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 천(金闡) 의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37> 배우려는 마음

내게 주어진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대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마주하는 자신의 자세이다. “당신은 인도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최악의 상황, 인도에서 만난 소녀의 물음은 한 순간 흐트러졌던 배움의 자세를 꼬집고 그것에 대해 충고한다. 세상의 허상과 선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배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호수에 비춰진 타지마할처럼, 우리도 늘 배움의 자세에 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한 인상이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무조건 좋아하거나, 특정 지역에 대한 불신 등의 감정을 한꺼풀 벗겨보면 격정이거나 무지 때문일 수 있다. 잘 만들어진 연예인의 이미지가 그의 경솔한 언행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언론이나 기업, 정권 등은 홍보, 광고, 선전, 선동 등을 위해 허상의 이미지를 교묘히 조작한다.

이해타산을 떠난 불합리한 감정으로 특정 집단을 대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나 문화권에 대한 편견도 분명 존재한다. 사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전체를 속단하는 경우도 있다. 불편했던 한 순간을 통해 평생 개인과 집단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지닐 수도 있다. 세상을 인식하는 일이 진정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전체와 역사와 집단과 개인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인도(印度)라는 나라에 대해 물어보면 각자가 가진 문화적 경험에 따라 수많은 답이 쏟아진다. 성인(聖人)의 고향, 가난한 나라, 초일류 과학기술 국가, 계급이 존재하는 야만의 땅, 최고의 여행지, 최악의 관광지, 흉악한 범죄 국가,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곳. 천차만별에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모든 판단에는 배경이 되는 인식과 경험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백인백색의 대답을 통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인도에 대해 동경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책을 통해 접한 그곳은 어디서나 성자를 만날 수 있고, 문화적 다양성 속에 관용이 넘치고, 사람들이 지혜를 숭상하며 자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땅이었다. 그런 종교적 문화적 힘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분명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천 년 전에도 진리를 구하는 이들이 역경을 딛고 순례를 떠났던 영혼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20여 년 전 처음 인도 땅을 밟았을 때 그 환상은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소음, 짐승과 인간과 차가 뒤섞인 도로, 헐벗은 걸인과 감당할 수 없는 사치, 동족에 대한 멸시와 가차없는 폭력. 모든 이가 부처님과 같고 마하뜨마 간디와 같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환상과 현실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카레냄새, 침실 거리 차 사람 음식 어디에서나 그들이 맛살라 향이라 부르는 카레냄새가 났다. 토할 것 같았다.

뉴델리 인디라 간디 공항에서 만난 충격적인 경험은 인도 도착 다음날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히말라야 산간지역까지 이동을 위해 예약한 국내선 프로펠러 비행기는 이륙은커녕 문이 닫히지도 않았다. 정비사 한 명이 와서 문을 닫아 보고 갸우뚱거리며 돌아가면 다른 이가 와서 문을 닫아 본다. 그 개미떼 같은 행렬을 지속하다가 두 시간쯤 흐른 후 여럿이 달려들어 간신히 문을 닫았다. 망치소리도 들렸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찌는 듯한 우기의 인도 날씨를 불안과 함께 진땀을 흘리며 견뎌야했다. 마음 속으로는 차라리 비행기가 날아오르지 말 것을 빌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그야말로 죽음을 앞둔 흉한 인상이었으나 인도인 승객들은 천하태평이었다. 뭐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신문을 보거나 쿨쿨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비행기가 날아오르자 앞자리에 앉은 인도 소녀는 몸을 돌려 이방인을 향한 집요한 심문을 시작했다. “너 어디서 왔니?” “직업은?” 등등 기본적인 물음이 오가고 나서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인도에 와서 무엇을 배웠냐?” 생뚱맞은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나는 어제 막 도착했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무엇을 배웠냐?”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아 잘 모르겠다” “아니 어제 와서 인도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어떤 대답을 해도 그 소녀의 질문은 단 한 가지 “인도에서 무엇을 배웠는가?”였다.

소녀의 집요한 질문은 비행기 창문 넘어 구름의 바다 위로 히말라야 연봉의 눈 덮인 봉우리가 줄지어 빛날 때까지 이어졌다. 흰머리 산들의 경탄할만한 모습은 세속의 마음을 신들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소녀도 질문을 그치고 그 아름다움에 눈길을 빼앗겨 침묵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원색의 빛깔들과 지긋지긋한 카레냄새, 혼돈 속에서 겨우 하룻밤을 지낸 이가 인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그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배움은 학습과 많은 경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순간의 눈빛으로도 천 년의 지혜를 알아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배움에 있어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마음이다. 배우려는 마음. 그 마음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당신은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한 그때의 솔직한 대답은 “나는 이 괴롭고 거지같은 인도 땅에서 아무 것도 배우고 싶지 않아!”라는 자백이었을 것이다. 배울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낯선 경험의 충격에 빠져 배울 수도 배우려는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지옥에서도 분명 배울 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무엇인가를 대할 때 대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마주하는 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를 통해 무엇을 만나고 배울 수 있는가는 결국 나에게 달린 문제이다. 무엇인가 납득되지 않을 때 진지하게 물어보자. “나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로부터 세상이 만든 허상을 깨는 첫걸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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