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019.11.1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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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무도 거기에 앉지 않는다

김동화


지하실

첫날, 미의 아버지는 나를 대문 앞에 내려놓고서,
“너도 이제 우리와 한 가족이다. 식구는 둘뿐인데 방은 다섯 개나 되니 늘 적적하더구나. 한번 둘러보면서 네가 원하는 방을 골라보렴.”
하고 말했다.
“하지만 지하실에는 내려가지 마라.”
“왜요?”
“쥐가 있어.”
미의 집은 이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아담하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조금 넘치는 감이 있었다. 널찍한 마당엔 아주 오래전에는 떼를 심고 물을 주고 갈퀴로 죽은 잔잎을 긁어주었을 잔디의 일부가 힘겹게 흙을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 잡초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층에는 미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큰방과 욕실 부엌 계단 작은 방이 거실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실의 한가운데에는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미의 아버지는 어슴새벽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는다. 새파란 어둠 속에서 피아노의 구석구석 레몬향 광택제를 뿌리고 결이 부드러운 헝겊으로 문지른 후,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건반뚜껑을 들어올린다. 그러고는 맨 왼쪽부터 오른쪽 끝까지 숨을 내쉬는 속도에 맞추어 하나씩 건반을 누른다. 대개 내가 잠에서 깨는 시간은 미의 아버지가 네 번째 라를 눌렀을 때쯤이다. 미는 점심을 먹을 때까지는 절대로 깨지 않았다.
한번은 새벽녘까지 깨어 있다가 미의 아버지가 건반을 누르는 소리를 온전히 들었다. 음이 서서히 높아지며 침묵에 싸여 괴괴했던 방 안의 먼지들이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옥타브가 올라갈 때마다 한겹 한겹 푸른 비닐을 벗겨내듯 날이 밝아왔다.

미가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버린 것을 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미의 머리카락은 완구용 가위로 썩뚝썩뚝 잘려나간 것 같았다. 마치 침대의 유령이 나타나 미가 잠자는 동안 머리카락을 뜯어먹은 것처럼 말이다. 미와 내가 어릴 적, 그토록 두려워했던 바로 그 침대의 유령 말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길게 머리를 기르고, 잠을 잘 때에도 머리칼을 둘둘 말아 묶고 잠을 잤다.
미가 마음껏 머리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당시 아가씨들이었던 미의 두 언니는 얼굴이 너무나 똑같이 생겨서 미의 아버지는 그녀들을 편리하게 구분하기 위해 머리칼을 사용했다. 그래서 미의 집안에서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미의 큰언니와 막내 미뿐이었다. 그래서 작은언니는 종종 낮잠을 자는 미와 나의 머리칼을 묶어두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종종 머리칼이 당기는 아픔에 잠에서 깨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침대의 유령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고.
그렇게 실컷 낮잠을 자둔 뒤에, 밤이 되면 미와 나는 아무도 모르게 뒷마당으로 갔다. 뒤꼍의 후미진 구석에서 남몰래 돋아난 잡초를 뽑아내고 모종삽으로 흙을 파헤쳤다. 파낸 흙이 한 양동이 가득 차면 대문을 빠져나와 뒷산에 갔다 버렸다. 우리는 새카매진 손과 발을 어둠 속에 숨기고 짤랑짤랑 빈 양동이를 흔들며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엔 우리 둘이 들어가 웅크리고 누울 수도 있을 만큼의 구덩이가 생겼다. 그러나 미의 아버지도 언니들도 우리가 왜 밤마다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틈에, 새끼를 물어 나르는 도둑고양이처럼 우리는 흙을 날랐다.

