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 ‘스탕달’은 그의 一生(일생)에서 최대의 연애를 했다. 그의 <꿀>은 이름하되 ‘마틸드’. ‘스탕달’은 ‘마틸드’의 영상을 못 잊어 그의 作品(작품)마다 마다에 ‘마틸드’의 초상을 그렸다. 곧 그의 유명한 “연애론”은 ‘마틸드’의 유산이다. ‘단테’의 “神曲(신곡)”이 ‘비아트리스’(단테의 굴)의 유산이었듯이-.
  사랑은 ‘하트’로서 하는 것이지 ‘헤드’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보딜론’의 “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참되고 순진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수천의 눈을 가졌어도 진정(眞情-사랑)은 오직 하나뿐. 덧붙여 가로되, 온 인생의 등불은 꺼지리, 사랑이 끝나고 말면.
  스탕달의 연애론을 끝까지 읽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發刊(발간)된 후 10년 동안에 17부밖에 안 팔린 지독히 ‘이데올로기’에 直向(직향)한 책. 그것이 연애의 論(론)임에랴. 스탕달의 ‘마틸드’에게 ‘피’ 본 것은 반가운 일이다. <머리연애>를 갈망하는 미스 諸氏(제씨)야말로 골 빠진 아낙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理由(이유)가 介入(개입)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슬프게도 슬픈 일이 現代人(현대인)의 사랑임이여. 라고 神(신)은 말한다.
  사랑은 文學(문학)의 傳統的(전통적) 오랜, 많은 소재를 제공해 주었고, 씨(氏)야말로 영원히 매력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相對的(상대적)인 값비싼 産物(산물)이다. 여기에서 사랑의 運命(운명)이 多端(다단)해지고, 심하게 전개되어 性(성)이라는 나운으로 대치되고 있다. 많은 경우 小說(소설)에 있어서 제기되는 <사랑>은 <性(성)>으로 直結(직결)된다. 미안하게도 난 性(성)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文學(문학)과 性(성)>의 聯帶性(연대성)을. ‘로즈ㆍ베이란’씨는 사랑을 定義(정의)하여 <두 여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循環定義(순환정의)로서 論理的(논리적) 오류에 빠진 정의지만 재미있다는 아량으로 받아주자. 大學(대학) 2학년의 유치한 기염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가. <소포모>는 <소포모릭>의 아량에서 얻어진 말. ‘미니ㆍ스커트’도 잘 봐주자. 그렇다고 ‘DㆍHㆍ로렌스’의 <好色文學論(호색문학론)>을 同調(동조)해 主唱(주창)할 勇氣(용기)는 없다. 그것은 매우 有感(유감)스러운 일이다. 文學(문학)에 있어서의 性(성)이라고 꼬집어 말할 때 그性(성)의 이미저리는, 너무 벌거벗은, 똥구멍이-락말락한, 그래서 약간 추한 結果(결과) 미풍양속을 紊亂(문란)시킨다는 內容(내용)이여. 사랑이 사랑, 그 이하로 타락되었다고 생각할 때 性問題(성문제)는 제기된다. 사랑, 그 以下(이하)의 구체적 내용의 의미는 무얼까.
  약간 쑥스러운,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빌어먹을>하고 투덜대는, 여기에서 문제는 발단된다. K는 어제 <열쇄구멍 도덕>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버스 간에서…. 버스는 물론…. 그래서 그가 <빌어먹을>이라고…밤과 밤의 은밀한 정적 속에서 생각해보라. 네 비밀한 가슴의 나팔소리를 경청해보라. 너의 솔직하고도 용기 있는 肉聲(육성)을 창공으로 외쳐보라. 라고 릴케씨며 에머슨씨며 神(신)까지도 말했다. 그러니 뚜벅뚜벅 걸어가라, 미니를 입으라, 그리고 용기를 내라. 라고 神(신)은 말했다. 그러나 접속사의 비극은 항상 우리들의 친구가 됨이여. 자기를 大衆(대중)과 帶連(대련)시키고, 公衆(공중)으로 擴大(확대)시킬때 비극은 심해지리라. 기만일까. ‘獨斷(독단)’ 일까. 비굴한 ‘에고티즘’ 일까. 라고 凡人(범인)은 의심한다. 그것이 ‘유니버살ㆍ센스’가 될지는 不確實(불확실)하지만 자기 哲學(철학)이 될 것은 분명하다. 라고 神(신)은 말한다. 그러니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단 가끔 네 비밀한 심장의 소리와 離返(이반)되는지 어떤지를 알아두라. 만일 符合(부합)된다면 더 힘차게 행진할 것이며, 아니면, 네 自身(자신)은 똥통에서 수영하는 예쁜(?) 아가씨를 무척 닮았다고 믿어라, 이것은 나의 肉聲(육성)이야, 라고 神(신)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命令(명령)한다.
