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2019.6.3 19:23

동대신문

상단여백
HOME 사람 화제의 동국인
자랑스런 동국인 <40> 근로장학사 총동문회장 김삼철 동문“실력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겸비한 후배 양성에 힘쓸 것”
  • 배종성 객원기자
  • 승인 2013.03.18
  • 호수 1537
  • 댓글 0

   
 
3월의 캠퍼스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캠퍼스는 춘삼월 봄바람에 기지개를 켜고 기대로 가득 찬 새내기들의 재잘거림이 곳곳에 가득하다.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강의동마다 뜨겁고 새로이 맺게 된 선후배의 인연은 더 없이 소중하다. 하지만 앞으로 수 년, 수 십 년, 시간이 훌쩍 지나 50년이 지난 다음에도 우리는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 동대신문이 만난 김삼철 동문(농학67졸)은 여전히 모교에 대한 사랑과 후배들에 관한 관심으로 가득한 ‘현역’의 모습이었다.

김삼철 동문은 현재 우리대학의 근로장학사 총동문회장직을 맡고 있다. 근로장학사는 학업에 뜻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대학의 지방학생들을 위해 1957년 설립됐다. 지금까지 120여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고 각 분야의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한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 김희옥 총장 역시 근로장학사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전통에 빛나는 근로장학사도 자금난으로 학교 주변에 전세방을 전전하며 그 명맥이 끊어질 뻔한 위기가 몇 차례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打開)하기 위해 2011년, 김 동문은 근로장학사 동문회장을 맡았다. 그는 1억여 원의 운영기금을 조성하고 동문회를 다시 규합(糾合)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근로장학사는 학교 정식 기구로 인정받아 신축 기숙사에 자리 잡는 성과를 거뒀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근로장학사는 명실상부 동국인들을 위한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했다.

누구보다 치열했던 청춘을 보내다
김 동문의 학창시절은 치열했다. 그가 2학년이었던 1964년. 일본정부에 차관하기 위해 한일회담이 개최됐다. 산업화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사 문제가 의도적으로 도외시된 한일회담은 굴욕적인 회담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지탄의 대상이었다. 한일회담 반대에 앞장선 김 동문을 비롯한 우리대학 학생들은 적극 시위에 나섰으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 동문과 동기였던 김중배 열사가 이때 희생됐다. 그는 아직도 김중배 열사의 죽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난폭하게 시위대를 유린하는 과정에서 중배는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저는 중배를 업고 서울의 모든 병원을 전전했죠. 하지만 당시엔 시위 중에 다쳐도 병원에서 치료를 안해줬습니다. 제때 치료만 받았더라면……. 제 등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던 중배를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김 동문은 현재 김중배 흉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오는 4월에 만해광장 4.19기념탑 옆에 김중배 열사의 흉상이 세워진다. 그가 이토록 열의를 보이는 까닭은 동기를 추모하는 애틋한 마음과 후배들에게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인연을 소중히 지켜가고자 하는 그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었다.

농촌을 연구하고 학교를 위해 뛰다
현대사의 풍파를 직접 겪은 김 동문은 농민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암울한 시대를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의 가장 기본인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여러 대학이 모여 만든 농어촌 연구부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귀향하여 직접 농촌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후에 그는 농업진흥공사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농업 진흥에 힘쓰게 된다.

“선배들은 항상 저에게 조국과 민족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어요. 혼자만 호의호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불어 모두가 잘사는 사회. 선배들의 뜻 깊은 가르침은 젊은 시절 무언가 바꿔보겠다는 열망에 불타오르게 했고 50여 년이 지난 제 인생에 확고한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딱딱한 관료제 문화와 점점 쇠락(衰落)해 가는 농업의 현실은 그의 포부를 좌절시켰다. 한계를 느낀 그는 망설임 없이 퇴사를 결정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퇴사 후 현재 서보실업에 모태가 되는 작은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그가 기업을 맡은 이후로 서보실업은 승승장구하여 강소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20여 년 동안 공직에 있었지만 그는 거침없는 실천력과 특유의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새로운 거래처를 개척하고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현재까지 김 동문의 기업가 정신은 빛을 발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중국의 도전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김 동문은 굴하지 않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 결과, 품질에 대해 깐깐하다는 일본 시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하여 일본공업규격 마크인 JIS마크를 획득했다. 현재 서보실업의 생산품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업에 성공한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 공헌의 꿈을 실천하기로 한다. 근로장학사 동문회장에 선출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교육과 인재육성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회공헌에 관한 신념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은 많지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모교의 제 후배들을 훌륭히 길러내는 것입니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인재를 만드는 일. 어렵지만 우리대학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믿습니다.”

종심소욕불유구,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삶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근로장학사가 앞으로 더 확고히 자리 잡도록 노력해야죠. 더 많은 후배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인원도 50여 명 이상으로 늘려야겠고 해외연수 비용도 지원해 주고 싶습니다. 이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앞으로 꾸준한 투자와 관심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에게 근로장학사 사업과 학교에 대한 기부는 단순한 선행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떳떳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것 하나만큼은 후회 없이 잘했구나’ 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일. 그것은 바로 학교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과 더불어 후배들을 사랑으로 키워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선후배는 그야말로 호적없는 형제이고 학교는 곧 우리의 가정이니까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 가는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여 나이 일흔을 이르는 말이다. 설렘을 품고 캠퍼스를 누비던 스무 살 청년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종심의 나이에 이르렀다. 하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에 대한 사랑과 선후배의 소중한 인연은 그의 마음에 생생하다. 여전히 벅차게 차오르는 그 마음. 그것이 곧 김 동문이 추구하는 꿈이며 모든 동국인이 따라야할 길이다.

 

김삼철 동문 프로필

△1952년 출생 △동국대학교 농학과 1963년 입학 △농업진흥공사 입사(1973) △서보실업 인수(1992) △現 서보실업 대표이사 △現 동국대학교 근로장학사 회장

배종성 객원기자  baessi03@dongguk.edu

<저작권자 © 동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