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019.10.15 19:10

동대신문

상단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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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 문학상 희곡 시나리오 장원트럭

트럭

구성미

 

등장인물

강경문
이선경


무대

트럭이 한 대 있다. 야외 풍광이다. 이때 트럭은 실제가 아니더라도 1.5 톤 트럭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설정하면 된다.

 


 짧은 반바지에 상의는 민소매다. 목에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을 감고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배낭을 메고 있다. 선경이다. 선경은 오소영의 <기억상실>을 흥얼거리며 무대 위를  걷고 있다. 노래를 반쯤 부르고 나면 배경음악으로 원곡이 깔린다.
 트럭은 가로로 대어져 있다.

 내가 누구냐고 나도 몰라 그런 게 어딨냐고 이럴 수도 있지, 뭐
 왜 비틀거리냐고 배가 너무 고파 왜 굶고 있냐고 돈이 없으니까
 아무리 걸어도 보이는 것이 없어 난 이렇게 배고프고 더러운데 쉴 곳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 할까
 도대체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딘 거야 어딘 거야 어딘 거야 도대체 여긴
 어딘 거야 어딘 거야 어딘 거야 도대체 여긴

 어디 사냐고 나도 몰라 그런 게 어딨냐고 여기 있지, 뭐
 잘 곳은 있냐고 물론 없지 어떻게 할 거냐고 될 대로 되라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난 이렇게 지치고 외로운데 머물 곳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  할까
 도대체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딘 거야 어딘 거야 어딘 거야 도대체 여긴
 어딘 거야 어딘 거야 어딘 거야 도대체 여긴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
 빵빵, 경적 소리 들린다.
 트럭을 타고 있는 이는 경문이다.

경문 타세요, 비와요.
선경 안 타요, 트럭은.
경문 트럭이 뭐 어때서?
선경 트럭 같은 거 안 탄다니까요.
경문 트럭 같은 거요?
선경 그래요, 트럭 같은 거!
경문 트럭 같은 거라도 타요, 비도 오는데.
선경 여름은 그런 거예요. 비가 와도 쉽게 그치고
경문 (말을 끊으며) 모기향처럼 타버리는 거요? (사이) 흔적도 없이.

 경문, 선경 마주보고 웃는다.

경문 타요, 타. 못 믿어요? 나.
선경 아니, 믿어요.
경문 대체 뭘 보고? 학생, 그렇게 사람 쉽게 믿음 안 돼요.
선경 그러니까 아저씬 믿는다구요.
경문 대체 뭘?
선경 아저씨, 리눅스 쓰죠?
경문 리눅스 쓰는 사람도 있어요?
선경 (경문을 가리키며) 여기.
경문 어떻게 알았어요?
선경 변태잖아요, 이렇게 희여멀건 얼굴로 트럭 모는 거.
경문 ‘당신의 컴퓨터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재수 없어요. 그쵸? 아, 얼른 타기나  해요.
선경 나, 별로 안 치명적이에요. 그니까 그냥 가세요.
경문 내가 내리죠, 뭐.

 경문, 트럭에서 내린다.
 
선경 비도 오는데 저기 계곡에 들어가 있을까요? 이렇게 젖기는 싫어요. 억울하잖아요. 가요,  우리.

 선경, 뛰어간다.
 경문, 그런 선경을 쫒아간다.

암전


 경문과 선경, 트럭을 세워둔 옆에 앉아 있다.

선경 KGB 내기 할까요?
경문 KGB 내기?
선경 네.
경문 첩보영화 찍니?
선경 웬 첩보?
경문 푸틴이 근무했던 Komitet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KGB. 그거 말하는 거 아녔          어?
선경 별 여러 개 그려진 맥주, 한 번도 못 봤어요? 지들은 보드카라고도 하지만, 뭐.
경문 맥주? KGB가 맥주 이름이란 말야? 거참, 혁명적인 맥주네.
선경 그걸로 화염병 만들면 뽀대나겠다. 헤헤.
경문 화염병? 학생 아니라더니 학생이네, 뭘. 학교는 어떻게 하고?
선경 주4파에요.
경문 주사파(主思派)? 얘가, 얘가. 화염병 얘기 꺼낼 때부터 이상하더라만. 가만, 너 85년생이  아니라 85학번 아냐?
선경 치이. 일주일에 학교 사흘 간다는 얘기예요. 저는 일주일에 사흘 안 간다는 거구요.
경문 (머리를 들춰 보이며) 나는 아직도 이 흰머리, 새치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닌가봐. 많이  변했다.
선경 새치면 어떻고 진짜 흰머리면 또 어쩔 거야?
경문 그러게.
선경 (경문 머리를 뽑으며) 이렇게 뽑아버리면 되지, 뭐.
경문 따끔거려.
선경 아저씨도 화염병 던지고 그랬어요?
경문 화염병? (사이) 손톱 깎을 시간도 없었어, 그때는.
선경 참, 의대 다녔댔지.

