狀況(상황)극복 못하면 영구히 外勢(외세) 아래 事大(사대)의 탈을 벗지 못할 것
新羅(신라)삼국統一(통일)은 외세에 의한 植民地(식민지) 첫걸음
신도비 가첨석의 龍(용), 당의 지방군수에 불과
과거가 現在(현재)를 위한 手段(수단)이 될 수는 없어

  한국민족의 전통과 전망을 쉬지 않고 다루어야 할 긴요한 과제이다. 민족의 전통과 전망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다면 한국 민족에 관한 모든 외문이 한꺼번에 풀릴 것 같다. 그러나 많은 의문을 동시에 풀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뿐이다. 산이 있으므로 오르듯이 의문이 있으므로 의문에 접근하고, 의문을 존중하며, 지속화시키고 심화시키며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찾아내고 깨닫는 것이 학문의 기본이 될 것이다.
  한국 민족의 전통과 전망을 누구나 지적하고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하여 다른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글을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지만, 전통론에 관해서는 학문 이전의 논의는 계속되었으나 확실한 논의는 아직 못 읽었기 때문에 문제에 관한 태도는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민족의 양식이나 인습의 핵심이 되는 정신의 특징으로 비관적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열등의식과 병적인 사고방식을 일컫는다. 또한 좀 더 추상적인 단로 한이라던가 은근과 끈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열등의식과 병적인 사고방식이란 표현은 뒤의 한, 은근과 끈기보다는 지식적이고 실증적인 의미를 지닌다. 필자는 여기에서 열등의식과 병적인 사고방식과 한을 보전하기보다는 개전시켜야 할 단면으로 파악하여 고루 맞아드는 사대주의를 예로 들어 전통 가운데 고쳐야 할 양상으로 생각한다. 제한된 지면에 유도해야 하는 것은 전망이 되는데, 사대주의에서 어떤 국면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연역적이고 일반적인 통념보다는 제기된 의문의 해결점이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서, 한계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완성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사관의 입장으로 논한다. ‘진과 한의 난리에 중국사람이 많이 해동으로 도망했다 하였으니 삼국의 조상이 참으로 옛 성인의 자손이었던가. 어찌 그리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하였던고. 백제의 말엽에 이르러 행하는 짓이 거의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이로움을 따르고… 이에 당의 천자는 두 번째 조서를 내려 그 원험을 풀라고 하였는데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안으로 어기고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망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민족, 우리 겨레의 부정이다. 역사적, 전통적 기록으로서는 가장 오랜 귀중한 책의 저자이지만, 자의로 편찬한 것도 아니고 왕명에 의해 지은 사서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한문학의 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자리를 내 줄 수 없는 대가이다. 우리나라의 문화가 발전됨을 보고 상소를 울려 서적 따위의 문물을 고려에 수출금지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 동파 소식을 흠모타 못해 원이름의 끝자를 바꿔 식으로 하고, 그의 아우에게도 소식의 아우 소철의 끝자를 옮겨 개명시켜 부철로 만든 우리나라 최고 지식인의 한사람이다.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망함이 마땅하다’는 당나라에 항쟁한 백제의 광복운동을 평가한 말이다.
  역사가들은 그의 유교적 도덕관념 내지 윤리의식에 의한 담담한 저술이 삼국사기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왜인들의 교육효과에서 저질러진 어리석은 평설이라 생각한다.
