 確信(확신)’과 ‘여수’의 두 편을 보였다. 前者(전자)는 호흡이 거친 편이다. 後者(후자)를 취하기로 한다.
  觀念語(관념어)의 처리에 苦心(고심)을 하고 있는 눈치지만 아직 몇 군데 보이고 있다. 많은 것을 要求(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흐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점이 詩(시)를 살려내고 있다. 어떤 모임에서 이 시를 두고 제목과 詩(시)의 ‘언밸런스’를 말했지만 그렇게 생각진 않고 있다.
  이외에 柳子孝(유자효)(國(국)1)의 ‘밤길에서’는 무엇보다 자질을 엿볼 수 있어 기대되고, 姜同花(강동화)(國(국)4)의 ‘心腸(심장)의 소리’는 ‘4·19’를 위한 詩(시)편이면서 이 主題(주제)의 다른 詩(시)처럼 興奮(흥분)하지 않아 다행이다. 集中的(집중적)인 조립이 좀 아쉬웠다고 본다. 作品(작품)이라고 생각되고 金甲起(김갑기)의 ‘脈(맥)’은 <너무> 어려워 요령부득이고 文貞姬(문정희)(國(국)2)의 ‘某日抄(모일초)’는 함축의 묘미를 십이분 살려야 될 作品(작품)이라고 본다. 申龍善(신용선)(國(국)4)의 ‘어느 아침의 노래’와 金顯八(김현팔)(國(국)4)의 ‘또 한 번의 설움을’은 詩(시)가 言語(언어)의 藝術(예술)이라는 점에 신경을 써주었으면 싶은 作品(작품)들이다. 조유정(國(국)1)의 ‘季節(계절)의 커어브에서’와 李明柱(이명주)(國(국)1)의 ‘出發(출발)’은 만만찮은 재주를 보여주고 있어 기대가 크다.
<第(제)4回(회)本社學術像(본사학술상)受賞者(수상자)>

小說(소설)
文章(문장)넘어선 思想性(사상성) 追求(추구)를
安易(안이)한 內容處理(내용처리)가 대부분

  올해 들어 東國新聞(동국신문)에 發表(발표)된 創作(창작)은 短篇(단편)이 5편 꽁뜨가 6편 도합 11편이었다. 量的(양적)으로 봐서 과산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들 作品(작품)의 質(질)은 어떤가? 이에 대하여 制限(제한)된 紙面(지면)에서나마 일괄하여 評價(평가)해 보려는 것이 본래의 의도다.
  먼저 11편의 作品(작품)을 再讀(재독)하고 느낀 바는 量(양)에 비해 質(질)이 뒤지고 있다는 소감이다. 그러한 느낌은 꽁뜨에서 보다 短篇(단편)에서 더욱 그렇다. 꽁뜨가 短篇(단편)보다 짧아서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먼저 말해둘 것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紙面(지면)關係上(관계상) 각 作品(작품)에서 筆者(필자)의 소견대로 數篇(수편)을 뽑아 分析(분석), 評價(평가)하고 각 장르의 根本問題(근본문제)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은 것을 아울러 참작 양해를 구한다.
  꽁뜨 6편중에서 가장 꽁뜨다운 ‘캐릭트’의 作品(작품)은 金情姬(김정희)의 ‘반지(369호)’와 趙大衍(조대연)의 ‘희숙이’였다. 이 두 作品(작품)은 꽁뜨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반지를 잃어버린 희경은 자기집에 와있는 삼촌 상철에게 의심한 나머지 분노까지 느낀다. 그리고 식모 순이게 괜한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러다가 아이의 오줌을 누인다. 오줌을 누이고 우연히 들여다본 요강 속에 예의 반지를 발견한다는 內容(내용)이 ’반지‘다. 趙大衍(조대연)의 ’희숙이‘도 꽁뜨의 근본성격은 ’반지‘와 같다. 우연히 고급만년필을 주워 기쁨에 차있는 희숙이. 그래서 은근히 기뻐하면서 친구에게 보이려고 아까 끼워둔 만년필을 꺼내려 책을 폈을 때 깨끗이 흔적을 감추었다는 스토리였다.
  ‘반지’는 女性的(여성적)이고 델리케이트한 희경의 심리가 마지막의 기발한 사건을 보다 效果(효과)있게 조화를 이루어 준다. ‘반지’는 모파상의 ‘진주목걸이’를 聯想(연상)시키는 꽁트로써 成功(성공)한 作品(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희숙이’는 첫째 文章(문장)이 좋았다. 이지적이고 端雅(단아)한 ‘히로인’이 어필된다. ‘희숙이’에서 말미의 ‘그것은 극히… 下略(하략).’부분은 사족과 같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上記(상기) 두 꽁트는 필자에게 칭찬을 선물한 기회를 준 作品(작품)이었다. 테마面(면)에 있어서는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金(김)慧(혜)卿(경)의 ‘훔쳐진 마음(이제)’은 에세이 냄새가 난다. 꽁뜨의 가장 중요한 着想(착상)이 安易(안이)하면 殷永淑(은영숙)의 ‘誤解(오해)’는 着想(착상)이 포인트를 잃고 있다. 그리고 李鐘暎(이종영)의 ‘어느 上官(상관)’과 金炳吉(김병길)의 ‘幼(유)形(형)’은 꽁뜨의 엘리먼트의 결여가 공통적으로 큰 위크·포인트였다.
  短篇(단편) 5편 가운데서 제대로 포지션을 갖고 있는 作品(작품)은 李啓弘(이계홍)의 ‘出口(출구)入口(입구)’였다.