 선경, 경문의 손을 덥석 잡더니 요란스럽게 살핀다. 이내 손을 놓는다.

선경 어어, 이제 손톱 자르고 다닐 시간 있나 보네요.
경문 발도 볼래? 발톱 자를 시간도 있는데. 하하.
선경 나, 웃어야 돼요?
경문 그럼 울래? (사이) 한창 해부할 때였지. 처음에나 장갑 끼지, 좀 지나봐. 맨손으로도 하 지. 입에는 초코파이를 물고 눈으로는 식도부터 위까지를 쳐다보고 있는 거지. ‘내가 먹 는 초코파이가 저런 식으로 타고 내려가고 있겠지.’ 그러면 괜히 기쁘고 그랬어. 하루는  동기가 제사 모시고 와서 인절미를 싸왔어. 인절미 고물을 손으로 꾹꾹 찍어 가면서 먹었 지. 게걸스럽게 고물 묻은 손가락을 빨아먹었어. 한참 먹고 보니까 손톱에 뭐가 잔뜩 끼 여 있는 거야. 인절미 고물인가 했는데, 시체 살갗이……. 그 담부터 뒤는 안 닦아도 손 톱은 깎아.
선경 어우.
경문 뒤도 닦아.
선경 아저씨 장난치는 거, 어색해. 알아요?
경문 미안해.
선경 아저씨, 휴가야?
경문 휴가?
선경 그래요, 휴가. (트럭을 가리키며) 저건 캠핑카?
경문 내가 하면 휴가고 니가 하면 여행이지?
선경 헤헤. 아저씨가 이러고 다니면 노숙이고 내가 하면 무전여행이고 뭐, 그런 거죠.
경문 어디로 가니?
선경 글쎄요. 아저씬?
경문 글쎄다, 나도.
선경 철길을 찾아다니던 중이었어요.
경문 기차 타려고?
선경 아뇨.
경문 그럼?
선경 하이샤파 연필깎기 알아요?
경문 나 학교 다닐 때, 연필깎기가 가당키나 했겠니?
선경 어렸을 때 기차 모양으로 된 햐이샤파가 갖고 싶었어요. 근데 아빠는 매번 칼로, 것도 커 트칼도 아녔어요. 접었다가 펴는 (검지만 펴서 그 정도의 길이라는 것을 인지시킨다.)200 원짜리 칼, 알려나…….
경문 얘기해.
선경 그걸로 엄마 눈썹 그리는 연필도 깎아주고, 내 연필도 깎아줬죠. 그깟 연필깎기 얼마나  한다고……. 아빠는 딸내미가 학교에서 연필심이 부러지지는 않을까, 매일 한 다스씩을  깎아줬어요. 그래서 나는 필통이 없었어요. 연필 한 다스통이 필통이었으니까. 하루는 아 빠가 연필깎기를 줬어요. 햐이샤파는 아녔지만, 분홍 바탕에 아톰이 그려진 샤파였어요.  학교 가서 남들처럼 책상 위에 샤파를 올려뒀죠. 일부러 심을 부러뜨려서 샤파 손잡이를  돌리는데……. 제 기분이 어땠게요?
경문 좋았겠지, 물론.
선경 너무 깎아대서 죄다 몽당연필로 만들어버렸죠. 집에 가면 아빠는 고걸 또 모나미 볼펜 몸 통에 끼워서 쓸 테지만, 상관없었어요.경문 맘이 안 쓰였어?
선경 아저씨, 애 안 키워봤구나.
경문 그래 보이니?
선경 기껏 여덟, 아홉 살 먹은 애가 아빠 걱정하고, 엄마 위해주면요. 주워온 자식 아니고서야  부모들은 다 마음 아파한다구요. 그저 그 나이엔 막 떼쓰고 땡깡부리는 게 효자고, 효녀 예요.
경문 그래서 넌 효도 많이 했니?
선경 어땠을 거 같아요?
경문 아주 오지게 했을 거 같은데.
선경 그날도 오지게 했어요, 효도. ‘즐거운 생활’ 시간이었나? 보정이가……. 아, 짝꿍 이름이  보정이었어요. 금도 안 넘어갔는데 대뜸 걔가 내 샤파를 가져가는 거예요. “김보정! 나  선 안 넘어갔어. 근데 방금 니 팔, 금 넘어 왔다. 그 팔 잘라서 내놔, 얼른.” 내가 맹랑하 게 그랬죠. 그랬더니 걔가 그래요. “야! 이선경! 니가 거지야? 우리 집에 얹혀사는데다가,  이젠 아주 요런 것도 주워 쓰네.”
경문 그땐 그래야지. “야, 이게 니 거라는 증거를 대봐, 증거를.”
선경 그렇게 말했죠, 물론. 근데 걔가 그래요. “야! 여기 아톰 주먹지고 있는 엄지손가락에  요 거 안 보여? 내가 매니큐어 칠해놓은 거야.”

