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25 교수단시위 회고

4ㆍ19는 기념탑만 남았는가
합리주의 왜해는 부정 유발

  4ㆍ19는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이제 그것은 우리 기억에만 남아있는 지도 모른다. 시간과 더불어 사라진 4ㆍ19. 시간 속으로 가버린 그날. 올해도 4월 19일은 다시 오지만 그날 그 때 가버린 이들은 이제 다시 못 오누나.
  “시간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지, 그러나 그것을 묻는 사람에게 내가 말하려면 나는 그것을 몰라”라고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면 과거는 없고, 앞으로 다가오는 일이 없다면 미래도 없으며, 이제 아무것도 없다면 현재는 없다고 그는 다시 말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은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가기만 하는 지도 모른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4ㆍ19교수단 ‘데모’에 참가하였지요?”라고 묻는다면, 나도 참가하였든가 하는 정도로 기억은 흐리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나도 분명히 ‘교수’였다. 하지만 ‘데모’하는 것조차 모르고 그 ‘데모’단에서 저 바린 사람이었다. 여기 ‘참여한 者(자)’와 ‘버려진 者(자)’가 있다. ‘참여한 자’와 ‘버려진 자’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다. ‘참여한 자’는 마치 승리자요. ‘버려진 자’는 패배자라도 된 것처럼 4ㆍ19 그 땐 대단하였다.

  그러나 거리감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6ㆍ25 때 남하한 사람과 못한 사람 사이에도 있었다. 모든 일에 모두가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여한 자와 버려진 자 때문에, 역사는 아롱져서 엮어지는 지도 모른다. 4ㆍ19는 이제 그 기념탑만 남아있고, 기념행사만 남아있다. 모든 것은 흐르고, 멈추는 일이 없으며 누구나 같은 물을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헤라클리투스(533~475)의 생각은 진리이던가.
  모든 것은 변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생각은 날이 가고 달이 가며, 우리가 그 날수와 달수를 셈하는 데서 오는 생각이다. 만일 셈하지 않았다면 11년이 지났는지 10년이 지났는지 모르는 일, 그리고 사람들은 날수를 셈하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독재주의가 어떠하며, 또 경제정책이 어떠어떠하다하여 선진국, 후진국들을 말하고, 이것을 일러 문화니, 문명이니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흘러만 간다.
  4ㆍ19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뜻을 가진다. 그것은 부정과 부패, 그리고 독재에 대한 항거라는 뜻. 그리고 또 그 대신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겠다는 뜻이리라. 여기 역사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는 독재정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에도 있었다.
  민주주의란 말은 이미 옛 그리스 때부터 있었고 그 제도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때 그 이전의 모든 종교의 도덕을 버리고 믿지 않았으며 세상은 헝클어졌다. 이때 소피스트들이 나왔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개인의 자유, 개인의 우위성만 내세웠기 때문에 진리도 정할 수 없고 남에게 진리를 전할 수도 없다 하여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나오는 까닭이 있고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선동하였고 나라에서 믿는 神(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 스승의 이론을 더욱 깊이 하여 여기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 철학의 터가 마련된 것이다. 理性主義(이성주의) 철학은 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뒤 서양에 있어서 중세기를 지나 근세에 들어와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 그 꽃을 피웠으며, 중국ㆍ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중국에 있어서 유학은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철학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근세 이조 때의 철학은 더욱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철학이었다. 이렇게 동양이나 서양이나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가 발달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자가, 위정자가 좋아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사람이 이성을 가졌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그 이성에 따라 윗사람, 또는 지배자, 거느리는 사람에게 복종하고 따르게 하는데 아주 알맞은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사람의 이성을 찾아내고, 사상에 있어서 으뜸이 될 만한 공적보다는 그 이론을 가져다가 피지배자들을 괴롭히고, 부정과 부패를 일으켰으니, 부정과 부패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또 비웃을 것이다.
  부정과 부패는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 특히 힘 가지고 남을 거스리는 편에 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연을 비웃었다. 자연은 힘의 대결이요, 강한 자는 약자를 잡아먹고,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자연 그대로라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문화를 가지고 문명을 가지고 자연을 정복한다고 뽐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역시,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 할 것인가.
  그대로 미련은 남는다. 사랑하는 애인을 남기고 떠나듯이 미련은 남는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평화스럽고, 의좋게, 잘살 수 있을 것이 아닌가하는 미련이 있다. 이것이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있는 지혜를 다하여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 아닌가. 여기 4ㆍ19가 가지는 역사의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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