  성인 공자는 춘추를 엮어 주나라의 왕롱을 염려했다. 그러나 논어에 보이듯이 정작 사랑하는 고국은 노나라였다. 노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떠나가면서 제자들에게 ‘수레를 느리게 몰라’ 한 기록이 보인다. 유가의 교주라면 교주가 노나라를, 기울어 가는 고국을, 자기의 이념을 따라 떠나면서도 정작 못 견뎌했는데, 그의 철학에 영향을 입고 감화했다고 해서 자기나라 조상이 남의 나라 유민이기를 바라고, 역사가 장구했음을 한마디로 의문만을 나타냈음을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부식의 시대에 사대주의 사상이 만연했음을 알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한 시대의 관념이 오늘날처럼 여러 나라가 단일화해서 고유성을 상실하던 때가 아니었다. 특별한 사상이 일반화 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 수년에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까지 소요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려의 건국 백여 년 후에 이미 사대사상이 이렇게 골수에 맺히듯이 심한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존재했을 삼국의 역사가 전거로 등장하지 않고 중국의 책이 인용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해외문학파는 전통의 계승은 서양문화에서 볼 수 있는 바이며, 우리의 경우는 이제 해당하지 않는다는 설을 내세워 과거를 청산해버리려는 의도가 오늘날에까지 형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심각성을 띠며, 원인을 규명해야 만할 것이다. 역사란 현재의 입장에서 해석한 과거라고 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목적으로 위해, 현재의 당위성 때문에 과거가 현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당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인식하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묘청의 기운을 누른 김부식의 역사에 관한 관점은 고려라는 시대적 상황으로는 정의로 받아질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관점을 지니게 된 사상의 원류는 어쩔 수 없이 삼국통일기까지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일반적으로 고취되었던 ‘삼국통일의 정신’을 냉철히 분석한다면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이었던 지식인의 무책임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왕은 주국낙랑군공(柱國樂浪郡公)이었다. 진덕왕 때에 당에 갔던 김춘추는 복식의 중국화를 갈구하며 연호마저 당의 것을 쓴다. 외교적 수완이 아니겠느냐는 옹호론 내지 지지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지만, 삼국의 통일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인정하는 것처럼 외세에 의한 식민지의 첫걸음이었다. 당의 군사가 백제나 고구려를 칠 것을 신라에 통지하고 합류할 것을 명령하여 시작된 민족전쟁이었다. 이것이 시작된 민족전쟁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삼국통일의 과정이 아닌가 추측한다. 왜냐하면 외세를 개입시켜 지방의 이익을 얻으려던 의도가 오늘날의 사대주의의 모체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주라는 무열왕은 당의 변방 태수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고서도 그의 농에 가서 확인할 수 있다. 신도비의 가첨석에 훌륭한 여섯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발가락이 셋이다. 동양에서 용은 왕권을 상징하며 발가락 수로서의 신분을 나타낸다. 천자라는 저들은 왕은 다섯 발가락을 지니며, 그 다음 왕자라든지 제후가 네 발가락으로 상징되며, 그리고 지방의 군수‧태수가 셋을 지닐 수 있다.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세운 무열왕이 신도비에 표시된 왕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관점을 찾을 수 있다. 융성한 국권을 이룩한 당의 세력권을 부인할 수만은 없는 신라로서 자가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한 가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권을 연장시키며 권력을 차지하고 누리기 위한 굴욕스러운 자아의 상실이라는 견해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 이야기 한 사실은 이미 많은 전공자들에 의하여 타당성을 드러냈지만, 뒤에 이야기 한 사실은 허상만 떠돌아다닐 뿐 냉철한 분석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커다란 산은 바라보는 위치와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나타내듯이 유구한 역사적 사건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보여질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 이 글의 성격이기도 하다.
  기록의 부재로 마지못해 인용하는 삼국지.위서.동이전을 보면, 부여‧고구려‧예‧삼한‧옥저의 풍속이 거의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삼국이 교유하면서 통역관을 기용했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통일 이전에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풍속이 같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 사실은 이미 민족권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낙랑군수에서 계림도둑으로 이름이 바뀐 신라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을까? 진정 민족통일의식에서 비롯한 것일까를 회의할 수밖에 없다.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는 당의 식민지 관리가 상주했다. 신라의 땅마저 당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당에 신라의 처녀를 그만 보내도 된다는 기록이 문무왕조에 보인다. 왕소군을 보내는 중국인들은 민족의 무력함을 슬퍼하여 많은 시가 전해지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실을 괴로워한 흔적마저 없음은 가슴 아픈 일이다. 백성과 조국을 아껴서가 아니라 사사로운 원한과 권력의 연장을 위한 싸움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부른 것이다. 휴전선 북쪽의 땅을 중공이나 소련공산당 정부가 차지하는 대가로 북괴를 쳐부수겠다는 제의를 해온다면 그 제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인가는 우리의 손으로 가꾸어야 할 조국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활하고 기름진 만주벌판과 곡창의 백제를 버리고 대동강 이남이나 차지한 전쟁은 진정한 민족의식의 통일이 아니었으며, 이 땅에 외국의 힘을 빌려 국내의 문제를 유리하게 역이용하는 차원에서 다른 나라 것이라면 무조건 높이는 나쁜 습관까지가 자리 잡게 할 서러운 빌미였다고 생각한다. 