 경문, 웃음을 참는다.

선경 눈치 보긴. 그냥 웃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래? 자.” 냅다 걔 머리에다 집어 던졌 죠, 뭐. “촌스럽게 빨간 볼펜으로 몇 줄 그은 게 매니큐어라고.” ‘즐거운 생활’시간이어 서  망정이었지 ‘바른 생활’시간이었으면…….

 경문, 선경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선경, 경문 코를 잡아당긴다.

선경 그 뒤로 내가 코를 잡아당기면, 아빠는 연필을 깎기 시작했어요.
경문 칙칙폭폭. 연필이 없어서 어쩌지, 이런. 칙칙폭폭.
선경 (경문 코에서 손을 떼며) 선로가 베고 싶었어요.
경문 목침처럼?
선경 …….
경문 누울래?
선경 피곤하죠? 전 괜찮으니까 누워요.

 경문, 눕는다.

경문 혹시, 너 철길 베고 잠이라도 자려고 그랬니? 근데 그 철길, 새까맣게 녹슬어 있었지? 맞 아? 틀려? 내 말 맞지?
선경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제도 철길을 베고 잤는데, 일어나 보니까 아직도 살아 있 는 거예요, 내가. 아저씨 말대루 기차가 다닌 지 꽤 오래됐는지 선로가 까맣게 녹이 슬어  있데요. 종일 찾아다닌 기찻길 중에 거기가 제일 맘에 들었는데…….
경문 녹이 슬어 있어서 맘에 들었나봐?
선경 그랬던가 봐요. 헤헤.
경문 누가 너한테 천 년, 만 년 살랬니? (사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선경 (말을 끊으며) 알아서 죽게 돼 있다구요?
경문 잘 아네, 뭘. 근데 왜 그래? 그러는 거 귀찮지도 않아?
선경 부지런한 게 탈이죠, 뭐.
경문 너무 바지런하게 굴지 마. 알았니?
선경 듣고 있어요.
경문 철길 대신 팔베개……. 어때?

 선경, 누워서 경문 팔을 끌어당긴다.

암전


 목소리만 들린다.

선경 배고프다.
경문 그러게, 트럭 타고 읍내가자니까. 
선경 트럭 같은 거 안 탄다니까요.
경문 트럭이 뭐 어때서?

 개 짖는 소리 들린다.

선경 부탄가스는 남았죠?
경문 응.
선경 아저씨, 우리 저 개 잡자!
경문 뉘 집 갠 줄 알고? 
선경 개한테도 고성방가죄가 성립된다구요. 아저씨가 체포만 해오면 내가 사형 집행할게요,  응?
경문 올라가.
선경 어디?
경문 저 감나무. 망봐야지.

 둔탁한 소리, 들린다.

 경문, 선경을 부축해서 무대로 나온다.
 선경은 왼쪽 팔과 왼쪽 다리를 천으로 대충 감은 채로 있다.
 이때 무대는 침대 있고, 간이 탁자 등이 놓인 보통 방의 모습이다.
 경문, 선경이 침대에 앉는 것을 도와준다.

선경 아저씨 뒤돌아서 앉아봐.
경문 (돌아서서 앉으며)이렇게?

 선경, 경문 등에 기대고 부빈다.

경문 뭐하는 거야?
선경 어우, 가려워. 모기 물렸나봐.
경문 구급상자에 물파스 있을 텐데, 잠깐만.
선경 그냥 긁어요.

 경문, 선경 등을 긁는다. 

선경 아, 손을 넣어야죠.

 선경, 티셔츠를 올린다.

경문 선경아.
선경 어, 며칠 만에 첨으로 내 이름 불러줬네요.
경문 (옷을 내려주며) 할 건 하고 살아야지.
선경 뭐? 브레지어? 답답해요, 후크 채우면. 내 등에서 후크선장이 사는 것만 같아, 꼭.
경문 피터팬이 언제부터 여자였니?
선경 팅커벨은 후크선장 좋아하나, 뭐.
경문 물파스 가져올게. 긁으면 덧나.
선경 침 발라줘요.
경문 이선경.
선경 그렇게 나지막이 말하니까 가렵던 게 이제 막 쓰라려.
경문 다행이네.
선경 머리는 감겨줄 수 있죠?

 경문, 물 담은 양동이, 세숫대야, 바가지와 샴푸, 린스 등속을 챙겨온다.

경문 박아.
선경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경문 해보고 싶었어, 한 번쯤은. (대야에 선경이 머리를 담근다.)
경문  (손에 샴푸를 짜서 선경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팠지?
선경 단감 따봤어요? 떫감 말고, 단감.
경문 떫감? 구경도 못했어, 나는.
선경 단감 딸 때요, 올라가서 따는 줄 알아요? 아녜요, 긴 장대를 만들어요, 대 같은 걸로. 그 런 다음에 홈을 만들어서 집게처럼 만들어요, 윗부분을. 그걸로 감이 달린 나뭇가지를 꺾 어요. 떨어진 감을 줍는 건 어린 우리 몫이었죠. 나무에서 굴러 떨어져도 잔상처만 있지,  멀쩡해요, 감도. 그런데 설마 사람 뼈가 부러지기야 했겠어요?