“그 사람이 뭐라던?”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계단 위에서 미가 얼굴을 내밀었다. 미는 조금도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쓸 방을 골라보라고. 지하실엔 내려가지 말고.”
미는 마치 어젯밤까지도 나와 함께 있었다는 듯이 대했다.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미의 방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어색해서 어떻게 발이 움직이고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왜 내려가지 말래?”
“쥐가 있다고.”
“흐응, 쥐가 있지.”
미가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는 허공으로 잠시 솟았다가 다시 왼발을 내딛으면 아래로 푹 꺼지고는 했다. 곧 왼쪽으로 기울어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울 만큼 미는 위태롭게 걸어갔다.
나는 미의 옆방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거실

거실의 창으로는 오래전 내가 살았던 집의 뒤편이 보인다. 피아노를 등지고 서면, 미의 집과 마찬가지로 그 집 역시 불쌍하게 늙어버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집의 기둥은 모든 것을 힘겨워하고 있는 듯했다. 벽돌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듯이 파고드는 여름 한낮의 햇볕이나, 금이 간 상처 속으로 스며드는 빗물, 야금야금 발밑을 갉아대는 개미떼라든지.
얼마 전까지는 다른 도시에 있었다. 지도상으로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 떨어진 곳이지만 미의 아버지와 이곳에 오는 데 버스로 두 시간이 걸렸다.
그 도시로 떠나던 날, 울며불며 미의 팔에 매달리는 나에게 아버지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이것 좀 봐. 우리가 가는 곳은 여기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아직은 네가 어려서 어렵겠지만, 네가 이 아빠만큼 크면 넌 정말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쉽게 다시 여기로 올 수 있을 거야. 울지 말아. 넌 언제든지 이곳에 올 수 있어.

서울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내려와 보니 대문턱에 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정말 몰라보게 자랐구나.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스레한 골목길 안에서 짙은 남색 양복을 입은 미의 아버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커다란 땅그림자에 흡수되어 버린 듯했다.
너의 아버지께서 너를 부탁하셨단다. 잠시 동안만 우리 집에 가 있자.
저, 집에서 뭘 좀 챙겨 와야 하는데요.
주섬주섬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들자 미의 아버지가 손을 내저었다.
집 안이 엉망일 거야. 필요한 건 오늘내일 새로 사든지 하자.
미의 아버지는 바싹 마른 두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아저씨.
팔랑팔랑 미의 아버지의 바짓단이 흔들렸다.
아저씨, 우리 아버지는 죽었나요?
그런 건 아니야.
터미널에서 미의 아버지는 미리 끊어두었던 버스표를 건네주었다.
넌 재능이 많은 아이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지. 지금은 꼭 연주회를 앞둔 피아니스트 같은 표정이구나. 걱정할 것 없어. 정말로, 정말로, 앞으로는 다 잘 될 거다.

미의 아버지가 대문간에서 조간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서 있지만 말고 거기 앉아. 지금은 아무도 거기에 앉지를 않는다. 옛날엔 서로들 다퉈가며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었는데. 너도 기억나지 않니?”
“글쎄요. 너무 오래전이라.”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는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아요.)
“앉아봐. 의자를 빼고 앉아서 건반뚜껑을 열어봐라.”
미의 아버지는 신문을 창가에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나를 의자에 앉혔다. 건반뚜껑에 손을 대보니, 그것은 생각 외로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매일 새벽 윤을 내고 닦아낸 덕분에 손바닥이 철썩 달라붙어 버릴 만큼 매끈하고 반들거렸다.
“의자를 좀 더 뒤로 밀고 엉덩이를 조금 당겨 앉아라. 그렇지, 그렇지, 엉덩이의 절반만 살짝 걸치는 느낌으로 말야.”
미의 아버지는 익숙하면서도 서투른 손놀림으로 건반뚜껑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 내 손목을 건반 위로 잡아끌었다. 건반은 공장에서 갓 나온 유리처럼 미끈했다. 나는 하늘에 떠 있는 악몽을 꾼 다음날 아침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날아오르기만 할 뿐, 착지할 방법은 전혀 모르는 채 멍하니 허공을 부유하는 악몽이다. 나는 그 꿈속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는 꿈이 없는 인간이며, 아주 사소한 고민거리조차 없는 인간이며, 사랑도 기쁨도 심지어 땅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 꿈속에서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손톱보다도 작은 건물들만 저 아래 펼쳐져 있다. 구름보다도 높은 하늘에서 본 땅 위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난 그 속에서 아름답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런 날 아침이면 나는 목이 말라 못 견딜 때까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 못 견딜 때까지, 다리가 아파 못 견딜 때까지, 거리 위에서 걷는 연습을 한다.
“손가락을 좀 더 세워. 발레를 본 적 없니? 손가락 끝에 발레슈즈를 신기는 거야. 발레리나의 발처럼 꼿꼿하게 건반을 밟아라. 손가락 끝으로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는지 시험해봐.”
나는 삽을 땅 속으로 밀어 넣는 느낌으로 오른손 검지를 내리눌렀다. 푹. 부드럽게 지면을 파고들어 힘주어 손잡이를 누르면 삽의 너비보다 조금 넓게 파낼 흙의 틈새가 벌어진다.
“라를 눌렸구나. 손가락 힘이 꽤 좋아. 네가 만약 내 딸이었다면 나는 너를 ‘라’라고 불렀을 거다.”
내가 불러낸 소리의 여음이 새하얀 피아노의 주위로 퍼지고 있었다. 또다시 하늘에 떠 있는 꿈을 꾸게 되면, 이 소리를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착륙할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을 때, 피아노의 라 음을 기억하는 거다. 고막이 터질 듯 먹먹한 허공에서, 기다리는 거다. 그러면 오래전 내가 누른 라 음이 물이 번지듯 그곳까지 스며 올라와 마침내 내 귀에 도달하겠지. 그러면 나는 나를 허공으로 밀어올리는 그 힘을 역행하여, 피아노 소리를 따라 이곳 미의 집으로 내려오는 거다. 그러면 나는 다시 미의 집에 머물거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이것저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꿈에서 깨어 어젯밤의 나로 돌아가 거리를 싸돌아다닐 수도 있겠지.


