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문학에 노벨상이 없을까
처녀림 가진 작가 없는 것이 원인


  한 집단과 전체에 의해 파괴되는 개인인식의 심층을 깊이 묘사한 클로드 시몽에게 금년도 노벨문학상이 돌아갔다.
  혹시 중공의 작가 파금(巴金)이 아닐까 하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우리나라 작가에게는 그것이 언제쯤 오게 될 것인가 하는 간절한 기대 속에 금년도 노벨상은 우리에게 누보로망이라고 하는 생소한 문학의 장(章)을 하나 던져줌과 아울러 그 누보로망의 기수인 프랑스 작가에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왜 한국문학에는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을까? 곰곰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얘기할 때마다 우리는 늘 그 일차적 책임을 정치적 안배의 문제에다가 전가해 놓곤 했다.
  과연 그럴까? 그것은 어느 만큼은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다음의 이유로 우리는 번역의 문제를 들추어냈다.
  기실 이 문제는 심각한 벽이기는 하다. 더구나 우리 문학을 대함에 있어 먼저 우리의 문화, 역사, 그리고 우리의 삶을 열심히 이해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전혀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명 번역가가 그럴듯하게 우리 것을 번역해 놓았다고 한들 그 효과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한번 진심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에게 노벨상이 오지 않는 이유가 과연 이렇듯 정치적 안배와 번역의 문제 때문만 일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닐 것이다.
  하나의 처녀림을 가진 작가가 우리에게는 아직 없어서 그렇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작가만의 우주. 그런 우주를 가진 작가가 우리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연전에 콜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 구미 각 신문들의 격렬한 문구들을 잊을 수가 없다.
  ‘지성의 건재.’ ‘지성의 승리’ 대저 이런 표현들이었다. 끝없는 남미(南美) 정치의 수난 속에서도 경제의 곤궁 속에서도 그 나라가 살아있는 나라이며 두려운 것은 그 나라에 지성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노벨상을 기다리기 전에 이 땅에 지성의 회복과 처녀림을 가진 작가를 먼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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