 선경, 거품 묻은 경문 손을 끌어당긴다. 그리곤 입에 가져다댄다.

경문 이선경!
선경 (한 번 더 경문 손을 핥는다.) 어? 맛없다?
경문 (머리를 헹구려고 준비해둔 물을 바가지로 퍼서 선경 입에 가져다댄다.) 벌려.
선경 (억지로 한 모금 마신다.) 고거 먹는다고 죽나, 뭐.
경문 뱉어야지, 그걸 또 삼키니?
선경 말을 해야 알죠.
경문 (또 물을 선경 입에 가져다 댄다.) 선경아.
선경 한 번은 선생님이 그랬어요. 에쿠스를 보고 너무 부러웠다고……. ‘대학교수면 에쿠스 정 도 살 수 있을 텐데. 사면되지, 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연극 <에쿠우 스>였던 거예요. 왜, 안 웃겨요?
경문 나는 어렸을 때, 청와대가 서울대보다 더 좋은 대학인 줄 알았어.
선경 중국에 그런 대학 있잖아요.
경문 청화대?
선경 서울대보다 좋은 대학 맞잖아요. 헤헤.

 선경, 거품 묻은 머리카락으로 이런 저런 모양을 만든다.

선경 (올림머리를 만들며) 이건 미스코리아 머리!
경문 (선경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미스코리아는 사자머리지.
선경 미스코리아긴 한 거예요, 나?
경문 (웃는다.) 이제 헹구자. (바가지의 물을 선경의 머리에 붓는다.)

 선경, 말이 없다. 경문은 선경의 고개 숙인 얼굴을 유심히 본다.

경문 눈에 거품 들어갔어?
선경 울어요.
경문 거꾸로다. “우니?” 라고 물으면 대개 “눈에 거품이 들어가서요.” 이러는 거 아냐? 드라마 에선.
선경 배우 얼굴은 아니죠, 아저씨가.
경문 (웃는다.) 미안해서 어쩌냐, 이거,

 경문, 선경의 머리에 물을 반복해서 부어준다.
 옷걸이에 걸린 수건으로 선경의 머리를 감싸주며 부축해 침대로 간다.

 침대에 경문, 선경 걸터앉아 있다.