계단

오직 달라진 것은 마당 귀퉁이에 가로등처럼 생긴 등이 설치된 점이다. 그것은 밤의 한가운데 괴이하게 우뚝 서서 흰 빛을 방사형으로 내뿜고 있었다. 음기를 빨아먹고 사는 식물처럼 마당 곳곳의 이름도 모를 풀들이 교교한 빛으로 어둠 속에서 몸을 반짝였다.
미와 나는 축축한 흙구덩이 속에 몸을 누이고 자주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미는 늘 무섭다고 말했다.
저기 좀 봐. 넌 무섭지 않아?
나는 몸을 일으키고 벗어두었던 팬티와 티셔츠와 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미는 내가 옷을 다 입은 뒤에도 여전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미는 발가벗은 채 태아처럼 온몸을 감싸고 누워 입술만 달싹였다.
봐. 우리가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지 않니?
조붓한 담벽 틈에서 고개를 뒤로 꺾어드니 그곳엔 밤바다처럼 시퍼런 하늘이 도사리고 있었다. 파도에 실려 어디론가 한없이 떠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일렁이는 여름밤의 열기 속에서 비틀비틀 몸이 흔들렸다.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문득 거실 창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거실의 유리창에 마당과 마당에 서 있는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너머로 거실의 피아노가 보였다. 마당과 나와 거실과 피아노는 미세하게 흔들리며 겹쳐 있었다.

나는 두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우두커니 마당에 서 있다.

그 모습은 흐릿하고, 탁하고, 흐늘대고, 흐트러지고, 원형이란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불확실해서, 어느 순간 나는 공포를 느꼈다. 혹시. 지금 나는 이층 미의 옆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게 몸을 벗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닐까.
나는 애써 발뒤꿈치에 힘을 주어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꾸만 몸이 악몽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계단을 오르다 멈칫 뒤를 돌아보니 피아노는 어두운 속에서도 흰 빛이 선명했다.
먼저 오른발을 들고, 오른발이 땅에 닿기 전에 왼발을 그 위로 들어올려. 계단을 올라갈 때처럼. 그리고 왼발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다시 오른발을 올려. 아주 빠르게. 아주아주아주 빠르게. 그러면 하늘을 날 수 있어.
나는 두 발을 번갈아 쿵쿵 내딛으며 계단을 올랐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과장되게 보폭을 벌리며 이층 거실을 가로질렀다. 내 방의 문은 반 뼘쯤 열려 있었다. 문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활짝 열어젖히니, 그곳엔 내가 잠자고 있었다.