  한 篇(편)의 小說(소설)을 읽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허벅지를 전시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가씨가 아니라면, 난 인생을 바라요, 처절하기까지 한 眞實(진실)된 人生(인생)을요. 솔직하다. 人生(인생)은 정말 모두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1749년 ‘스코트랜드’에서 出版(출판)된 ‘죤ㆍ클레란드’의 <어떤 娼婦(창부)의 手記(수기)>가 英(영)ㆍ美國(미국)에서 發賣禁止(발매금지)를 당했다. 性(성)의 쾌락을 너무 노골적으로 描寫(묘사)했다는 ‘리즌’에서다. 그것이 1964년에 發行(발행)이 許可(허가)되었고, 몇 년 전에 한국에도 번역 소개됐다. <화니ㆍ힐>(娼婦(창부)의 네임)이란 改題(개제)로.
  키를 잠시 固定(고정)시켜보자. 뚜루게네프는 人間(인간)을 햄릿型(형)과 돈키호테型(형)으로 兩分(양분)했다. 잠시 햄릿을 닮아보자는 거다. 파스칼의 ‘갈대’들에게 熟考(숙고)는 가끔 마이너스도 되지만 많은 의미에서 필요도 있는 법이니까. 바보가 羨望(선망)의 對象(대상)이 되는 경우란 어처구니없게도 稀少(희소)하니까다.
  異性(이성) 얘기가 전혀 제거된 소설이 있을까. 아마 있다면 短篇(단편)에서의 이그잼플일 것이고 長篇(장편)에서는 拙作(졸작)이리라. 적어도 눈 빠진 히로우일라. 性(성)은 人生(인생)의 全面(전면)에서 볼 때 人生(인생)의 重要(중요)한 一面(일면)이다. 性(성)을 人生(인생) (小說(소설))의 전체로 보는 作家(작가)도 있으나 결코 神通(신통)하진 않다. ‘죤ㆍ클레란드’ 는 차라리 三流畵伯(삼류화백)이리라. 그럼 ‘DㆍHㆍ로렌스’는 어떤가. ‘로렌스’의 ‘엣센스’ 는 달리 基點(기점)을 向(향)하고 있다. 온 평생을 ‘오이디푸스ㆍ콤플렉스’ 渦中(와중)에서 左衝右突(좌충우돌)한 ‘로렌스’는 性(성)의 表出(표출)을 仲媒者(중매자)로 하여 ‘메커니즘’에 지친 精神的(정신적) 苦惱(고뇌)를 解消(해소)시키는데 ‘포인트’를 두고 있다. ‘로렌스’는 ‘휘트맨’論(론)에서 ‘메커니즘’의 처절한 비극을 悚然(송연)히 吐(토)한다. 이 이상 더 기계적인 것이 있을까, 生命(생명)과 物質(물질)과의 差異(차이)는 生命(생명),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創造物(창조물) 등이 或種(혹종)의 物質(물질)로부터 곧 이탈하여버리며, 幸福(행복)스럽게도 대부분의 물질을 무시하며 그리고 특히 선택된 물질의 어떤 小部分(소부분)에 對(대)해서만 향해 있는 ‘인스팅트’를 가지고 있다는 點(점)에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創造物(창조물) 상호 간에 관해서 이것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어찌할 수 없이 서로 부딪치고 부딪친 결과가 하나의 거대한 雪塊(설괴)로 化(화)해버린 것인데 왜 그런지 그 大部分(대부분)의 살아있는 창조물은 다른 살아있는 창조물의 시야와 냄새와 소리를 피하며 한평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꿀벌까지도 女王蜂(여왕봉)에게로 모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생각만 해도 골통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는 自身(자신)이 사랑의 情熱(정열)에 가슴조리는 자임을 자랑스럽게 주절댄다> <차타레이 夫人(부인)의 꿀>을 읽었는가. <이레느 부인>은? 사람은 무한히 독자적이고 이기주의적 기질이 많은 법이다. 말하리라. 외담. 혹은 純愛(순애). 아무래도 正答(정답)은 하나뿐 비밀한 가슴은 정체가 모호하다고. 또 엉망이라고 하지만 근본문제는 性格(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私生兒(사생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껄렁한 고전이다. 맏아들로 한 몫 톡톡히 본다. 自由夫人(자유부인)들이 自由(자유) 덕에 춤바람이 나듯. 우리가 求(구)하는바, 써 盲點(맹점)은 <짐은 가로되 國家(국가)다>에 內在(내재)한다.
