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홀연히 집을 나서 산천을 방랑하는 버릇이 있다. 이것이 계절병인지 마음병인지 나도 모른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은 리드미컬하게 돌고 돈다. 나는 이것을 ‘리듬의 계절’ 이라고 명명해 본다.
  지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물레(a spring wheel)가 아니든가. 이 거대한 물레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과 같은 사시절후를 생성 반추하면서 영겁을 자아낸다. 이 과정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이러한 계절의 리듬을 타고 생성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들 인간도 자연의 한 존재이며 자연의 일부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늦가을 단풍이 붉게 탈 무렵이면 나는 슬그머니 집을 나선다. 대개의 경우 심산유곡의 고요한 산천을 찾아 길을 나선다. 올해도 11월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나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자리 잡고 꿈틀거리는 방랑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나의 계절적ㆍ체질적 욕구이며 특징이다. 마치 인간이 지닌 원초적 욕구(libido)인 것처럼.

  나는 여장을 꾸려 황급히 집을 나선다. 여장이래야 등산복에다 등산용 배낭과 등산화 정도가 고작이다. 여기에다 워즈워스의 낡은 시집 한 권이면 그만이다. 내 사색과 정서의 빈 공간을 채워 줄 그 무엇을 찾아 길을 나선다. 여행길에 오른다.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긴 여정이 아니던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애당리의 산수풍광은 그런대로 수준급이다. 이곳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길게 누워 교차하는 산간 오지다. 이때쯤이면 애당리 일대의 들판과 산천에는 당귀를 비롯한 각종의 약초가 이름 모를 무수한 자연초와 더불어 함께 어울려 거대한 교향곡을 이루면서, 그 신비하고 상큼한 내음이 지나가는 가을 나그네의 후각을 진하게 자극한다. 이곳 애당리의 개울가 어느 초옥에서 기거한다는 C노인은 묵직한 쇠망치를 들고 나와 개울가 바위를 치니 그 밑에서 한가롭게 잠자던 산천어가 기절초풍하여 하얀 배를 물위에 드러낸다. 노인은 얼른 듬썩듬썩 고기를 주워 모아 그 자리에서 배를 따서 그냥 씹어 삼킨다. 노인의 두 눈은 마치 심산유곡에서 포효하는 맹수의 그것처럼 예리한 광채가 번쩍인다.

  일찍이 에릭 호퍼는 ‘자연과 도시’라는 글에서 “자연은 고양된 사상과 정서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자연은 건강과 활력의 원천”임을 생각해 본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의 절규가 가을 나그네의 귓전을 스친다.
  현대문명의 비극은 자연을 무차별하게 파괴하고 정복하는 데 있다. 바야흐로 첨단화되어가는 광속 테크놀로지가 그리고 과도한 지성만능주의가 현대인의 정서와 영혼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점차 본성을 상실한 채 첨단 메커니즘의 그늘에서 비틀거리며 그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국의 수필가 해즐릿은 여행에 관한 그의 수필에서 “자연의 들판이 바로 나의 서재요, 자연은 나의 교과서”라고 했다. 모든 인위적인 제도나 법률ㆍ법칙은 얼마나 불안정하며 불확실하고 또 허구적인가. 오직 자연의 법칙과 질서만이 영원하며 완벽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1박 2일의 여정을 마친 나그네는 귀향길에 오른다. 춘양역(14:53 발) 경주역(18:09 도착)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싣는다. 이 사색과 회상의 계절에 문득 서산대사의 다음 시구가 생각난다.
  山自無心碧(산자무심벽) / 雲自無心白(운자무심백) / 其中一上人(기중일상인) / 亦是無心客(역시무심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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