미는 아직도 어린이용 이층 침대를 쓰고 있었다. 미의 언니들이 어릴 적에 쓰던 것이었는데, 언니들은 서로 이층을 쓰려고 다투었다고 한다. 미의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언니들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얘들아, 제발 그것 가지고 그만 좀 싸워라. 너희는 서로 꼭 닮았잖니. 누가 이층을 쓰든, 내가 보기엔 똑같아.
나는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미를 보았다. 미는 아래쪽 침대 위에서 허리를 구부정히 구부린 채 내 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숲속에 왔다가 곰 가족의 집을 발견하곤 함부로 들어와 더러운 발자국을 마구 내며 아기곰의 간식을 훔쳐 먹고, 엄마곰의 침대를 부수뜨리고, 아빠곰의 침대에서 곯아떨어진 버릇없는 여자애 같았다.
바깥에서 쇠를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쥐를 묻는 거야.”
“쥐?”
“따라와 봐. 보여줄 게 있어.”
미의 아버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리자마자, 우리는 살며시 현관을 빠져나가 뒤꼍으로 향했다. 미의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삽으로 땅을 헤치고 다졌던 듯했다. 마당엔 아무렇게나 던져둔 삽의 날이 흙먼지를 묻힌 채 햇볕 아래에서 달궈져 있고, 전장의 쓰러진 병사들처럼 키가 큰 잡초들이 뿌리가 뽑힌 채 뉘어 있었다.
리듬을 타듯 절뚝거리며 미가 앞장서 뒤꼍으로 들어가자, 순간 어딘가 깊은 곳에서부터 쥐들이 내는 소리가 은밀하게 들려왔다. 혁명의 날, 긴급속보를 보도하는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줄여놓은 것 같은 소리다. 매우 급박한 발자국 소리 같으면서도, 마루에 나와 낮잠을 자는 중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요하게 들리는 소리다.
갑자기 발밑으로 흙이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미는 그 자리에 멈춰서 좀 더 긴 오른쪽 다리로 바닥을 헤치기 시작했다. 흙빛과 비슷한 거무스름한 적톳빛 목판이 드러났다. 목판을 옆으로 밀어붙이자 한 아름쯤 되는 구덩이가 땅 밑으로 비스듬히 뚫려 있었다. 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굽히고 기어 들어갔다. 미의 길고 가는 팔과 자라지 않는 다리는 어쩌면 진화된 한 가지 형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반짝 불이 켜졌다. 미는 휴대 조명을 들고 다시 입구로 나와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
굴 속으로 들어갈수록 축축한 흙비린내가 끼쳐왔다. 흙벽은 본드를 발라놓은 것처럼 단단해서 내가 몸을 부딪쳐대도 흙알갱이가 부서져 내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정도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야.”
미는 바닥에 깔아놓은 붉은 카펫 위에 앉으며 나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지금은 좀 쉬고 있어. 그동안 쥐를 키웠어.”
내가 앉아 있는 바로 밑으로 쥐가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땅 밑에 묻어놓은 수도관이며 가스배관이며 쥐 굴이며 온 세계의 깊고 습한 곳에서, 이리저리 얽혀 있는 구멍들 사이로 쥐들이 빠르게 달음질친다.
아빠가 나를 쥐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 어젯밤에는 나처럼 아빠 말을 안 듣고 놀기만 좋아하는 인간은 쥐나 되면 딱 어울리겠다고 말했어. 난 차라리 쥐가 되고 싶어.
“몇 년 전에 그 사람이 언니들을 쫓아냈어. 언니들 중에 누군가가 연습을 하다 악보책을 그 사람의 면상에 집어던졌거든. 언니들이 서로의 머리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나서였어. 언니들은 날이 갈수록 얼굴이 똑같아져서 악보책을 던진 사람이 큰언닌지 작은언닌지 나도 구별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사람은 둘 다 쫓아낸 거야. 언니들이 나가면서 번갈아 나를 한 번씩 꼭 안아줬는데, 그 중에 누군가가 귓속말로 쥐를 키워보라고 했어. 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쥐였으니까. 언니들이 나가자마자 그 사람은 나를 붙들고 모차르트를 연습시켰어. 1악장을 다 쳤을 때쯤 그 사람 몸에서 살이 썩는 것 같은 이상한 냄새가 올라왔는데 구역질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어.”
미는 어디선가 들어와 있는 새끼 쥐를 안고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가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하자 그 작은 회색 쥐는 혀를 내밀고 미의 입술을 핥았다.