경문 힘드니?
선경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이며) 네!
경문 보통은 힘없이 “아니요.” 라고 하는 거 아닌가?
선경 힘들다는 대답을 왜 그렇게 씩씩하게 하냐는 거죠?
경문 그래.
선경 이상문학상 알아요?
경문 내가 바보니?
선경 아저씨 피카소도 알아요?
경문 모르는 사람도 있니?
선경 프랑스 사람들 중 90 퍼센트는 피카소를 모른대요.
경문 깐느에 공항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 뭐.
선경 피카소 아빠가요.
경문 돈 호세 루이즈 블라스코?
선경 쓸데없이 뭘 그런 거 기억하고 그래요? 여튼 그 사람이요. 피카소가 열세 살 때, 자기보 다 그림 실력이 나은 걸 알게 됐대요. 피카소 아빠가 미술 선생님었던가? 어쨌든, 피카소 한테 자기가 썼던 화구를 다 줬대요. 그리곤 그림을 안 그렸대요. (사이) 다들 너무 잘 살 아내니까, 나 하나쯤은 안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문 그래서 철길 베고?
선경 새벽에 집에서 나오는데……. 현관문을 거칠게 닫았어요.
경문 근데 아무도 안 깨지?
선경 자꾸 돌아보는데, 아무도 안 나오는 거예요. 걷다가 돌아다보고, 다시 돌아가고……. 죽으 러 가겠다는 애가 썬크림을 발라요. 웃기죠?
경문 마찬가지야. 가운 벗겠다는 놈이 당직실에 에어컨 좀 달아달라고 원무 과장한테 따지러  갔다니까.
선경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부석사」에 보면요. 33페이지 열다섯째 줄에 오타가 있어요.  근데 어떻게 온전하겠어요. 아저씨나 나나……. 필사를 하는데 오타도 베껴야 하는지 고 민했어요. 그랬어요, 나는.
경문 그랬니?
선경 사방이요. 사방이 말예요. 온통 까매요. 어떡할까요? 나는.
경문 …….
선경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경문 온통 까매?
선경 막막해요, 아주.
경문 별은 안 떴니?
선경 야맹증, 야맹증 있어요, 나.
경문 당근 먹자!
선경 괜찮아질까요?
경문 더 나빠지진 않겠지. (사이) 학부 첫 학기 때 선배들이 여관을 잡아주더라.
선경 여관? 거긴 그런 것도 관리해줘요? 
경문 그런 거?
선경 그런 거!
경문 원, 녀석도……. 여관에서 인체 모양을 안고 신경 따위를 종일 외우고 앉았는 거야.
선경 신경? 신경질 막 나겠다, 정말.
경문 그쯤 되면 먹은 게 없어도 토악질이 나와.
선경 아저씨도 토했어?
경문 나는 사람 아닌가, 뭐. 선배 앞에서 줄줄 외워야 여관방을 나가. 나가고 싶어서 딱 죽겠 는데, 그만큼 또 안 외워지더라. 결국엔 동기들은 다 나가고 나랑 여자 선배 하나만 남았 어. 술술 외우는 놈들만 술 사주겠다 이거였지.
선경 뛰어내리지, 그냥.
경문 창문을 열었는데, 창살이 촘촘하게 돼 있더라.
선경 창문을 열었어, 또? 몇 층이었는데요?
경문 5층. 5층 아니라 50층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었어. (사이) 안 되겠는지 선배가 그러더라.  “강경문! 집중해서 해봐. 다 맞추면 오늘 너 총각딱지 내가 떼줄게.” 내가 무슨 말을 하 겠어? 가만있었지, 그냥. 내가 조용하니까 선배가 그러대. “좋아, 하나 틀리면 만지게는  해줄게.”
선경 뗐어요?
경문 (웃는다.) …….
선경 그 한 마디에 다 맞춘 거예요?
경문 틀렸어, 전부.
선경 근데?
경문 내가 딸딸 외웠음 에로 말고 스릴러 한 편 찍었을 거래, 선배 말이.
선경 에로?
경문 (웃는다.) 선배가 그러대. “힘드니, 너?” 씩씩하게 답했지. “힘듭니다, 저.” “깜깜해?” “막 막해요, 아주.” “너 지금 모자이크 만드는 거다.”
선경 모자이크?
경문 모자이크!
선경 아저씨 미대생 아니잖아.
경문 “무슨 애가 메타포도 모르니?” 선배 대사였지. 너한테만 왜 까만 게 나오는가 싶지?
선경 …….
경문 눈썹을 만드는 기간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선경 아저씨.
경문 듣고 있어.
선경 내가 만드는 모자이크는 말이에요. 나는 말예요…….
경문 계속 해.
선경 뒷통수만 그려졌나 봐, 내 모자이큰.
경문 남들보다 큰가봐, 모자이크가.
선경 눈썹도 채 못 만들고 죽을 거 같아요, 나.
경문 내가 가서 좀 거들까?
선경 아저씨 건 어쩌구?
경문 기권!
선경 보고 싶어요?
경문 뭐가?
선경 그 선배란 사람.
경문 보고 싶으면?
선경 만나야지, 뭐.
경문 만나면?
선경 그건 내 알 바 아니죠. (웃는다.)
경문 (웃는다.) …….
선경 사모님은 아닌가봐.
경문 죽었어, 선배.
선경 사랑했어요?
경문 좋아했어, 내가.
선경 같은 얘기잖아, 결국.
경문 고양이가 쥐 좋아하지?
선경 쥐가 고양이 좋아하나, 뭐.
경문 고양이가 쥐 사랑하니?
선경 사랑하는지도 모르지. 사랑해서 헤어진다는데, 사랑해서 먹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경문 그게 좋아하는 거지. 이기적인 거야, 좋아하는 거, 그거.
선경 잊었어요, 이젠?
경문 죽은 사람이야, 이미. 차도 하나 똑똑히 못 봐? 교통사고, 드라마가 안 되잖아, 이건.
선경 슬펐어요?
경문 아니.
선경 그럼?
경문 선배 방에 있을 화장대가 생각났어. 스킨, 로션. 욕실에 샴푸, 치약 ……. 전기밥솥에 있 을 밥, 냉장고에 김치, 우편함에 꽃혀 있을 고지서들. ‘이제 어떡해. 고것들 이제 어떡해.’  그냥 그랬지, 뭐.
선경 방바닥에 남아 있을 머리카락은 또 어떡해……. 그쵸?
경문 빈소엘 갔는데 영정사진 속 선배 목덜미에 내 손이 있는 거야. 어땠겠니, 내가.
선경 …….
경문 거제도 갔을 때 유람선에서 찍은 거더라. 십자동굴이 있어, 해금강엔. 거기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으면 오래 산대. 그나저나 절경이야, 절경.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는데 물이  떨어지더라. 그걸 보고 선배가 그러대. 선밴 나보다 두 살이나 많으니까 더 많이 받아 마 셔야겠다고……. 고갤 젖히고 눈을 감았는데, 쳐다만 볼 수가 없더라. 막아버렸지, 입을.  계속 투덜댔어, 선배가. 입을 뗐을 때 이미 뱃머리가 십자동굴에서 빠져나온 후였거든.
선경 아저씨, 나 머리 다 말랐어. 저 빗 좀 줘.