  나흘 후로 제대를 하는 박병장이 느끼는 것을 작자는 예리하게 캐치하려고 했다.
  ‘出口(출구)入口(입구)’는 文章(문장)이 잘 다듬어져있다. 이정도로 구사할 수 있는 文章(문장)이라면 초보습작기의 어려운 고비는 지났다.
  그러나 李啓弘(이계홍)은 문장에 비해 내용의 처리가 안이한 것이 위크·포인트다. 내용의 처리가 안이하다는 말은 테마가 모호하다는 의미다. ‘야무진 思想(사상)’에 대해서 괴테처럼 왼밤을 울때(空想(공상)) 찬찬히 문장과 맞먹을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出口(출구) 入口(입구)’는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 出口(출구)에서 박병장이 느끼는 것은 좀 더 강열한 어떤 교차로가 있어야 했을텐데. 入口(입구)에서 끝나버렸다는 감이었다.
  孫承浩(손승호)의 ‘冷酷(냉혹)’은 깡패의 生活相(생활상)의 斷面(단면)을 그린 作品(작품)으로서 文章(문장)이 좀 더 鍊磨(연마)되지 않았으며 컨버세이션이나 단락의 전환에 좀 더 苦心(고심)해야겠다. 곧 리얼리티에 포인트가 있다.
  丁海文(정해문)의 ‘呼神曲(호신곡)’은 나르시스에 빠진 作品(작품)이었다. 나르시스는 큰 위크·포인트였다. 테마가 모호했고 단락 전환에 있어 安易(안이)한 듯 보였다.
  韓龍煥(한용환)의 ‘少年(소년)’은 페이블과 같은 느낌으로서 리얼리티가 살아있지 못했다. 이런 테마는 리얼리티의 조화가 쉽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宣元彬(선원빈)의 ‘假面(가면)들’에서는 ‘오소’의 포지션을 좀 强調(강조)하고 싶다. 술과 色(색)(女子(여자))의 카르테 같은 人間群(인간군)이 現(현)文壇(문단) 많은 선진작가의 세상에 다반사처럼 된 것과 냄새가 같았다. 패배한 人間(인간)이었다. 이러한 것은 不惑(불혹)의 高地(고지)에서 鳥瞰(조감)할 때 사춘기의 연정과 흡사한 치기요 발버둥처럼 투시될 것이다.
  ‘꽁트’와 短篇(단편)의 ‘엘리먼트’에 대해서 몇 마디 해 볼까 한다.
  ‘꽁뜨’는 적당한 제재와 기발한 착상이 가장 중요한 ‘엘리먼트’이다. ‘위트’와 ‘유머’가 ‘꽁트’에서는 중요한 ‘빅거’를 발산한다.
  앞에서 말한 ‘꽁뜨’다운 성격은 ‘꽁뜨’에서는 ‘클라이막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꽁뜨’의 ‘클라이막스’는 短篇(단편)과는 다르다. ‘꽁뜨’의 ‘클라이막스’는 말미에서의 예상外(외)의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클라이막스’는 곧 종막이 되며 ‘클라이막스’ 뒤의 설명은 讚辭(찬사)의 아무것도 아니다. ‘꽁뜨’의 性格(성격)을 띤 短篇(단편)은 ‘모파상’의 ‘진주목걸이’가 그 좋은 ‘이그잼플’이며 대표적 ‘꽁뜨’로서 ‘하마드·레리·호’의 ‘獨逸軍(독일군)의 遺産(유산)’은 ‘꽁뜨’의 특성과 요소를 전적으로 함유하고 있어 좋은 ‘페시멘’이 될 것이다. 순간적 ‘모우먼트’와 압축될 ‘플로트’ ‘심플텐스’ 간결한 ‘익크프렌션·테크닉’에 의한 기발한 착상은 ‘꽁뜨’를 쓰는데 은연중 유의해야 할 점들이다.
  短篇小說(단편소설)은 저 애드거 알란·포의 短篇小說論(단편소설론)이 그 성격을 대변해 준다. 단일한 구성, 단일한 주제 단일한 효과 이것들 三位一體(삼위일체)가 되어 合致(합치)될 때 短篇小說(단편소설)로서 成功(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끝으로 마슈즈(十九(십구)세기 프랑스의 批評家(비평가))의 論(론)을 引用(인용)하며 그친다.
  ‘참된 短篇小說(단편소설)은 결코 단순한 分量(분량)의 長短(장단)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이 의의,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다. 참된 短篇小說(단편소설)이 長篇小說(장편소설)과 다른 점은 통일된 이미지에 있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하면 短篇小說(단편소설)은 長篇小說(장편소설)에 결여되어 있는 통일을 가져야 한다. … 中略(중략)
  短篇小說(단편소설)은 거기 比(비)해서 單一(단일) 성격 단일 정서 단일 국면에 의하여 釀成(양성)되 연속적 정서여야 한다.
  長篇小說(장편소설)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삽입함으로 해서 必然的(필연적)으로 複雜(복잡)多端(다단)하지만 短篇小說(단편소설)은 그와 反對(반대)로 完全(완전)히 充實(충실)한 單一(단일)한 效果(효과)를 노리는데 이다. …中略(중략)… 短篇(단편)은 長篇(장편)의 일부분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긴 이야기에서 뽑아낸 일사건 一揷花(일삽화)이어도 안 된다. 短篇(단편)은 비록 아무리 짧다 해도 그것대로 存在(존재)할 것이지 그 以上(이상) 늘이거나 하면 차라리 나빠지는 이미지를 독자에게 주는 그런 것이라야 한다. …하략’
<第五會(제오회) 本社學術賞(본사학술상)受賞者(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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