난간

저녁을 먹고 나서 미의 아버지는 내게 하농 책을 건네주었다. 지금처럼 마음이 불안할 때는 하농을 연습하라고 말했다.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역동적인 피아노의 음파를 느낄 수 있는 하농 연습곡을 치다 보면, 내 마음속의 온갖 고민과 잡생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슬픔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나요?”
“물론이지.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야.”
“무서움도 사라지나요?”
“슬픔과 무서움은 같은 거란다.”
“분노도 사라지나요?”
“분노 역시 마찬가지야. 분노란 하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지. 넌 내 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튼튼한 손가락을 가졌어. 꾸준히 연습하다보면 슬퍼하고 무서워하고 분노하는 너는 사라지고, 어느 순간 피아노를 치고 있는 너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거다.”
정말 내가 사라지나요?
나는 책을 펼쳐보았다. 음표는 오선 위에서 마디마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저음부에서 고음부까지 꺾은선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집 안이 엉망이었다니 급하게 도망을 친 모양이었다.
더 빨리 뛰어요, 아버지.
어쩌면 막다른 골목에서 잡혔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눈을 시푸르게 뜨고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느새 미의 아버지가 등 뒤로 와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떠듬떠듬 악보에 그려진 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계속되는 음표의 반복 운동에 손가락은 어느덧 익숙해졌다. 거실 밖으로 어둠발이 내리고 있었다. 건반을 누르는 나와 뒤편에 서 있는 미의 아버지의 모습이 새하얀 피아노의 몸체에 투명한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 속에서 미의 아버지의 눈동자는 불을 켠 것처럼 번쩍였다.
“손가락에 힘을 실어라. 힘차게 눌렀다 재빨리 떼야 해. 소리가 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해라.”
손가락만으로도 거대한 세계를 만들 수 있지. 소리의 진동이 퍼져나가는 공간만큼 지배하는 거다. 건반 사이의 거리를 벌린 손가락으로 재조합하는 거야. 네가 펼쳐놓은 거리 위에서 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어디든 갈 수 있어. 아무도 네 뒤를 쫓지 않아. 넌 무서움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볼지도 모르지.

그날 새벽 일층에서는 들릴 듯 말 듯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가 방문을 열고 나를 불러냈다. 이층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온 불빛이 층층이 옅어지며 계단에 드리워 있었다. 미가 걸음을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몸은 위아래로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잔잔한 수면 위에서 움찔대며 흔들리는 낚시찌 같았다.
미와 나는 이층 난간 뒤에 숨어 한밤의 거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했다. 미의 아버지는 두툼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서 바닥을 내리쳤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그는 조금도 헛질을 하지 않고 꿈틀대는 쥐의 몸뚱이 한가운데를 정확히 내리쳤다. 주먹만한 쥐는 미의 아버지 방 문 앞에서 피를 터뜨리고 늘어져 있었다.
“저 사람, 우리가 보는 걸 알고 있어.”
미가 쉬쉬 입바람 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난 미에게 아직도 침대의 유령에 대하여 믿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침대의 유령에 대한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도망을 가던 밤, 홀로 남겨진 내게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가 잠을 잘 때 나타나는 것은 유령 따위가 아니라, 아주 잠깐의 빛과 바람이라고. 그것들은 문틈으로 살며시 들어와 우리를 비추고 훑으며 사라진다고. 세상의 빛과 바람은, (밤이 되면) 세상의 아이들의 수만큼 쪼개져서 아이들을 감싸고 사라진다고.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이다. 난 내가 어릴 적 종종 빛과 바람의 소리에 잠을 깨었던 것처럼, 미 역시 잠든 아이들을 보살피는 빛과 바람에 대하여 믿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다시 속삭였다.
“너 괜찮니? 응?”
미의 목소리는 사라진 사람들의 그것처럼 희미하고 아득했다. 미는 내 등 뒤의 벽을 바라보는 듯, 벽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는 듯,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어떤 다른 공간을 바라보는 듯했다. 미의 눈동자 속에는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어두운 허공만이 있었다.

김동화  webmaster@d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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