 경문, 간이 탁자 위에 빗을 가지러 간다.

선경 빗겨줘요.
경문 (빗어준다.) 이렇게?
선경 응. 이 빗 저기 도로 놔둬요.

 경문, 빗을 제자리에 두고 돌아온다.

선경 이 빗하고 저 빗 차이인 거야. 이승하고 저승은…….
경문 그때, 물 받아먹게 뒀으면 오래 살았겠지?
선경 오래 살면?
경문 생각조차 안하고 살았겠지. (사이) 그날, 수술이 잡혔어, 갑자기. 교통사고래. 흔한 게 교 통사고지, 뭐. 피가 너무 나서 내 사타구니까지 뜨뜻해지더라. 수술비만 챙겼지.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죽어버렸거든. 당직실에서 신발에 묻은 피를 씻어내는데, 눈물이 나더라.  선배 빈소에 가서도 육개장에 밥 말아서 두 공기를 비우고 온 내가, 눈물이 다 나더라.
선경 웃는 것보담 낫지, 안 그래요?
경문 사진 속 선배는 웃고 있는데?

 경문의 웃는 듯 울먹이는 듯, 울먹이는 듯 웃음소리 들리면서

암전


 트럭에 경문이 타고 있다.
 경문, 길 위에 선 선경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첫 장면과 흡사한 모습이다.

경문 타, 더운데.
선경 트럭 같은 거 안 타요, 나.
경문 트럭 같은 거?
선경 그래요. 트럭 같은 거.
경문 덥잖아, 에어컨 틀어줄게.
선경 에어컨 소리는 안 시원한데.
경문 소리?
선경 더운 바람 나와도 절대 선풍기 안 꺼요, 난.
경문 미련해, 너.
선경 선풍기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시원하거든요. 몰랐죠?
경문 안 올라갈 거야?
선경 갈 거예요.
경문 그럼 타.
선경  트럭이 서울 가는 통행증이야, 뭐야?
경문 내가 내리지, 그럼. (내린다.)
선경 아저씨. 휘파람 불 줄 알아요?

 경문, 휘파람 분다. 몇 번 애써보지만 잘 안 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선경 것도 못해요?
경문 미안해. 그런 것도 못하고.
선경 한숨 쉴 일 없어요, 잘?
경문 축농증이야, 나. 입으로만 숨셔.
선경 한숨 쉬면 팔자가 사나워진다는데…….
경문 한숨 쉬지 마, 너는.
선경 한숨을 좀 적극적으로 쉬어봐요.
경문 (웃는다.) 적극적으로?

 경문, 휘파람을 분다. 몇 번 쇳소리를 내다가 제법 흥얼거린다.

경문 들었어?
선경 인정!
경문 너도 해봐.
선경 못해요, 난.
경문 것도 못해?
선경 난 풀룻.
경문 풀룻? 하이샤파도 못 샀대며?

 선경, 배낭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낡아 보이는 리코더다.

경문 리코더잖아?
선경 아저씨 공부할 때 영어사전 안 먹었어?
경문 콘사이스?
선경 사전이라고 하면 될 걸.
경문 (리코더를 뺏으며) 플룻 대타야? 이거?
선경 (리코더를 뺏는다.) 사전 보면 이렇게 나와요. (책 읽는 것처럼) ‘여덟 개의 구멍이 있는  구식 플루트의 일종.’
경문 오래 붙잡고 있었어, 나. 도무지 읽히지가 않아서.
선경 어떤 책이?
경문 이선경.
선경 나?
경문 즐거웠어.
선경 가?
경문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나?
선경 다?
경문 …….
선경 웃어요, 좀.
경문 리코더나 불어봐.
선경 플롯이라니까요.
경문 뭘 봐서?
선경 사전에 나와 있잖아요. (사이) 학교, 참 웃겨요? 가르쳐주지도 않을 걸 하라고 하면 어떡 해, 나는. 멜로디언을 가르쳐주고 피아노를 치래요. 배운 건 리코던데 무슨 수로 플롯을  해요?
경문  어디 학교야, 거기?
선경 단소, 리코더 이런 거 가르쳐주고 기악 시험은 자유 악기로 한다는 거예요. 자존심 상해 서 몰래 울었지, 막. 음악시간마다 애들은 지보다 큰 첼로를 짊어지고 오고, 플루트를 조 립해대는데 나는 삼천 원짜리 리코더야.
경문 얼마짜리인 게 무슨 상관이야?
선경 없는 사람한테는 중요해요, 그게.
경문 미안해.
선경 대체 뭐가? 아저씨 별로 있어보이진 않아요.
경문 (웃는다.) 나 의사야.
선경 그만둔다며?
경문 그러게.
선경 보고 싶다.
경문 누구?
선경 아빠.
경문 올라가쟤도.
선경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저어기에?
경문 (사이) 이 다음에…….
선경 아빠가 그랬어요. 기능평가 때문에 끙끙대니까 사전을 가져다 보여줬어요. (앞에서의 대 사보다 더 딱딱하게) ‘리코더. 여덟 개의 구멍이 있는 구식 플루트의 일종.’
경문 선경아…….
선경 왜요? 떡 줄려구? (웃는다.)
경문 먹고 싶어? (웃는다.)
선경 일없네요.
경문 불어봐.
선경 풀룻?
경문 그래, 풀룻.

