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맨에게 주는 글

  1935년 4월에 나는 우리 대학의 전신인 중앙 불교 전문학교의 신입생이었다. 한데 나에겐 한 가닥 회의가 있었다. 이 학교에 들어온 것이 잘한 노릇인가? 아닌가?에 대하여서 말이다.
  합격자 발표를 보고 나는 철학 담당교수이신 金斗憲(김두헌)선생(현 건대 대학원장)님을 찾아뵙고 흔들리는 젊은이의 마음을 전했다. 잘한 일이라고 하셨다. 나의 신념은 한층 굳어졌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미션 중학을 거쳐 들어온 것인데, 이 학교에선 별로 흔한 케이스도 아닐 뿐 아니라, 나로선 하나의 용단을 전제로 하는 일이기도 했기에, 약간의 마음의 동요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께서는 장자인 나에게 의사가 싫으면 목사를 택하라했고, 나는 철학을 하겠다고 맞섰던 터인데, 하필이면 불교학교를 택하고 나섰으니 문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의 생애를 자기가 책임을 지고 나서는 데는 하나의 결단이 앞서야 했던 것이다. 야스퍼스가 그의 저서 ‘실존철학’(제1장)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하나의 결단에 속하는 문제다’라고 했듯 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대게 실질을 떠난 학문의 경우, 이를테면 文學(문학)이나 藝術(예술)을 하는 것도 하나의 결단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불교를 택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東大(동대)는 역사 이래로 크나 작으나, 뚜렷하건 아니건 이러한 결단자들의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 겨레의 손으로 된 남자전문 학교라곤, 서울에 3개, 평양에 1개가 있을 뿐이었다. 고대의 전신인 보성전문은 법과생의 사회과학적인 학과만의 학교였고, 연대의 전신인 연희전문은 수리와 영문과뿐인 학교였기로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당시에 불교는 나에게 매력을 담뿍 풍겨 주는 종교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의 한국민들은 종잡아서, 독립 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면, 불교, 유교, 기독교를 각자의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의 사상계의 저류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불교였고, 따라서 春園(춘원)의 문학적ㆍ사상적 영향도 당시엔 적지 않은 것이었다. 불교전문과 혜화전문이 한국 문학 운동의 선봉장이 되고 그 온상이 된 것도 전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개강이 되자, 최남선 이광수 그리고, 이병도 선생들은 교실에서 뵈올 수 있었고, 退耕(퇴경), 包光(포광) 그리고 당대의 고승이신 石顚(석전) 朴漢永(박한영)교장님의 강의는 다음날 일본에 가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명강의였고 당시 경성대학에서 출강한 일본인 교육학교수의 강의도 감명 깊었다. 나는 이 학교에 잘 왔다 생각했고 뜻만 있으면 공부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날로 들기도 했다. 한데 白(백)성욱선생께선 여기를 떠나시고 안계셨기로 나는 교장선생님의 소개장을 들고 금강산 지장암에까지 찾아가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10년 수도 중의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白(백)박사님은 환도 후(1953) 모교로 돌아와 2대 총장 일을 하시면서 오늘의 동대의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下化衆生(하화중생)의 보살행에 오르신 것이었다. 석조관 도서관 및 대학원, 대학관 그리고 본부건물들이 이 대통령의 누차의 만류를 무릅쓰고 경무대가 한눈에 내려다보는 남산기슭에 연거푸 웅자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뒤늦게나마 동대는 한분의 불제자를 맞아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나 대학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된 셈이다.

  이로써 이 나라의 불교가 다시 한 번 겨레의 빛나는 조국을 향해 웅비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면 왜 白(백)총장의 재건에 이르기까지의 해방 후 약 10년간 東大(동대)는 답보상태만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연ㆍ고ㆍ이대를 뒤이어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東大(동대)가 왜 해방 전의 장관을 되찾는데 인색했던가?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것을 묻기 전에 전후 약 10년간의 공백이 오늘의 freustration했다는 것만을 지적하면 되는 것이다. 한데 동대의 운명은 한국불교의 그것과 공존한다. 東大(동대)의 발전은 한국불교의 전초기지가 되고 한국불교의 발전은 동대전진의 터전이 된다는 것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시호, 東大(동대)의 건설과정에 있어서의 10년의 공백은 한국불교의 10년의 동면과도 통하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은 東大(동대)의 육성을 급선무로 해야 한다는 결론뿐이다.