  항상 스캔들은 頻發(빈발)하는 것이며, 그래서 人生(인생)은 재미있고 小說(소설)은 조작된다.
  그대로 造作(조작)인 것이다.
  로렌스는 지독히 性愛好家(성애호가)였다. 그래서 그는 바보스러운 艶福者(염복자)다. 염복자의 대부분은 골빠진 사람이다. 아니면 동정스럽게도 불쌍한 사람들이다.
  넌 性(성)을 즐기려 하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제 종교입니다. 또 말한다. 그것은 길가의 꽃입니다. 라고 작가들은 말했다.
  우리는 항시 히도니스트를 갈망한다. 여기에서 트래지는 야기된다. 그러나 그 트래지는 심심찮게 희극적 엘리멘트를 內包(내포)하고 있어 우리를 슬프게까지도 할 수 있다.
  거울을 자주 보는 아가씨가 철학자가 됐다면 沈靑(심청)의 열렬한 팬일라. 심청이가 죽은지는 아마 오래일 것이다. 우리에겐 불행하게도 쇼ㆍ걸이 필요하다. 예쁜 아가씨는 거울에 대해 증오하리라. 좀 더 오묘한 거울이 필요한 것이다. 꾸부러지는 눈길마다 그러면 어떤 거울이 필요한가. 저 프로이드 닥터의 가장 매력적인 <마음의 거울>이 필요한 것이다. <行動(행동)의 모든 밑바닥에는 性的衝動(성적충동)이 基底(기저)라.> 로렌스는 새엄마를 친하기에 선수였다. 알버트ㆍ모델은 ‘우울병이나 히스테리는 性機能(성기능)의 反射作用(반사작용)’이라고. 一理(일리)있는 말이다.
  비틀거린다. 처절하게 왼밤을 지새며 울고 싶다. 무한히 無法者(무법자)를 憧憬(동경)한다. 그리고 不安(불안)과 초조한 생각에서 미칠 것만 같다. 고 神(신)은 말한다. 참으로 잃어버린 것이 많은 것 같다. 뒤져보라. 네 가슴속가지 속속들이 뒤져보라. 이 正體不明(정체불명)의 事物(사물)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性(성)은 결코 文學(문학)의 편리한 道具(도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보다 중요한 참(眞(진))의 체험으로써만 直向(직향)해 있을 뿐이다. 道具(도구)는 人間(인간)을 니힐리티의 注射器(주사기)와 같은 利用(이용)에서만 必要(필요)할 뿐이다.
  小說(소설)이 하나의 ‘피’로 변화할 때는 왔다. 비너스의 후예가 어찌 <활러트>에 局限(국한)되어서야. <피는 물보다 짙다>는 俗語(속어)에서 性(성)의 正體(정체)를 탐색해야 한다.
  性(성)이 小說(소설)의 目的(목적)이 된다면 두 方向(방향)이 設定(설정)된다. 만화의 충상화가 그것이다. 사실 진흙속의 蓮(연)을 닮은 性(성)은 옛금에 이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性(성)은 目的(목적)으로서의 性(성)의 可能性(가능성)의 모색에서다. 可能性(가능성)은 發芽(발아)되고 있다.
  한 사람의 運命(운명)이 個人(개인)(勿論(물론) 自身(자신))에 依(의)해 개척됨은 非一非再(비일비재)의 있어 온 現象(현상)이다. 發現(발현)의 싹이 트는 이 즈음 누가 큐피드의 運命(운명)의 키를 조종할 것인가. 그렇다. 기다리기를 배우며 일하는 법을 배우자. 살아야 한다. 그저 목적없이라도 살아야 한다. 삶은 벌써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을 찾는다면 너희는 充分條件(충분조건)까지 갖추리라고 神(신)은 말하리라.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