이때로부터 저들은 우리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쉬지 않고 조공을 잘 받지는 동방예의지국민이라는 차원 높은 술수로 건강한 민족성을 최면사태에 놓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대륙문화권, 우리민족의 본바닥인 만주의 회복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고려가 뒤에 김부식같은 광적인 사대주의자와 무신난을 자초했던 원인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난 뒤에 왕건은 정책적인 차원의 인사관리에서부터 실패한 불쌍한 영웅이다. 신라의 관리, 부패시켜 나라를 멸망케 한 관리들을 그대로 요직에 앉히었으니 3백년 묵은 사대적인 인사들에게 다시 이 땅의 딸을 중국에 바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훈요십조라는 지침서를 만들면서 ‘차현이남 공주강 바깥사람은 등용하지 말라’는 민족이간의 술책을 삽입시켰으니 또 하나의 슬픔이다. 명분상의 정통성과 권력연장 때문에 가장 진취적이고 장엄해야 할 시기인 고려초기가 이렇게 왜소한 겨레로 살아야 할 안타까운 시기로 변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올바른 사고관념을 지닌 부류는 비록 정치일선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따로 성립되어 우리의 핏줄에 까지 그 맥박을 남겨 놓았다. 민족이 전통을 성립하게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양대 세력의 균형이 새로이 만들어내는 조화된 힘이라고 생각한다. 사대주의가 정권과 야합하여 통탄할 행위를 저질러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순교자의 태도로 지킬 것을 지킨 것이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적 전통이란 우리가 깨닫고 설명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한 가지 전형적인 윤리가 두드러질 때 드러나지 않고 얼음층 밑으로 물이 흐르듯이 잠재한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맥락과 전통이 민족정통성의 보이지 않는 주체세력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나서 계승된 것만이 진리이고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허상이란 생각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 말 몽고에 대한 항쟁, 임진왜란 때의 의병, 민족주체성을 드높인 동학혁명, 삼일운동, 광주학생운동을 포함한 항일독립운동, 4.19의거와 같은 연속적 민족의 단결은 사대주의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의 표현으로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밀한 분석은 하지 못했지만 보다 학문적이고 심층적인 것은 전공자에게 양보를 베풀고 사대주의의 현실과 전망을 전개하고자 한다. 존재하는 사실 이해의 폭을 확대하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의 개발이 우리의 과제라는 것도 전제하고 싶다. 유행가 가사같은 이야기이지만 청산의 자규는 울고 싶어 우느냐라는 말이 있다. 요즘 어쩔 수 없어서라는 좀스러운 표현도 떠들고 있다. 우리가 역사상에 찾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은 여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는 짓을 안 하고, 여느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다운 사람이 많이 있을 때 그 민족의 역사는 조화로운 발전의 길을 걷는다. 여인의 화장품에서부터 학자의 언어와 이론에 까지 파고든 사대의식을 하루아침에 종식시킬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역설적 사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상태로 도입하게 한다.
  올바른 민족전통은 우리가 이면적 의식으로 지니고 있는 전통을 겉으로 드러내서 정리하고 실행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면적 의식은 모르면서 지니고 있는 의식이라고 한다. 모르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에 끊임없는 반성이 필요하고 인식의 가설적인 그물을 마련해야 한다. 방법에 대한 반성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다음으로 미루고 가설적인 그물에 대해서의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지혜와 인내력이 결부된 응집력이 조화로울 때에야 비로소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실존체험에서 형성되는 여과된 응집력이란 유기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우리의 일에 외세가 개입하지 말라고 해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개입하라고 해서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 소련은 세력의 확장을 위해, 적화를 위해 북괴에 간섭하고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 태평양 제해권 따위를 목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때에 미국의 힘을 거부할 수만은 없다. 스스로를 존속시킬 수 있는 우리의 국력부재가 일련의 상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술적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런 상태가 연출되고 있다. 어쩔 수 없어서?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쩔 수 없어서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구히 외세의 영향력 아래 사대의 탈을 벗지 못하고 말 것이다. 단 하나 전망을 밝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공명정대하고 조화롭게 형성된 유기적 응집력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우리의 저변에 깔린 사대의 굴레를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개성이 존중되어 조화를 이룬 응집과 자발적 참여가 충만할 때에 민족의 힘은 발휘되어 사대라는 인습을 우리의 곁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 학자는 학자로서,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농부는 농토에서, 어부는 어장에서 소신껏 직분에 충실할 때에, 학생은 학생으로서 충실할 때에 진정한 민족의 힘이 총동원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관계는 유기적 관계를 지닌 가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한 미래는 오늘의 축적임을 깊이 통찰하는 것이 누구나가 자각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뼈를 묻고자 하는 사람의 전망을 각자의 노력에 비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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