  新羅人(신라인)들의 애국애족의 마음은 오로지 불심을 바탕으로 해서만 三國統一(삼국통일)의 용지를 실현할 수 있었고, 高慮人(고려인)들은 위대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랑을 저 어마어마한 대장경을 통하여 과시하면서 몽고 야만족의 불법침범을 막으려 했고, 5천년의 역사 민족을 통째 이민족에게 넘겨준 李朝時代(이조시대)로 들어와선 排佛崇儒(배불숭유)의 기본정책에 짓눌려 기식이 엄엄했음에도 불구하고 國難(국난)이 있을 때마다 佛敎人(불교인)들의 호국정신은 충천의 기세로 조국 강토를 덮었으니 西山(서산)과 四(사)명의 두 大師(대사)의 출현은 그 두드러진 보기의 하나에 불과하다. 한번 시험 삼아 ‘한국의 불교가 아니었더라면’이라고 하는 가정법을 써본다면 첫째 한국의 산야는 더더구나 황폐화했을 것이 뻔하며 더 나아가서는 문화 민족으로서의 5천년의 역사는 과연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아찔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식민지 시대에 있어서 불교인은 그 호국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창달했는가? 한용운 스님의 저 열렬한 구국정신과 破邪顯正(파사현정)의 불교정신으로 뭉쳐진 그 고결한 인격과 그 영향력 하나만을 지적해도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감히 나더러 말하란다면 東大(동대)의 그동안의 뒤늦은 모습은 오로지 소승 경지에 머무른 불교의 비타협적 초연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유는 어디에 있든 간에 제도해야 할 대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살기를(Hineinleben) 주저하는 산간 은둔 불교의 소극성, 비현실성 등등이 자칫하면 근대성과 위배되는 결과를 낳았고, 찬란했던 왕년의 장관을 되찾는데 극성맞은 후진 사회의 인간적인 보조와 발맞출 수가 없는 본의 아닌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리하여 시대의 요청에 호응하거나 앞장서 시대의 수요조건을 마련하는 따위의 탈바꿈을 단행하는 데 기민성을 잃었거나 용감하지 못했던 것도 저간의 부인 못할 사실에 속한다. 여기서 탈바꿈이라고 하는 것의 실례 하나는 해방 전과 후는 나라의 형편이 전연 다르므로 文科(문과)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재빨리 한국의 미래를 예견하고 이ㆍ공ㆍ의계에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위한 전 불교계의 총체적인 노력이 여기에 경주되었더라면 東大(동대)의 약진과 발맞추어 한국 불교의 비약도 왕시의 新羅(신라)를 방불케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불교는 外面(외면) 佛敎(불교)에서 다시 對決(대결) 佛敎(불교)에로의 지향을 위해 전열을 갖추고 있고 이 새 터전 위에서 東大(동대)는 오랜 숙원이던 국제 규격의 축구장을 겸한 운동장과 인접한 공무원교육원의 건물과 대지에로 판도를 넓혔으니 그 장래는 아니 밝다 할 수 없다. 大悟一番(대오일번), 생각만 가다듬으면 金剛不壊(금강불괴)의 意志(의지)와 創造力(창조력)으로써 세력의 만회쯤 문제도 안 된다. 축구 왕국 재건에의 당당한 보무가 이를 설명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한국 문화의 명실상부한 요람이던 동국대학이 세계 대학에로의 오늘의 자세는 한국불교의 세계종교에의 근대적인 전진과 더불어 웅비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 소지는 이미 닦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Alma mater 東大(동대)의 젊은 앞날에 太陽(태양)처럼 뜨거운 불력의 가호가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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