 선경, 리코더를 분다. Tony Dallara의 ‘La Novia’ 다.

경문 (따라 흥얼거린다.) Bian che splen dente va la Novia…….
선경 (리코더를 불던 것을 멈춘다.) 아저씨.
경문 틀렸니? 
선경 아니.
경문 그럼?
선경 (노래 부른다.) 행복에 찬 그대의 모습. 모두들 축복해주네. 그대여 행복하여주오. 아베마 리아. (사이) 우리 아빠는 이렇게 불렀는데…….
경문 행복에 찬 그대의 모습…….

 선경, 리코더 불고
 경문, 노래 부른다.

 Tony Dallara의 ‘La Novia’ 원곡 들려오면서

암전

 그 전 상황과 동일한 설정이다.

경문 며칠 째야, 대체?
선경 가요, 먼저. 난 걸어갈게.
경문 걷자, 그럼. (내린다.)
선경 왜 하필 트럭이에요?
경문 덜 외롭잖아.
선경 뭐가?
경문 뒷자석이 없잖아. 차몰 때 거울에 빈 자리가 안 보이는 게 좋아.
선경 치이.

 빠르게 차 지나가는 소리.

경문 차 빨리 나간다고 어디 사람 잘 나가나? 왜 저럴까, 다들.
선경 먹고 살아야죠.
경문 먹고 살려고 다른 사람 치고?
선경 그럼?
경문 천천히 좀 가자는 거지.
선경 그럼 죽어요, 저 아저씨.
경문 죽긴?
선경 굶어 죽는다구요.
경문 다른 사람은 차에 치여 죽고?
선경 아빠가 트럭 기사였어요. (옆에 트럭을 가리키며) 저런 거 말고 11톤짜리.
경문 그래서 버틴 거야? 트럭이 조막만 해서?
선경 아저씨.
경문 말해.
선경 아저씨가 차를 몰고 가는데 애가 도로를 건너요. 어쩔래요, 아저씬?
경문 밟지.
선경 애를?
경문 브레이크.
선경 브레이크 밟아서 죽었어요, 우리 아빠. (사이) 그깟 사람 좀 치면 뭐 어때?
경문 선경아.
선경 그렇잖아요. 누가 횡단보도도 없는 데서 건너래?
경문 그럼 죽이니, 사람을?
선경 그럼 죽어요, 나는?
경문 죽긴?
선경 브레이크 밟으면 죽어요. 급정차하면 짐이 덮치니까……. 11톤이, 11톤이 아빨 덮쳤다구 요. 바보야, 진짜.
경문 보고 싶니, 많이?
선경 죽겠어요, 아주 그냥.
경문 나도 보고 싶어 죽겠어, 아주 그냥.
선경 미워 죽겠는데, 얼굴이 생각이 나야지, 도통.
경문 선배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나? 왜 먼저 죽고
선경 (말을 끊으며) 지랄이야.
경문 왜 먼저 죽고……. 지랄이야, 선배.
선경 아빠, 미워죽겠어. 먼저 죽어서 왜 나 알바시켜?
경문 선경이 아버님.
선경 아버님? 형 아니구?
경문 아버님, 보험이라도 들어놓지 그랬어요.
선경 그래, 보험이라도 좀 들어놓지 그랬어.

 경문, 선경 웃는다. 아주, 즐겁게.

경문 죽고 지랄이야.
선경 죽고 지랄이야.

 경문, 선경 두 사람 모두 손을 입에 가져다 모은다. 마치 메아리라도 치려는 듯한 자세 다.

경문 어때, 거긴?
선경 거긴 어때?
경문 선배, 들려? 내 목소리 들리냐구!
선경 아빠, 보여? 나 보이냐구!
경문 선배. 나 선배 영정 앞에서 육개장에 밥 말아서 두 그릇 먹었다. 괜찮아? 나 개자식이야.  알지?
선경 부조금 들어온 걸로 나 여행갈 거야, 유럽에. 화나지?
경문 왜 대답이 없어?
선경 뭐라고 해봐, 좀!
경문 나 인혜랑 갈라설 거야. 억울하지? 오래 살았음 싶지?
선경 트럭 팔 거야, 나. 그걸로 타조백 살 거야. 에르메스 버킨. 아빠, 들어는 봤어?
경문 아버님, 1300 정도 한대요.
선경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1300원 아냐, 아빠.

 선경, 경문 한바탕 웃어제낀다.
 경문, 선경 앞에 앉는다. 
 목에 올라타라는 시늉이다.

경문 타.
선경 안 탈래요, 나.
경문 트럭 아냐.
선경 짐 같잖아, 내가. 우리 아빠 덮친 짐…….
경문 브레이크 안 밟을게.

 선경, 경문 목에 올라탄다.

선경 아빠, 잘 들려요?
경문 선배는 얘처럼 이런 거 못 타봤지?
선경 뭐라고 해봐요, 좀.
경문  말 좀 해봐, 응?

암전


 침대에 앉아 있는 경문과 선경, 두 사람.
 손에는 칫솔이 들려 있다.

경문 방에서 닦으니까 좋아?
선경 좋아.
경문 (치약을 짜주며) 됐어?
선경 아저씨.
경문 어디 안 갔어.
선경 신기하지 않아?
경문 뭐가?
선경 치약.
경문 어떤 게?선경    (칫솔 위에 짜인 치약 가리킨다.) 봐봐. 이 흰 거하고 파란 거. 가지런하잖아.
경문 그래서?
선경 튜브 안에다 어떻게 넣길래 섞이지가 않을까? 안 신기해? 튜브는 넓고 주둥이는 좁잖아.  (치약을 뺏아 경문 칫솔에 짜준다.) 근데 이렇게 잘 짜지잖아.
경문 닦아줄까?
선경 입냄새 났어?
경문 (웃는다.) 혀 좀 닦아.
선경 자기는, 뭐……. 안 났어. (웃는다.)
경문 견인차 불렀어. 그거 타고 가.
선경 아저씬?
경문 캠핑카.
선경 내가 아저씨 끌고 가는 거야?
경문 좋아?
선경 아저씨.
경문 어디 안 갔대도.
선경 자동차 파는 매장 말야.
경문 계속 해.
선경 자동차 들어갈 문구멍이라곤 통 안 보이는데, 어떻게 들어갔을까, 자동차.
경문 글쎄.
선경 통유리 만들기 전에 넣었을까 생각해봤거든.
경문 근데?
선경 그럼 전시 모델 바뀔 때마다 유리창 깼단 거잖아. 이상하죠?
경문 그러게.
선경 아저씨.
경문 그래.
선경 어떻게 들어왔어요?
경문 어딜?
선경 마음속에, 내 맘에, 어떻게…….
경문 그런 적 없어, 인마.
선경 올라가면 못 만나요, 우리?
경문 미안해. 내가 의사라서.
선경 뭐가?
경문 다시 보자고 못해서…….
선경 …….
경문 다음에 만나자는 말 못해서, 미안해. 산부인과 전문의였음 웃으면서 또 보자고 했을 텐 데, 미안해, 내가.
선경 다행이네, 뭐. 외과의사라 다행이에요, 아저씨. (사이) 결국 나, 환자였단 거죠?
경문 저번에 보니까 너 단무지 너무 먹더라. 줄여, 좀.
선경 김치 없인 살아도 단무지 없이 안 돼요, 난.
경문 씻어서 먹어, 응?
선경 씻어 먹으면……. 만나줄래요?
경문 안 좋아, 소르빈산 칼륨이. 간하고 중추신경에…….
선경 정말 나 안 만나줄 거예요?
경문 수영 잘 하니?
선경 같이 다닐까, 아저씨?
경문 수영장 다닐 거야?
선경 같이 가자.
경문 풀에 들어가기 전에 우유 꼭 마셔. 알았니?
선경 만나주면 마실게.
경문 우유 마시면 수영장 물 많이 먹어도 위장병 안 걸려. 알겠어?
선경 아저씨.
경문 …….
선경 마지막이야, 진짜?
경문 너는 반창회나 다닐 나이고, 나는 말야……. 반상회 다닐 나이야. 그치?
선경 오래 살아요, 아저씨. 택시 타면 꼭 기사 뒷자리에 앉고, 응? 거제도 가서 뭐 십자동굴?  거기서 물도 더 받아 마시고 그래요. 듣고 있어요? (울먹인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열일곱 스물넷’ 나오면서

 우리 처음 사랑을 느낄때 둘 중 하난 열일곱 또 하난 스물넷
 우릴 보고 사람들 모두 다 둘 중 하난 바보라고 말했죠
 정말 순수하게 무엇인가 고민하고 마음 상해 방황도 했었지만
 사람들의 손가락질 낯 뜨겁고 소외당해 눈물도 흘렸지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하면 아름다운 추억이 야
 열일곱 스물넷 이제는 기쁨만이 열일곱 스물넷 이제는 행복만이
 깊은 어둠도 쏟아지는 햇볕도 그리워만 가는 아름다운 추억이야

구성미  webmaster@d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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